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9장. 최소한의 도리. -04 >
흑사방주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웃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게 아니었다.
어중이떠중이라고 보기 힘든, 진짜 무인들이 그의 휘하에 있었기에 흑사방주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서진후를 노려봤다.
“쥐새끼들이 아무리 많아 봤자 쥐새끼일 뿐이지. 사자는커녕 늑대라도 잡을 수 있을까.”
“뭐라고?!”
“늙은이가 감히!”
서진후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살기와 살의가 솟구쳤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안광을 줄기줄기 뿌려대며 그를 노려봤던 것이다.
하지만 그 흉흉한 기세에도 서진후는 눈 하나 꿈쩍이지 않았다.
그저 벽우진을 따라하듯 여유롭게 팔짱을 꼈다.
“하나는 마음에 드네. 일일이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니.”
“아무래도 팔다리 하나 정도는 잘라내야 정신을 차리겠어.”
광오해도 그렇게 광오할 수가 없는 발언에 흑사방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흑사방주의 앞을 지키고 있던 방도들 중 열댓 명이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흑사방주의 명령대로 팔다리 중에 하나를 잘라버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류무사들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서진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긴장했겠지만···.’
다가오는 흑사방도들을 주시하며 서진후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벽우진을 만나기 전이었다며 지금과 같은 자신감을 보이지 못했을 터였다.
불완전한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의 육체는 한참 전에 전성기를 지난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스으윽.
순식간에 포위망을 구축하며 다가오는 흑사방도들을 오만하게 응시하며 서진후가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흑사방도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나같이 매섭고 강맹한 살초를 뿌리며 그에게 쇄도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여기까지 안내했던 네 명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목숨은 살려두어라. 너무 쉽게 죽이면 재미없으니까. 왜 이딴 오기를 부렸는지에 대해서 들어보아야 하기도 하고.”
흑사방주가 심드렁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따로 말을 하지 않으면 수하들의 손에 서진후의 사지육신이 갈가리 찢겨나갈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감쪽같이 사라졌다.
쯔어억!
느릿한 서진후의 일격에 전방과 좌우에서 압박하며 달려들던 열두 명의 수하들이 모조리 양분되어 바닥을 나뒹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들이 베였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이 흑사방도들은 하반신을 잃어버린 채로 서진후에게 다가왔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엎어졌다.
영문을 모르는 채로 즉사한 것이다.
“어어?”
그 광경에 흑사방주는 물론이고 여기까지 안내했던 네 명이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흑사방에서 최정예라 할 수 있는 그들의 죽음에 정말 경악한 것이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저벅저벅.
단칼에 열두 명을 썰어버린 서진후가 무표정한 얼굴로 흑사방주를 향해 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주, 죽여!”
오로지 자신만을 주시하며 다가오는 서진후의 모습에 흑사방주가 넙데데한 얼굴에 식은땀을 폭포수처럼 흘리며 소리쳤다.
팔다리를 자르는 게 아니라 목을 잘라서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바람에 불과했다.
서걱.
일제히 달려드는 흑사방도들을 서진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썰어버렸던 것이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도륙하는 그 모습에 흑사방주가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뒤로 돌아서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자신을 주시하는 서진후의 눈빛 때문에 몸이 굳어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히, 히에엑!”
챙그랑.
달려드는 족족 목이 잘리고 심장이 갈리는 모습에 흑사방도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덤벼봤자 개죽음만 당하자 더 이상 달려들지 않고 도망쳤던 것이다.
퍼퍼퍼퍽!
하지만 그 중에 장원을 벗어난 이는 없었다.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가는 지풍에 뒤통수가 터져 나가거나 부상을 입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다.
저벅저벅.
순식간에 장원 안을 평정한 서진후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흑사방주를 정확히 노려보며 다가갔던 것이다.
그러자 흑사방주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살짝 고민했었는데, 역시 괜한 고민이었어. 쓰레기는 보이는 족족 치워버리는 게 맞는 것인데.”
“나, 날 건드리면 너는 물론이고 네 가족들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아느냐!”
“호오. 믿을 만한 뒷배가 있다? 하긴. 그러니까 그딴 몸을 가지고도 이런 세력을 가지고 있었겠지. 믿을게 없는데 아래 있는 놈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면···!”
“그래도 복수하겠지. 물론 이 마을사람들은 더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야 할 테고.”
서진후가 흑사방주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동시에 흑사방주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서진후의 태도에서 그는 무언가를 알아차린 것이다.
“야, 약속하겠다! 내 이름을 걸고! 지금이라도 멈춘다면 절대 해코지하지 않겠다! 하지만 날 죽인다면 귀호방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너는 물론이고 같이 있던 일행과 네 가족, 사문이 모조리 그 대가를 치를 거다!”
“허허허허.”
말을 하면서 더 기세등등해져가는 흑사방주의 모습에 서진후가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에는 같잖다는 기색이 잔뜩 서려 있었다.
어디를 믿고 있나 했는데 고작해야 귀호방이라고 하자 실소가 절로 흘러나왔던 것이다.
“왜 웃는 거지?”
“난 또 북해빙궁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귀호방? 고작 귀호방 따위를 믿고서 내게 큰 소리를 친 거냐?”
“······.”
북해빙궁이라는 말에 흑사방주의 얼굴이 굳었다.
어째 말투가 북해빙궁이 뒤에 있다고 해도 맞서 싸우겠다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강북 무림을 뒤흔들고 있는 바로 그 북해빙궁과도 말이다.
“나도 궁금해지네. 과연 나에게 너를 망가뜨린 죄를 물을 수 있을지. 곤륜파를 적으로 돌릴 자신이 있는지 말이야.”
“히끅!”
넙데데한 흑사방주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공동파가 몰락하고 귀호방이 나름 감숙성에서 위세를 떨친다고 하지만 감히 곤륜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수는 적지만 패선이라는 엄청난 고수가 곤륜파에 있어서였다.
더구나 십대호법이라 불리는 호법들의 실력은 감숙성에도 잘 알려져 있었기에 흑사방주는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했다.
“소, 소인이 허언을 지껄였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너무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거 아냐? 만약에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었으면? 귀호방이 두려워서 거짓을 말한 것일 수도 있잖아?”
“그,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장난기가 감도는 눈빛만 봐도 흑사방주는 알 수 있었다.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흑사방주는 엉거주춤하게 기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어떻게든 목숨만은 보전하고 싶어서였다.
“그런 눈치가 있으면 욕심도 적당히 부렸어야지. 아무리 공동파가 몰락했다지만 이건 인간적으로 너무한 거 같지 않아?”
“죄, 죄송합니다!”
“사과는 나한테 할 게 아니지. 당사자들에게 해야지. 죽었다면 그 가족들에게 하고. 그런데 모두에게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끄아악!”
엎드려 있던 흑사방주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서진후가 지풍으로 그의 팔다리 힘줄을 끊어버려서였다.
이윽고 손목과 발목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땅바닥을 서서히 적시기 시작했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고.”
퍼퍼퍼퍽!
검을 집어넣은 서진후가 양손으로 지풍을 날렸다.
죽여 버린 이들은 어쩔 수 없지만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이 그동안의 죗값을 받을 수 있게 친히 손을 쓴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서진후를 이곳에 데려온 네 명도 다르지 않았다.
“끄으으윽!”
“으흑!”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와 울음소리에도 서진후는 눈 한 번 끔뻑이지 않았다.
그동안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고 등골을 빼먹었을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양호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엄밀히 따져서 복수는 그의 몫이 아니었다.
“어후. 지저분해. 냄새도 좀 역하고.”
“오셨습니까.”
“마무리는 잘 지은 거 같아?”
“예. 그동안 피해 받은 사람들의 몫도 남겨 두었습니다. 그냥 죽여 버리는 건 너무 관대한 처사 같아서요.”
진짜 신선처럼 깃털 같이 바닥에 내려서는 벽우진을 향해 서진후가 보고했다.
죽이는 게 깔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들이 죗값을 제대로 치렀음 했기에 서진후는 이런 결정을 내렸다.
“잘했다.”
“사형 말씀대로 조금 지저분하기는 하지만요.”
“뭐, 어때. 가축을 도축할 때도 피는 흘리는 법인데. 사람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거 없다. 특히나 이런 녀석들에게는.”
“아, 그리고 사문도 좀 팔았습니다. 귀호방을 거론하기에 저도 모르게 그만.”
“귀호방은 뭐야?”
벽우진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지나가는 식으로라도 듣지 못한, 처음 듣는 이름이어서였다.
“요즘 시끄러운 문파 중 한 곳입니다.”
“그래? 내가 신경 써야 해?”
“무시해도 됩니다. 제 선에서 해결 가능합니다.”
“이야~! 우리 청범이 많이 컸어? 이런 말도 하고. 역시 사람은 능력이 있어야 해. 무경이 높아지니까 자신감과 자존감도 더불어 상승하잖아?”
“모두 다 사형 덕분입니다.”
서진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이럴 수 있는 게 다 벽우진 덕분이었다.
그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기에 서진후나 청민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마지막까지 신경 써.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왕 시작한 거 아예 끝장을 내버려.”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저희 상단이 자주 가는 길목에 마을이 위치해 있기도 하고요. 귀호방도 나서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해결할 작정입니다. 만약 전쟁을 선택하면···.”
“진 호법 보내줄게. 청민이는 안 돼. 걔는 내가 없을 때 본산을 지켜야 하니까.”
“감사합니다.”
진구라면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기에 서진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혼자라면 조금 버거울지도 몰랐지만 태산권이라 불리는 진구가 합세한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돌아가자. 음식 식기 전에 마저 먹어야지.”
벽우진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따라 서진후가 발걸음을 옮겼다.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흑사방주와 문도들을 버려두고서 말이다.
오척단구의 작고 왜소한 체구를 가진 중년인이 밤거리를 거닐었다.
반달이 하늘 높이 맺혀 있는 야심한 시각이라 그런지 골목과 거리에는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어두컴컴한 거리를 중년인은 마치 훤히 보이는 것처럼 걷고 있었다.
“흐흐흐흐.”
구름에 가려졌던 반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중년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두 눈과 두 귀, 코와 입이 있기는 했지만 마치 마구잡이로 헝클어놓은 듯한 모습은 보는 이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삐뚤삐뚤한 이목구비는 같은 사람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기괴했던 것이다.
한데 특이한 외모를 가진 중년인이 음흉하게 웃으며 담벼락 한 곳에 멈춰 섰다.
스윽.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다시 한 번 살펴본 중년인이 땅을 박찼다.
작은 체구답게 날렵한 움직임으로 단숨에 담을 넘어 마당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흐으음!”
마당에 착지한 중년인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폐부 깊숙이 서늘한 밤공기가 들어왔다.
동시에 그의 눈 역시 반짝거렸다.
잠시 후에 느낄 쾌락에 벌써부터 흥분되었던 것이다.
트드득.
추악한 얼굴에 미소가 맺힘과 동시에 중년인의 손이 창문을 뜯었다.
섬세한 손놀림으로 소리 없이 창문을 뜯어내 방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누, 누구세요?”
“흐흐흐. 오늘밤 네 지아비니라. 처녀 귀신을 면하게 해줄.”
“꺄아악!”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에 서서히 드러나는 오척단구 괴한의 얼굴에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 올렸던 소녀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낯선 남자의 침입도 침입이지만 외모가 너무나 끔찍해서였다.
“웬 놈이냐!”
< 제 29장. 최소한의 도리.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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