소설리스트

곤륜패선-99화 (99/325)

< 제 31장. 뒤끝 있는 자들. -01 >

나름 꽤 긴 여정을 끝마치고 왔지만 벽우진은 쉴 틈이 없었다.

추면색귀를 추포하러 떠난 동안 업무들이 밀려 있었기에 이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청민이 있다고는 하지만 곤륜파 대소사의 최종결정권자는 그였기에 결국 일에 파묻힐 수밖에 없었다.

“어후. 왜 이렇게 봐야 할 서류들이 많은 거야. 얼마나 떠나 있었다고.”

책상 위에 탑처럼 쌓여 있는 서류더미들을 쳐다보며 벽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왔던 것이다.

또 글은 왜 그렇게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것인지.

똑똑똑.

“사형, 저 청범입니다.”

“들어 와.”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서류들을 노려보고 있을 때 서진후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그런데 서진후의 곁에는 서예지도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형.”

“난 좋지 못하다.”

“허허허.”

뚱한 벽우진의 대답에도 서진후는 웃었다.

이런 모습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보니 이제는 적응이 되었던 것이다.

서예지도 마찬가지였고.

“어제 좀 격렬하게 대련하는 거 같던데?”

“근래 작은 깨달음이 있었거든요.”

“그래?”

“예. 물론 실마리만 잡은 거라 진 호법을 넘을 수는 없었지만요.”

“아직은 좀 힘들지.”

벽우진이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채로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천단을 먹고 환골을 이루며 서진후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고 하나, 아직 진구를 넘는 것은 무리였다.

적어도 십 년은 더 정진해야 따라잡을까 말까였다.

“그래도 점차 좁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진 호법은 조급함을 느끼겠지. 정체된 지 꽤 오래 되었을 테니까.”

“안 그래도 그래서인지 더 열심히 개인수련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도 자주 봐주고요.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맞아. 나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이야? 얼굴에 멍도 지우지 못하고.”

“하하하.”

서진후가 반사적으로 왼쪽 눈두덩이를 쓰다듬었다.

나름 계란을 굴렸는데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는 듯했다.

“사부님께 보고드릴 게 있어서요.”

“공적인 자리에서는 장문인이라고 해야지.”

당당하게 벽우진을 향해 사부라고 호칭하는 서예지를 향해 서진후가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아무리 무기명제자이자 첫 번째 제자라고 하지만 여기는 곤륜파 장문인의 집무실인 옥청궁이었다.

그런 만큼 공과 사는 엄밀히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괜찮아. 셋 밖에 없는데 뭘. 그리고 내가 그렇게 격식을 차리지 않는다는 거 잘 알잖아? 나중에 나이 먹으면 네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조심할 거야.”

“그래도 사형.”

손을 휘휘 휘젓는 벽우진을 향해 서진후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러나 벽우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도 사형이라고 그러잖아.”

“흠흠!”

“편하게 해, 편하게. 어차피 똑같은 인간인데. 난 딱딱한 거 싫어. 불편해. 다른 장문인들이나 가주들은 모르겠지만 난 이게 좋다.”

“알겠습니다.”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서진후가 뭐라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벽우진은 그에게 있어 윗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서진후는 더 이상 이 부분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래. 보고할 게 있다고?”

“예.”

서예지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옆에 앉은 조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해 봐.”

벽우진이 서류더미를 밀어내며 물었다.

얼마든지 들어주겠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서진후는 긴장한 것도 잊고 피식 웃었다.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건 내가 원한 삶이 아니야. 난 탈출해서 유유자적하게 사는 게 꿈이었다고. 상황이 이렇게 돼서 어쩔 수 없이 여기에 앉아 있는 거지.”

“사형 성격상 쉽지 않은 자리이기는 하죠. 그런데 이제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입에 발린 말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칭찬도 너무 자주 하면 약발이 떨어지는 법이야.”

벽우진이 책상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평소에 자주 볼 수 있는 삐딱한 자세였다.

“지난번에 얘기했던 안정적인 수입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요.”

“아직 여유롭잖아? 재정적으로 궁하진 않은 걸로 아는데?”

“맞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동이 날 겁니다. 또 언제까지 산적들을 때려잡을 수도 없고요. 중원에서 총표파자가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 놈을 때려잡아서 몸값을 흥정하면 어때? 아니면 꿍쳐 놓은 돈을 뜯어내던가.”

서진후는 물론이고 서예지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총표파자가 나쁜 놈이라지만 이런 생각을 할 줄은 꿈에도 몰라서였다.

그래서 둘은 동시에 얼빠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왜 그래? 새삼스럽게. 산적 한두 번 때려 잡은 것처럼.”

“아, 저로서는 상상조차 못한 생각이라서요.”

“난 수적들도 생각하고 있는데. 탈백강시들을 떼로 태워온 게 바로 황하수로채 아냐? 그놈들도 근시일 내에 손봐줘야지.”

“그건 좋은 생각 같습니다.”

“물론 꿍쳐놓은 것들도 싹 다 털고. 반은 다시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그럼 몇 년은 버티지 않을까 싶은데?”

벽우진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로 말이다.

“황하의 통행료를 생각하면 아마 산적들보다 더 많지 않을까 예상되긴 합니다만, 그것 역시 일시적인 방편일 뿐입니다. 꾸준하고 안정적인 수입원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게다가 언제까지 사형이나 호법들이 산적과 수적들을 퇴치하러 다닐 수도 없고요.”

“흐음. 그렇긴 하지. 어떻게 보면 한 철 장사이니까. 아무리 산적들과 수적들이 잡초처럼 자라난다고 해도 몇 번 돌아다니면 청해성과 감숙성에서는 씨가 마르겠지. 그럼 서장으로 넘어가서 마적단을 노릴까?”

서진후가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 이 말이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걸 그는 확실하게 알 수 있어서였다.

“청해성이라면 모를까 굳이 서장까지 가실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사형.”

“혹시 알아? 서장 갈 일이 있을지.”

“우선 이것부터 읽어주십시오. 나름 제 생각을 적은 것들입니다.”

“흠.”

서진후가 화제를 돌리며 품속에 가져온 보고서 한 장을 벽우진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벽우진의 관심이 보고서로 움직였다.

“제 생각과 아들의 의견도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곤륜산의 특산품을 만들자?”

“예. 곤륜산은 중원에서 명산으로 손꼽히는 산이지 않습니까. 산세는 물론이고 기운 역시 범상치 않고요. 그걸 이용해 약초나 차를 재배해서 수입원으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축을 대규모로 키우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산세를 생각하면 그건 효율이 좋지 않을 듯해서 배제했습니다.”

“약초밭이라. 확실히 그쪽에 전문가가 있기는 하지.”

벽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자연스레 한 사람이 떠올라서였다.

그리고 서진후 역시 비현을 염두에 두었을 터였다.

“차로 예를 들면 군산은침처럼 곤륜산만의 고유한 맛을 지닌 차를 만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통은 저희 청하상단이 맡으면 되고요. 약초 같은 경우 비싼 건 비호표국을 이용하면 되니까요.”

“호오.”

벽우진이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의외로 착착 아귀가 맞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지금 섣불리 규모를 키울 수 없는 곤륜파의 사정상 약초나 차를 재배해서 파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제자를 선별하고 키우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언제까지 비천단에 의지할 수도 없고 말이지.’

아무리 효율을 극대화한 영단이 비천단이라고 하나 그렇다고 남아도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벽우진이 일일이 도와줄 수도 없는 것이었고.

게다가 비천단 같은 영단을 함부로 팔기도 애매했다.

비현이 돌아가면 더 이상 비천단을 제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습니까?”

“확실히 나쁘지 않은 계획안 같아. 안정적인 수입은 꼭 필요하니까. 그렇다고 땅이나 건물을 사기에는 아직 우리 인원이 그리 많지 않고. 언제까지 청하상단과 비호표국에 기댈 수도 없으니까.”

“그럼 시작할까요?”

“응. 네가 주도적으로 한 번 해 봐. 지원은 팍팍 해줄 테니. 비 호법도 붙여주마.”

“알겠습니다.”

서진후가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제대로 사문을 위해 일을 하는 것 같아서였다.

지금껏 받기만 했었기에 서진후는 이번 과제를 제대로 해볼 생각이었다.

“보고는 알아서 하고. 굳이 매일 할 필요 없어. 아니면 서면보고로 짧게.”

“예.”

“무룡대 애들은 어때? 잘 지내고 있어?”

특산품 계획을 서진후에게 일임한 벽우진이 이번에는 서예지를 쳐다봤다.

현재 곤륜파에는 하오문 소속도 적지 않게 머무르고 있기에 그들에 대해 물은 것이었다.

“큰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희들과 대련을 하면서 실력도 꽤 빠르게 늘고 있고요. 물론 격차는 좀 있습니다.”

“문주랑 양 분타주는?”

“아직 머무르고 있어요.”

“그래?”

벽우진이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직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뽕을 제대로 뽑으려는 듯했다.

물론 아이들에게도 손해는 아니었다.

“비 호법님께 상당한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럴 테지. 본파의 변화에 누구보다 빠삭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 더구나 무룡대와의 대련으로 더욱 달아올랐을 거야. 무슨 방법으로 이렇게 빨리 성장했는지 궁금할 테니까.”

“안 그래도 넌지시 물어보더라고요. 근데 대답한 아이들은 없었어요.”

“당연하지. 우리 애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확신에 찬 벽우진의 말에 서예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애들이라는 범주 안에는 그녀 역시 있어서였다.

“아마 오늘 중에 사형을 찾아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겠지. 추면색귀를 잡는데 도움도 많이 받았으니까.”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받은 게 많다고 원하는 걸 곧이곧대로 줄 생각은 없었다.

받은 게 있다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게 맞지만 그렇다고 가진 걸 죄다 퍼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서요.”

“나 좀 도와주면 안 돼?”

“저는 속가제자입니다.”

“매몰차네.”

단칼에 거절하는 서진후의 모습에 벽우진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좀처럼 줄지 않는 서류더미를 멍하니 쳐다봤다.

책상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채로 벽우진이 결재를 시작했다.

그런데 삐딱한 자세와 달리 벽우진은 의외로 꼼꼼하게 서류를 읽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건성으로 넘기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표정에는 귀찮은 기색이 완연했다.

똑똑똑.

“들어와.”

중식마저 거른 채 밀린 업무를 보던 벽우진의 귓가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벽우진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접니다, 사형.”

“응. 알고 있어. 이 사태의 원흉.”

“허허허허. 저는 장문인이 아닙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청민이 멋쩍게 웃었다.

벽우진이 없을 시 그가 장문인 대리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장문인인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얼마 안 가 벽우진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청민으로서는 정리만 하는 게 최선이었다.

“간단한 것들은 네가 결정했어도 됐잖아?”

“하고 남은 게 그 정도입니다.”

“일부러 다 떠넘긴 거 같은데?”

“떠넘기다니요. 원래 사형께서 보셔야 하는 일입니다.”

“청범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휙 날아갈 것 같다.”

벽우진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답지 않게 하소연을 하듯 약한 소리를 내뱉었던 것이다.

“도망칠 구실을 만들면 안 됩니다, 사형.”

“쯧! 눈치만 늘어서는. 근데 두 사람을 데리고 어쩐 일이야? 분위기가 묘하기도 하고.”

의외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는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벽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히 그는 배혁문과 청민을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 제 31장. 뒤끝 있는 자들.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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