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93화 (93/325)

< 제 29장. 최소한의 도리. -01 >

“색마요?”

“응.”

서진후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다짜고짜 하산해서는 색마를 잡아야 한다고 하자 무슨 말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런 서진후에게 벽우진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허어.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사실 사형께 따로 말씀을 드리진 못했는데 감숙성은 물론이고 섬서성의 분위기가 장난 아니게 흉흉합니다. 공동파와 화산파, 종남파의 생존자들이 나름 분전을 하고 있습니다만, 중심을 잃어버린 문파가 늘 그렇듯 큰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억눌려 있던 사마외도와 정사중간의 무문들이 들고 일어나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요. 그리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타 온갖 악인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왜 보고 안 했어?”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당장은 청해성이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지지기반을 확실히 다져놓은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또한 공동파의 경우 우리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나중에 따질 수도 있으니까요. 사형께서 한 번 퇴짜를 놓으셔서 나중에 재건을 하면 분명 뒷말이 나올 겁니다.”

“어째 내 탓이라는 말로 들린다?”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말하는 투가 그를 정확히 저격하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만약 공동파가 재건에 성공한다면, 확실히 벼르긴 할 터였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이기적이니까.

“아닙니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드리는 겁니다. 일단 전제조건이 공동파가 다시 일어나야 하니까요. 근데 아마, 쉽지 않을 겁니다. 재산이야 다시 벌면 되고 사람도 제자들을 받아들여 키우면 되지만 가장 중요한 공동의 무공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니까요.”

“아직은 꽤 남아 있잖아? 비밀서고 같은 게 공동산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북해빙궁에서 싹 쓸어가지 않았겠습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구대문파에 꼽히는 공동파의 무공인데요.”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가 북해빙궁주라도 일단 무고부터 털 터였다.

“근데 너 요즘 수련 제대로 하는 거 맞아? 딱히 달라진 점이 없는데?”

서진후를 따라 걸어가면서 벽우진이 눈매를 꿈틀거렸다.

환골을 한지 제법 시일이 지났음에도 딱히 무공에 진전이 있는 것 같지 않아서였다.

“죽어라 하고 있습니다. 업무에서 손을 뗀지 오래 되기도 했고, 예지가 본산에 가 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예지는 어떻습니까? 북해빙궁하고 한판 했을 때 예지도 나섰다고 들었습니다.”

“예지가 서신 안 보냈어?”

“의외로 털털한 면모가 있어서요. 아니면 수련에 열중해서 그런지 이레에 하나 올까 말까입니다. 그마저도 며느리한테 가는 게 대부분이고요.”

서진후의 얼굴에 서운함이 가득 떠올랐다.

금이야 옥이야 하며 업어 키운 게 그인데 정작 서신이 뜨문뜨문 오자 제아무리 서진후라도 별 수 없었다.

밖에서야 철혈이니 대장부니 해도 서예지 앞에서는 그저 손녀바보 할아버지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엄마를 이기긴 힘들지. 모녀지간은 자매지간처럼 보인다잖아. 차라리 아빠랑 경쟁을 해. 그럼 승산이 좀 있지 않겠어?”

“···위로가 전혀 안 됩니다, 사형.”

“허어. 날 아는 녀석이 지금 나에게 위로를 바란 거냐? 응?”

벽우진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서진후가 결국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진짜 자신이 뭘 했나 싶은 것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렇게 속내를 꺼내니 가슴이 좀 시원해졌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가슴은 좀 뚫리네요. 엄청 답답했었는데. 사형도 아시겠지만 제가 청하상단에서 가장 큰 어른이지 않습니까.”

“엄청난 노인네지. 그것도 육체까지 회춘을 한.”

“···아직 그건 모릅니다. 아들 내외와 손자를 제외하면요.”

“비밀병기로 사용해서 나쁠 것은 없지. 사천당가도 그런 생각 같더만.”

굳이 전력이 다 밝혀져서 좋을 건 없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밝혀야 어중간한 것들이 나대지 않겠지만 그래도 전부 공개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벽우진은 생각했다.

무림의 격언에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자기 실력의 3푼은 숨기라고 말이다.

“그런데 조금 놀랐습니다. 저는 사형이 생면부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감숙성까지 갈 줄은 몰랐거든요.”

“대체 나를 어떻게 본 거야?”

“만사에 귀찮음을 느끼시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지금 게으르다고 돌려 깐 거지?”

“크흠!”

서진후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차마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어서였다.

그리고 그건 벽우진을 알고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일 터였다.

“허어. 세상이 삭막해졌다는 말을 믿지 않았었는데. 이제야 절감하게 되는구나. 그것도 청범이 네가 그럴 줄이야.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말이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것이로구나.”

“아니, 말이 어떻게 그렇게 흘러갑니까?”

“그럼 아냐?”

“아닙니다!”

“근데 나보고 게으르다며. 완전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없는 거지.”

벽우진이 진심으로 슬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천단까지 주고 환골까지 시켜줬는데 돌아오는 건 하극상뿐이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눈가를 훔쳤다.

“안 우시는 거 다 압니다. 연기인 것도 다 알아요.”

“쯧쯧! 사람이 장단도 맞춰주고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일단 여기에 잠깐 머물고 계십시오. 저는 준비 좀 하고 오겠습니다.”

“준비가 필요해? 요것만 있으면 만사형통 아냐?”

벽우진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엄지와 검지를 붙였다.

자고로 여정에는 돈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렇다고 돈이 궁한 두 사람도 아니었고.

“불필요한 지출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아껴야 잘 삽니다, 사형.”

“푼돈 모아 봤자 푼돈 밖에 안 돼. 자고로 돈을 모으려면 크게 벌어야지. 나 봐, 초창기에 산적들 싹 다 털어버리니까 자금이 금세 모였잖아. 절반 넘게 백성들에게 뿌렸는데도 충분하다 못해 넘쳤지.”

“흥청망청 쓰다가 진짜 망합니다, 사형.”

“에이. 망하면 또 어때. 이미 망한 상태에서 시작했는데.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워.”

“끄응!”

청범이 앓는 소리를 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얼른 준비하고 와. 갈 길이 멀다. 할 일도 많고. 그리고 다녀오는 김에 본산도 올라가자. 예지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습니다.”

청범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

무정하다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뿐인 손녀였다.

당연히 보고 싶을 수밖에 없었다.

“이참에 본산에서 수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여기야 일국이가 알아서 잘 하고 있잖아? 너도 빈둥빈둥 놀고 있고.”

“놀지 않고 수련하고 있습니다. 절정에 오른 뒤로 수련에 재미가 붙었거든요. 무사들 가르치는 재미도 쏠쏠하고요.”

“청해성 먹고, 감숙성으로 넘어가야지. 서장 쪽으로도 진출하고. 자고로 사내대장부는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

“많이 도와주십시오, 사형.”

“이럴 때만 사형이지?”

벽우진이 피식 웃으며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벽우진의 얼굴을 아는 하인들이 그를 극진히 모시는 것은 당연했다.

청하상단이 가장 어려울 때 구원해준 게 벽우진이었으며 지금의 성세를 누리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도 그였다.

그렇기에 하인들의 태도가 극진한 것은 당연했다.

“고 녀석이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네.”

별채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게 된 벽우진이 침상에 몸을 누우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시선은 활짝 열린 창문으로 향해 있었다.

정확하게는 곤륜산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던 것이다.

“뭐, 못 알아들었으면 어쩔 수 없고.”

벽우진이 이내 한숨을 늘어지게 하며 양팔을 머리 뒤로 교차시키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서진후가 준비를 다 할 때까지 한숨 자려는 것이었다.

해가 서산에 걸릴락 말락 하는 시각에 벽우진은 서진후와 함께 야산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기 전에 마을에 도착하고자 서둘러 경공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속도를 좀 더 올려야겠는데?”

“전 가능합니다!”

“역시 회춘의 힘인가.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는데. 새 장가를 가도 되겠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금 지치기는 했지만 아직 버틸 만한 모습으로 경공을 펼치던 서진후가 비틀거렸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말을 툭툭 던지는데 그게 사람을 참 기겁하게 만들었다.

“뭐 어때. 능력만 있으면 삼처사첩을 두는 세상인데. 더구나 네가 재산이 없어, 능력이 없어? 이제는 몸도 젊어졌는데 새 장가 가도 되지.”

“큰일 날 소리입니다. 전 그럴 생각 전혀 없습니다.”

“없으면 없는 거지, 뭘 그렇게 정색을 해?”

“사형께서는 가실 생각입니까? 사실 저보다는 사형께서 더 현실성이 있습니다만. 혼담도 꽤 들어오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서진후가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를 통해 넌지시 벽우진의 의중을 떠보는 곳도 많아서였다.

아무래도 벽우진이 일반적인 도인과는 궤를 달리하는 성격이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글쎄다. 내 나이가 일흔다섯인데 혼례라니. 그건 좀 아니지 않냐?”

“나이를 밝히지만 않으시면 이십대 초반이라 해도 믿을 만한 외모이시지 않습니까.”

“난 오히려 내 나이를 아는데도 딸을 들이미는 애비들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벽우진이 진심을 담아 혀를 찼다.

만약 그에게 딸이 있었다면 아무리 정략적인 이유라 하더라도 칠십 넘은 노인네에게 절대 보내지 않을 것이었다.

그건 자신을 위해서지 딸을 위한 선택이 전혀 아니었으니까.

“자신과, 그리고 가문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으니까요. 딸 입장에서도 평범한 양민들과 다른 삶을 살아온 만큼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저는 그런 이들과 많이 부딪쳐서 그런지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갑니다.”

“하긴 내가 뭐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니지. 다 각자의 삶이고, 선택이니까.”

“그래서 사형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뭘?”

벽우진이 무엇을 묻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능청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서진후도 만만치 않았다.

“혼례요.”

“너도 참 끈질겨.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그러고 싶냐?”

“궁금하니까요. 청민 사형도 저랑 마찬가지일 걸요?”

“그 녀석은 요즘 정신없어. 수련도 수련이지만 제자도 슬슬 받아들여야 하니까. 가뜩이나 인원이 적은데 제자라도 많이 들여야지. 속가제자 말고 본산제자를.”

“아.”

서진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청민은 속가제자인 그와는 상황이 달라서였다.

게다가 규모를 키워야 한다는 점에서는 그도 동감하고 있었다.

“마을은 아직 멀었어? 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는 거 맞아? 지금이라도 노숙할 터를 찾아야 하는 거 아냐? 내 기감에 인기척이 전혀 안 잡히는데?”

벽우진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서진후를 쳐다봤다.

신뢰가 점점 떨어져 간다는 눈빛과 얼굴이었다.

나름 길을 잘 알 거라고 생각해서 데려왔는데 어째 영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어, 지형이 바뀌었나?”

“장난해?”

“허허. 농담입니다. 앞으로 반 시진 정도 쭉 달리면 마을에 도착할 겁니다. 방향은 제대로 잡고 왔으니까요.”

“아니면?”

“진짜입니다. 작은 산 두 개만 가로 지르면 됩니다. 저 방향이에요.”

서진후가 확신하듯 동남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벽우진이 기감을 확대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이 기감을 넓힌 게 아니라 서진후가 가리킨 방향으로 집중했던 것이다.

“호오?”

“맞죠? 근데 대체 경지가 어느 정도 되면 사형처럼 할 수 있는 겁니까?”

“신선 정도?”

“예?”

서진후가 무슨 말이냐는 듯이 두 눈을 끔뻑이며 반문했다.

하지만 벽우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의미심장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가자. 얼른 가서 좀 쉬어야지. 나야 괜찮지만 넌 다리가 후들거릴 것 같은데?”

“끄으응!”

안 그래도 슬슬 한계가 오고 있었다.

식사하거나 잠깐 소변을 볼 때를 제외하면 하루 종일 달렸기에 아무리 환골을 이루었다고 해도 지치지 않을 수가 없어서였다.

중요한 건 오늘이 이동한지 첫 날이 아니라는 점이었고.

“이참에 단련한다고 생각해. 달리기만큼 체력 늘이기에 좋은 수련이 또 어디 있어?”

< 제 29장. 최소한의 도리.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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