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91화 (91/325)

< 제 28장. 하나뿐이야. -03 >

진구가 무룡대주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런데 살기 하나 담기지 않은 그 말에 무룡대주는 오금이 저려왔다.

단순히 눈을 마주친 것뿐인데 뱀 앞의 개구리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호호호! 애들에게 너무 겁주시는 거 아닌가요?”

“겁은 무슨. 이 정도도 버텨내지 못하면 뒈져야지. 검 끝 위에 사는 인생이 무인인데. 더구나 얘들은 다른 곳도 아니고 진창을 구를 텐데.”

“그렇기는 합니다만.”

아무 말도 못하는 무룡대를 대신해 양선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상태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태산권이라 불리는 진구의 기도에 그녀 역시 압도당했던 것이다.

“애초에 노린 게 이거잖아? 그러면서 아닌 척은.”

양선은 물론이고 조용히 듣고 있던 설향마저도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무룡대야 두 말할 필요도 없었고.

“누가 먼저 나설 거야?”

두 사람이 말이 없으니 무룡대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진구는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누구부터 나서는 게 좋을까요, 호법님?”

“흐음.”

늘 그렇듯 차분하고 청아한 서예지의 음성에 진구가 턱을 쓰다듬었다.

성실하고 야무지며 똑 부러지는 서예지는 그뿐만 아니라 모든 호법들이 아꼈다.

재능이 충만 할뿐만 아니라 인성 역시 나무랄 데가 없어서였다.

그렇기에 제멋대로인 진구도 서예지에게는 자애로운 할아버지였다.

“괜찮다면 제가 먼저 나서고 싶습니다.”

“일우 네가?”

“예. 시작은 제가 끊고 싶어서요. 사저 다음 서열이 저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나쁘진 않은데.”

진구의 시선이 도일수에게로 향했다.

분명 양일우의 재능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무룡대와 비교하면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하오문에서도 나름 고르고 골라 무룡대원을 뽑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경험이었다.

“저는 두 번째로 나서겠습니다.”

“그렇게 해.”

도일수를 제외하면 다들 경험이 일천했다.

가장 오랫동안 내공심법을 수련한 서예지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진구는 도일수를 첫 번째로 내보내는 걸 생각했었는데 스스로가 두 번째로 나서겠다고 하자 그것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

자신이 기를 팍 죽여 놓았기에 의외로 첫 판은 쉽게 끝날 수도 있었고.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어차피 나는 심판일 뿐인데. 진짜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진구가 다시 한 번 투덜거렸다.

이 꼭두새벽부터 자신이 여기에 와 있는 건 다름 아닌 그 사람 때문이었기에 투덜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지지 말고. 아무리 대련이라지면 곤륜의 이름에 먹칠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다른 애들은 괜찮아도 너나 예지는 안 돼.”

“도 사제는 말씀 안 하시네요?”

“일수는 걱정 안 해. 실전에 제일 강한 유형이 바로 일수니까. 경험도 제일 많고. 그건 무시 못 하거든.”

“더 의욕이 솟구치는데요. 반드시 이겨야겠어요. 저도 나름 전쟁을 치른 남자이니까요.”

양일우가 호기로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두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어떻게 보면 공식적인 비무라고 할 수 있었기에 절대 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무리 하오문과 친한 사이라지만 이건 남자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문제였다.

저벅저벅.

양일우가 보무도 당당하게 연무장의 중앙으로 걸어 나오자 무룡대 측에서도 한 명이 마주 나왔다.

바로 무룡대주였다.

무룡대원들 중에서 가장 강한 그가 첫 번째로 나온 것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나이는 무룡대주가 열 살 가까이 많아 보였지만 그는 양일우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양일우의 신분은 패선의 제자였다.

그것도 본산제자들 중에서는 대제자라 할 수 있는 게 양일우였기에 무룡대주는  나이가 어려도 예의를 다했다.

더구나 현재 얹혀사는 입장이기도 했고.

스르릉.

이윽고 마주 선 두 사람이 병장기를 꺼냈다.

양일우는 검이고 무룡대주는 날이 하나뿐인 도였다.

그리고는 동시에 기수식을 취했다.

생사결이 아닌 비무이기에 나름 격식을 차리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승부가 나거나 둘 중 한 명이 패배를 시인하면 비무를 끝낸다. 부상당하기 전에 내가 알아서 막을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고. 그럼 최선을 다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

짤막한 설명과 함께 진구가 비무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둘 다 몸을 날렸다.

선수필승이라는 말처럼 두 사람 다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공격하려 했던 것이다.

채채채챙!

이윽고 허공에서 두 자루의 검과 도가 어지럽게 얽혔다.

둘 다 승리를 노리고서 전력을 다해 상대방을 공격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둘 다 내공을 본격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검술과 도술만으로 겨루었다.

“누가 이길 것 같아?”

“공력을 안 쓴다면 무룡대주에게 승산이 있지 않을까요? 경험과 시간은 무시하지 못하니까요.”

“일반적으로 보면 그렇긴 한데···.”

설향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분명 객관적으로 보면 무룡대주의 압승이 당연했다.

하지만 무섭기까지 한 곤륜파 제자들의 성장세를 생각하면 단언할 수가 없었다.

콰앙! 쾅!

초반에는 경험과 기술로 몰아붙이던 무룡대주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양일우가 본격적으로 진기를 끌어올리자 막아내기 급급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껏 쌓아온 경험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름 힘을 흘려내고 있었지만 양일우도 만만치 않았다.

의외로 그런 무룡대주의 의중을 역이용하며 점차 승기를 잡아갔다.

“잘한다, 일우 오빠!”

“으음!”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양측의 분위기 역시 갈렸다.

신난 심소혜가 응원하는 것과 달리 무룡대의 분위기는 점점 침체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장 죽을 상은 무룡대주였다.

처음부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속절없이 밀릴 줄은 몰라서였다.

‘공력도 공력이지만 무공에서 오는 차이가 커.’

상승절학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양일우의 검술에 무룡대주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문제는 익히고 있는 무공의 수준만이 아니었다.

“흐읍!”

시간이 흐를수록 호흡이 가빠지고 균형이 흔들리는 그와 달리 양일우는 딱히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비슷한 활동량인데도 그와 달리 양일우는 전혀 지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무룡대주의 눈빛이 달라졌다.

첫 승부인 만큼 승리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기선제압의 의미가 있어서였다.

그런 만큼 무룡대주는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파파파팟!

시간을 더 끌면 자신이 불리하단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에 무룡대주는 승부수를 던졌다.

정직하게 무를 겨루었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변초를 본격적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두 다리와 비어 있는 왼손까지도 모두 활용했다.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의지를 온몸으로 드러낸 것이다.

우우웅!

하지만 그런 무룡대주의 반격에도 양일우는 흔들리지 않았다.

상대가 본인의 강점을 십분 활용한다면 그 역시 똑같이 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양일우가 생각하는 자신의 강점은 바로 무지막지한 공력이었다.

비천단과 벽우진의 조력으로 얻은 막대한 내공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뻗어나가 검에 실렸다.

콰아앙!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강맹하기 짝이 없는 일격에 무룡대주가 휘청거렸다.

가뜩이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상태에서 참격에 맞먹는 검격을 받아내자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일우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콰아아앙!

비틀거리는 무룡대주를 향해 재차 무지막지한 공력이 실린 검격을 다시 한 번 날렸던 것이다.

그러자 무룡대주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만.”

“더, 더 싸울 수 있습니다.”

“그 전에 네 모가지가 날아갈 것 같은데? 도가 흔들리는 건 안 보이는 모양이지?”

두 사람 사이로 진구가 나타났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경신술로 두 사람을 떨어뜨렸던 것이다.

동시에 무룡대주가 이를 악물고서 고개를 떨구었다.

설마하니 이렇게 무기력하게 패배할 줄은 몰라서였다.

“잘 싸웠다. 잘 싸웠어. 그러니 돌아오너라.”

“···죄송합니다.”

“아니다. 정말 잘 싸웠어. 내가 봤다. 그러니까 고개 들 거라.”

설향의 말에도 무룡대주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대신 부대주가 독이 바짝 오른 얼굴로 무룡대주를 스쳐지나갔다.

무룡대주가 패배한 이상 자신이라도 반드시 이겨야 했다.

그렇기에 부대주는 살벌한 얼굴로 진구에게 걸어갔다.

뚜벅뚜벅.

잠시 후 그의 상대가 앞에 도착했다.

제자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리고 평범해 보이는 사내였다.

하지만 부대주는 겉모습만 보고 상대를 판단하지 않았다.

지금 앞에 있는 사내 역시 패선의 제자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넌 살기 좀 풀어. 생사결 아니다. 비무야. 덧붙여 만약 살초를 뿌리면 네 모가지가 먼저 뽑힐 거다. 명심해. 빈말 아니니까.”

묵직하게 어깨를 짓누르는 진짜 살기에 부대주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진구의 말마따나 이건 비무였지 생사결이 아니었다.

아무리 승리를 쫓는다고 해도 정도가 있는 것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왜 그러는지는 알겠는데, 정도껏 해. 여기가 곤륜파라는 걸 잊으면 안 돼.”

“예.”

스산한 진구의 말에 부대주가 잔뜩 주눅든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진구도 더 이상 갈구지는 않았다.

승부는 정당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처음에 무룡대를 향해 기도를 드러냈던 것도 수적으로 너무 차이가 나서 그런 거지 아이들 편을 들어주기 위한 건 아니었다.

“시간을 줄 테니 정리해.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나야 빨리 끝나면 좋긴 한데.”

“이제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괜히 지고 나 때문이라고 나중에 뒤에서 까지 말고. 시간 줄 때 충분히 활용해.”

“정말 괜찮습니다.”

부대주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두 눈에는 여전히 승부욕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앞으로 있을 무룡대원들의 비무를 위해서라도 지금의 대결은 너무나 중요했다.

“일수는?”

“저도 괜찮습니다.”

“규칙은 기억하고 있지? 나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한다.”

“예.”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하자 진구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리고는 두 사람 사이에 나뭇잎 하나를 던졌다.

말하기도 귀찮아 나뭇잎으로 시작을 대신한 것이다.

툭.

잠시 후 나뭇잎이 떨어진 것과 동시에 비무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번 비무 역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대주가 고군분투 했으나 끝내 도일수를 쓰러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 뒤로도 비무는 이어졌다.

하지만 양일우나 도일수처럼 압도적인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며 엇비슷한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예상했던 것 이상인데요.”

“그래서 내가 아이들을 데려온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테니까. 그리고 언제 또 저런 고수를 이렇게 편하게 만날 수 있겠느냐.”

“그렇긴 하죠.”

나름 혹독하게 수련을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되레 체력에서 밀리는 무룡대의 모습에 양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못난 모습을 보여서였다.

하지만 반대로 이제라도 알아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부족한 걸 알았으니 이제는 채우면 될 일이었다.

“그보다 우리 말고 머무는 손님이 있다고?”

“예. 근데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함부로 돌아다닐 수도 없는 상황이라.”

“흠.”

< 제 28장. 하나뿐이야. -03 > 끝

ⓒ 윤신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