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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97화 (97/325)

< 제 30장. 추면색귀(醜面色鬼). -01 >

딸의 비명소리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옆방에서 자고 있던 아비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 뒤로 아내로 보이는 중년여인과 아직은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세 사람의 등장에도 중년인은 실실 웃기만 했다.

부모가 나타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어서였다.

“허업!”

오척단구의 괴한에게서 흘러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세에 득달같이 달려들 것 같았던 애비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중년인이 흘리는 기세에 막중한 중압감을 느낀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들과 부인도 다르지 않았다.

“흐으읍!”

순식간에 바닥에 엎어져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세 사람의 모습에 중년인이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벌레처럼 벌벌 기는 모습을 보자 가슴 가득 우월감이 차올랐던 것이다.

“크흐흐흐! 그래. 그렇게 조아리고 있어라. 이 몸이 볼 일을 다 볼 때까지.”

“아, 아빠! 엄마!”

“그래. 아직 안 죽였으니까 넌 걱정하지 말고. 참고로 네가 어떻게 해야지 부모랑 동생이 무사할까?”

“······.”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상황에 열아홉이나 될까 말까한 소녀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괴한이 무엇을 노리고서 자신의 방에 들어왔는지 모를 수가 없어서였다.

동시에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똑똑한 아이네. 본좌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어.”

“그, 그만 두지 못하겠느냐!”

“허어. 네깟 놈이 어딜 감히!”

퍼억!

중년인이 표홀한 움직임으로 단숨에 장년인에게 달려들어 따귀를 날렸다.

그런데 따귀를 맞은 장년인이 벽까지 날아갔다.

일반 양민에게 중년인은 내공까지 사용한 것이었다.

“여보!”

“아빠!”

꿀꺽!

벽에 부딪친 후 입에서 피를 토해내는 장년인의 모습에 부인과 아들이 비명을 질렀다.

반면에 침상 위에 있던 소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중년인이 보여준 행동은 어떻게 보면 그녀를 향한 경고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뜻대로 따르지 않으면 가족이 모두 죽게 될 거라는.

덜덜덜!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신음도 억눌린 채로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주르륵!

동시에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족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었다.

“날 만족시킨다면 가족들은 살려주마. 물론 너도 살려주고. 나도 사람인데 살인을 밥 먹듯이 하지는 않아.”

“저, 정말 약속하시는 건가요?”

“물론. 대신 말했던 대로 날 만족시켜야 해. 날 아주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계속 봐줘야 하고. 애무도 시키는 대로 해야 해.”

“···알겠어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부친의 모습에 소녀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처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크흐흐흐! 잘 생각했다.”

스르륵!

미인이라는 범주 안에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소녀의 미색에 중년인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예전이었다면 감히 거들떠보지도 못했을 미인이 알아서 이불을 내리고 옷을 한 겹 한 겹 벗는 모습을 보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하물 또한 바지를 뚫고 나올 듯이 솟구쳤고 말이다.

“흑! 흐흑!”

“걱정할 것 없다. 고통은 잠시뿐이니까. 아니, 오히려 즐기게 될 것이다. 본좌가 생긴 건 이래도 잠자리 기술 하나는 끝내주니까. 아마 나와 운우지락을 나누면 나에게서 떠나기가 싫을 것이다.”

“안 된다, 이 놈아!”

괴한의 일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남편을 대신해 부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으로 인해 몸을 움직이지가 쉽지 않았지만 엄마는 강하다라는 격언처럼 그녀는 악착같이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쉬지 않고 악을 썼다.

혹시라도 자신의 외침을 듣고 주변에 있는 이웃들이 도와주러 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엄마! 안 돼요!”

하지만 그 모습에 딸은 기겁했다.

부친도 생사가 불분명한데 모친마저 그리 된다면 그녀로서는 제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남동생도 있었다.

지금만 참으면, 오늘 밤만 참으면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기에 그녀는 간절하게 엄마를 불렀다.

“늙은 년이 주제도 모르고. 뒤지고 싶은 거냐?”

“자, 잠시만요!”

서서히 올라가는 주름 가득한 오른손에 소녀가 헐레벌떡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로 인해 얇은 잠옷이 벗겨져 젖가리개가 드러났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엄마가 맞는 것보다는 가슴이 조금 보이는 게 나아서였다.

“죽여! 죽이라고! 하지만 우리 딸은 안 된다!”

“그럼 네년을 죽이고 잡아먹으면 되겠네.”

“잠깐만···!”

푹.

늙어도 예쁘기만 하다면 가리지 않는 게 중년인이었다.

지금껏 결혼한 여인을 강제로 품은 적도 수십 번이었고.

하지만 그는 못생긴 여자는 싫어했다.

때문에 조용히 만들려고 손을 들어 올렸는데 그 순간 한 줄기 소성이 방 안을 갈랐다.

푸하핫!

동시에 동전만한 구멍이 뚫린 중년인의 손등에서 피가 솟구쳤다.

“끄아아악!”

“역시 악당들은 이기적이라니까.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죽이면서 제 몸은 또 끔찍하게 여겨.”

“이기적이라서 악당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은 다른 이를 배려하기 마련이니까요.”

“묘하게 말 되네.”

투욱.

작은 방에 자리 잡은 창문 너머로 두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나 알 수 없는 말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누, 누구세요?”

“일단은 협객이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해결사?”

고통에 지혈도 하지 못한 채 방방 뜨는 괴한에게서 딸을 데리고 최대한 멀리 떨어지며 중년여인이 물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는 경계어린 기색이 완연했다.

괴한 때문에 경계심이 극도로 올라간 것이다.

“해결사요?”

“예. 저 놈을 잡으려고 왔거든요. 곤륜산에서 여기까지요.”

“아···!”

곤륜산이라는 말에 중년여인은 물론이고 딸과 아들의 동공 역시 확대되었다.

저잣거리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청범이 너는 아이의 부친부터 챙겨. 기식이 엄하다.”

“예, 사형.”

“그 전에 저 놈부터 잡아 놓을까나.”

추면색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들은 후 벽우진은 서진후와 함께 날밤을 새며 이동했다.

한동안 잠잠히 있던 추면색귀가 본격적으로 활동할 기미를 보인다는 말에 잠까지 포기하고 수십 리를 달려왔던 것이다.

그 결과 벽우진은 간발의 차이로 일이 벌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웅.

“무, 무슨···!”

늘 그렇듯이 뒷짐을 진 자세로 서 있던 벽우진이 왼손을 들었다.

그러자 악을 쓰며 비명을 지르던 추면색귀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예의 허공섭물의 기예로 추면색귀를 들어 방에서 빼내었던 것이다.

“작은 놈이 목청은 좋네. 그 좋은 목청을 좀 좋은 일에 사용하지. 쯧쯧.”

“누, 누구십니까?”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추면색귀가 벽우진을 쳐다봤다.

한눈에 자신을 띄운 자가 벽우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눈알을 쉴 새 없이 굴렸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고 있으면 살아나올 수 있다는 말처럼 일단은 말로 해결을 볼 작정이었다.

“그건 알 거 없고. 넌 그냥 얌전히 날 따라오면 돼.”

“예?”

“물론 반항해도 좋아. 그래도 넌 내 손에 끌려갈 테니까. 그러니 마음껏, 할 수 있는 것 다 해봐. 이왕이면 후회가 없는 게 좋잖아?”

부르르르!

벽우진이 히죽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더없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추면색귀에게는 사신의 미소처럼 섬뜩하게 다가왔다.

“아, 한 가지 잊을 뻔했네. 난 네 목숨만 붙여서 데려가면 되거든. 그러니 각오를 단단히 해두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이긴. 여기서도 은원은 확실하게 풀고 가야한다는 말이지.”

추면색귀의 동공이 더 없이 크게 확대되었다.

말을 하면서 벽우진이 아직 방 안에 남아 있는 일가족을 바라보고 있어서였다.

“어···.”

“걱정하지 마.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니까.”

“저,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말했잖아? 협객 놀음 중이라고. 넌 추악한 색마이니 당연히 협객의 손에 붙잡혀야 하지 않겠어? 그간 저질렀던 대가를 치르기 위해.”

“사, 살려주십시오!”

추면색귀는 언제 일가족을 몰아붙였다는 듯이 벽우진을 향해 두 손을 비비며 싹싹 빌었다.

아무리 자신이 왜소하고 가벼운 체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그래도 성인 장정이었다.

한데 그런 자신을 손짓 하나로 가볍게 들어 올리는 모습에 추면색귀는 반항이라는 두 글자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또한 공격할 마음도 품지 않았다.

‘덤벼 봤자 개죽음이다!’

추면색귀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사귀(四鬼)의 일인인 그였지만 아무리 그라도 허공섭물로 사람을 띄울 수는 없었다.

그것도 저렇게 편안한 자세로는 더더욱.

때문에 추면색귀는 싸울 생각을 버리고서 납작 엎드렸다.

“아직 안 죽인다니까. 아직은 말이지.”

꿀꺽!

아직이라는 두 글자가 추면색귀는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다.

저 말인즉슨 나중에는 죽인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래서 추면색귀는 비틀려 있는 눈알을 정신없이 굴렸다.

“어,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

“네가 생각하기에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

“······.”

추면색귀가 말을 아꼈다.

본능적으로 섣불리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암담한 결과만이 떠올랐다.

“일단 급한 불은 껐습니다, 사형.”

“내상은?”

“급한 대로 제가 다스렸습니다. 찢어진 입 안은 금창약을 발랐고요. 비 호법님의 특제 금창약이니 이틀 정도 푹 쉬면 흉터 없이 말끔하게 나을 겁니다.”

“잘했다.”

서진후의 보고에 고개를 주억거린 벽우진이 가볍게 지풍을 날렸다.

일가족의 안전이 확보되자 추면색귀의 마혈을 짚은 것이었다.

쿠웅!

“큭!”

그와 동시에 추면색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벽우진이 더 이상 허공섭물을 펼치지 않은 것이다.

그로 인해 추면색귀는 볼썽사납게 바닥에 처박혔다.

“해혈할 수 있으면 해 봐. 그럼 도망치는 걸 허락해주지. 물론 놓아줄 수는 없지만.”

“끄으응!”

“아마 쉽지 않을 거야. 다른 이도 아니고 이 몸이 직접 한 점혈이니까.”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은 채로 추면색귀가 끙끙거렸다.

안 그래도 마혈이 짚힌 순간 그는 온갖 방법으로 해혈을 하려고 했다.

일단 해혈을 한 다음에 기회를 봐서 탈출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점혈은 조금도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냥 데려가실 건 아니죠?”

“물론.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평생 남을 상처를 주었는데. 최소한 그 상처가 덧나지는 않게 해야지.”

벽우진의 시선이 서슬 퍼런 귀광을 번뜩이는 소녀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런 소녀의 눈빛도 어미에 비하면 약과였다.

딸아이를 색마에게 빼앗길 뻔한 중년여인은 살아 있는 원귀처럼 스산한 안광을 뿌리며 추면색귀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이제 열대여섯 살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언제 가져왔는지 빨래방망이 두 개를 양손에 꼬나 쥐고 준비 중이었고.

“마음대로 하시죠. 이 놈은 제가 확실하게 데려갈 것이니. 아마 오늘 이후로 다시는 보지 못할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도록 잊지 않겠습니다, 대협!”

뒤늦게 감사 인사를 잊었다는 듯이 세 가족이 연거푸 벽우진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벽우진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는 듯이 손을 저었고.

하지만 그런 훈훈한 분위기는 얼마 가지 않았다.

일가족이 본격적으로 복수를 시작했던 것이다.

“커허헉!”

야밤에 처절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지만 정작 그 소리는 마당 밖으로 벗어나질 못했다.

일가족이 마음껏 추면색귀를 두들겨 팰 수 있게 벽우진이 기막을 펼친 덕분이었다.

“죽어!”

“그렇다고 진짜 죽이면 안 됩니다. 그 놈은 아직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살기등등한 두 모녀를 적절히 말리며 벽우진은 기다려주었다.

그녀들의 한이 개운하게 풀릴 때까지.

< 제 30장. 추면색귀(醜面色鬼).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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