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92화 (92/325)

< 제 28장. 하나뿐이야. -04 >

설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곤륜파에 머무는 것만 해도 벽우진이 파격 대우를 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더 이상의 욕심은 곤란했다.

손님이 누구인지 너무나 궁금하더라도 말이다.

“마주치는 게 가장 좋은 상황인데, 식사도 처소에서 해결한다고 합니다.”

“음식을 가져다주는 하인에게 알아내는 건, 힘들겠지?”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양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껏 보아온 벽우진의 성격을 생각하면 하오문을 싹 다 쳐내고도 남았다.

곤륜파의 명성이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었기에 이제는 굳이 하오문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하오문만큼 빠르고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정보를 구할 방법은 많았다.

“그렇지···.”

“지금은 납작 엎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긴밀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요.”

“비현이라는 장로 쪽은?”

“좀처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식사 시간을 활용하려고 하는데 시간대가 자꾸 엇나가고 있습니다.”

설향이 입맛을 다셨다.

어째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였다.

‘아니. 하나는 있나.’

설향의 시선이 비무에서 승리하고 깡충깡충 뛰며 기뻐하는 심소혜에게로 향했다.

반대로 막내 대결에서 패배한 십대 후반의 무룡대원은 크게 낙담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도 좋지 않아. 애초의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설향은 마음을 비웠다.

욕심을 부리다가 양선의 말마따나 겨우 만든 관계마저 날아갈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지금은 숨고르기를 해야 했다.

차근차근 나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이겼어!”

“잘했어, 우리 소혜.”

“오구오구. 우리 사매 잘했네.”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심소혜에게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진구 역시 한없이 인자한 미소로 심소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이겼어요, 호법님!”

“그래. 고생했다.”

“헤헤헤!”

스스럼없이 안겨드는 심소혜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느냐는 얼굴로 진구가 헤벌쭉 웃었다.

그리고는 심소혜를 번쩍 들어 올려 목마를 태웠다.

“이겼으니까 상을 줘야지.”

“우와아!”

“무섭지는 않지?”

“좋아요!”

언뜻 보면 조손지간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두 노소의 모습에 아이들이 일제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패배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다들 심소혜의 승리를 축하해주었던 것이다.

반면에 무룡대 쪽 분위기는 초상집을 방불케 할 정도로 좋지 않았지만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었으니까.

곤륜파에 도착하고서 벌써 5일이 지났다.

하지만 둘째 날 잠깐 찾아왔던 벽우진은 그 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 텐데도 전언 하나 없었던 것이다.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보군. 허허허.”

애초에 벽우진에게서 쉽게 용서를 받아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벽우진이 쫌생이어서가 아니라 흐른 세월이 너무나 길어서였다.

그래서 진심이 필요하다고 했고, 때문에 그가 여기까지 직접 온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보내면 진심이 퇴색될 것 같아서.

“그런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조급해지는 걸 막을 수가 없구나.”

제갈현이 무거운 어조로 중얼거리며 두 눈을 감았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가문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싸우고 있을 지도 몰라서였다.

하지만 비밀리에 곤륜파를 찾아왔기에 그는 아무런 소식도, 정보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벽우진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오늘은 꼭 좀 방문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벌써 5일이 지났다.

무당산에 복귀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그로서는 정말 긴 시간을 기다린 셈이었다.

때문에 제갈현은 한시라도 빨리 벽우진이 자신을 찾아와 주었으면 했다.

“변용술이라도 익혀두었다면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을 텐데.”

똑똑똑.

제갈현이 한탄 아닌 한탄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제갈현이 바로 신색을 바로 했다.

“들어오시죠.”

“점심 식사를 가져 왔습니다.”

“오늘도 직접 가져오셨군요.”

“제갈가주님의 식사인데, 당연히 제가 챙겨야지요.”

묘하게 비꼬는 듯한 청민의 말에도 제갈현은 웃었다.

이 자리에서는 그가 죄인이었으니까.

게다가 이 정도면 나름 대우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청민 진인께서는 식사 하셨습니까?”

“저는 아이들과 함께 먹을 생각입니다.”

“아, 이번에 들인 제자들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인성 역시 나무랄 데가 없는 아이들이지요.”

왠지 모르게 뼈가 느껴지는 말에 제갈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벽우진도 어려운 인물이지만 앞에 있는 청민 역시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뜬금없이 복귀한 벽우진과 달리 청민은 곤륜파의 흥망성쇠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겪은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제갈현은 벽우진 못지않게 청민이 어려웠다.

“참으로 곤륜파의 홍복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부성이 짙은 제갈현의 축하에도 청민은 담담히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두 사람 사이에 있는 탁자 위에 가지고 온 쟁반을 놓았다.

바로 제갈현이 먹을 음식들이 담겨 있는 쟁반이었다.

“청민 진인.”

“말씀하십시오.”

“장문인을 뵙고 싶습니다.”

제갈현이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였다.

그렇다고 몰래 나갈 수도 없기에 제갈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사형을 말입니까.”

“예. 상황이 상황인지라 언제까지 제가 이곳에 머물 수가 없어서요. 이 점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상황만 심각하지 않더라도 저는 언제까지나 여기에서 기다렸을 것입니다.”

“사형께서는 현재 이곳에 안 계십니다.”

“예?”

제갈현이 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했던 것이다.

“현재 출타 중이십니다. 어제 나가셨지요.”

“어, 어제 말입니까?”

“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제갈현과 달리 청민의 표정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아니, 오히려 제갈현이 당황한 표정을 즐기는 듯했다.

“혹시 안휘성으로 가신 겁니까?”

평소의 그답지 않게 표정관리를 못하던 제갈현이 일순 두 눈을 번뜩였다.

출타했다는 말에 하나의 추측이 뇌리를 관통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추측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요. 개인적인 일로 잠깐 나가신 겁니다.”

“아···.”

살짝 기대했던 제갈현이 장탄식을 흘렸다.

그러나 이내 그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청민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아서였다.

“대신 가주님께 남기신 전언이 있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하나뿐이다. 그러니 둘은 기대하지 마라.”

“···그게 전부입니까?”

“예. 저도 들은 걸 그대로 전달해 드린 것뿐입니다.”

제갈현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앞뒤를 다 자른 듯한 말에 수수께끼를 들은 것 같아서였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군요.”

“사실 저도 들었을 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형께서 말하길, 제갈가주께 이렇게 전하면 알아들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으음!”

제갈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하나가 무엇이며 둘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이만.”

“아, 잠시만요.”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오늘 밤에 무당산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가 없는 입장이라서요.”

벽우진이 자리를 비운 마당에 그가 더 이상 머물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제갈현은 미리 떠날 것을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동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했었습니다, 진인.”

“아닙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무운을 빌겠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제갈현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청민은 묵묵히 포권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더 이상 그와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하나뿐이다라.”

청민이 방을 나가서야 제갈현은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는 음식이 담겨 있는 쟁반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대신 천장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벽우진이 남긴 말을 계속해서 곱씹었던 것이다.

“모르겠군. 전혀 모르겠어.”

하나 아무리 고민해 봐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대화를 나누다가 들었다면 문맥으로 유추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달랑 말만 들으니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문전박대를 당하지 않았고, 쫓겨나지도 않았으니 꼬여 있던 매듭을 조금은 풀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사천당가와 달리 시원스럽게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 첫 단추는 나쁘지 않게 끼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곤륜파가 건재한 이상 북해빙궁도 마음대로 날뛰지는 못할 테고 말이다.

“차근차근 하나씩 해결하자.”

생각을 정리한 제갈현이 그제야 식사를 시작했다.

이미 다 식었음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음식을 집어먹었던 것이다.

한편 제갈현에게 큼지막한 고민거리 하나를 던져준 벽우진은 청해성의 성도인 서녕에 도착해 있었다.

수행원 하나 없이 홀로 서녕에 들어와 저잣거리를 가로질렀던 것이다.

“확실히 성도긴 성도야. 신기한 물건들도 많고, 서역에서 넘어온 것도 많고.”

뒷짐을 지고서 저잣거리를 거닐며 벽우진이 고개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곤륜산도 좋았지만 이렇게 사람 냄새가 풍기는 곳도 그는 좋아했다.

구경하는 맛이 있어서였다.

“호오. 완전 달라졌는데?”

느릿한 걸음걸이로 충분히 구경을 하며 이동하던 벽우진의 발이 멈춰선 곳은 다름 아닌 청하상단이었다.

비호표국 역시 서녕에 있었지만 아무래도 벽우진에게는 청하상단이 더 편할 수밖에 없었다.

“자, 장문인! 흡!”

위치는 똑같았지만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에 벽우진이 놀라고 있을 때 방문객들의 신원을 확인하던 문지기가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혼자 있는 벽우진의 모습에 몰래 찾아온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 것이었다.

그 모습에 벽우진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몰래 온 거 아니니까 편히 말해도 된다.”

“그, 그렇습니까?”

“응. 나는 따로 신분 확인 안 해도 되지?”

“물론입니다!”

기합이 바짝 든 목소리로 문지기가 대답했다.

벽우진이 청하상단에 어떤 은혜를 내려주었는지 모르지 않기에 두 말하면 잔소리라는 듯이 그를 안내했던 것이다.

덕분에 벽우진은 길게 늘어선 줄을 구경하며 편하게 장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뭐야?”

“누군데 바로 들어가?”

“나이는 젊어 보이는데.”

패선이라는 위명이 청해성을 떨쳐 울리는 것과 달리 벽우진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아무래도 대부분이 상계에 있는 사람들이다보니 벽우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벽우진을 만난 이들이 그리 많지 않기도 했고.

“사형!”

예전의 을씨년스러웠던 게 마치 거짓말이라는 듯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외원의 모습에 벽우진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내원 쪽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뒤이어 다급하게 뛰어오는 달음박질 소리도 들렸다.

“나이도 지긋한 놈이 왜 뛰어와. 채신머리없게.”

“사형께서 오셨는데 당연히 뛰어와야지요.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미리 연락이라도 해주셨다면 제가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급하게 볼 일이 생겨서. 너의 도움도 좀 필요하고.”

“제 도움이요?”

서진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자 어안이 벙벙했던 것이다.

“응. 감숙성에 가야 하는데 길잡이가 필요하거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청해성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촌놈이지 않더냐. 너는 중원도 곧잘 드나들었고.”

“저야 장사꾼이다 보니 안 가본 곳이 거의 없죠. 그런데 감숙성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색마 하나 잡으러.”

< 제 28장. 하나뿐이야.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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