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90화 (90/325)

< 제 28장. 하나뿐이야. -02 >

벽우진이 소리 없이 코웃음을 치고는 탁자 위에 놓인 서찰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는 예의 삐딱한 표정으로 서찰을 읽기 시작했다.

‘이것 봐라?’

한데 벽우진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의아함과 놀람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갈현은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앉아봐.”

“예.”

나이는 물론이고 배분 역시 벽우진이 반 정도 높았기에 제갈현은 순순히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벽우진의 표정을 그는 볼 수 있었다.

“이 연판장, 정말 가주들이랑 장문인들이 작성한 것 맞나?”

“상황이 여의치 않은 공동과 화산, 종남과 점창을 비롯한 몇몇 곳을 제외하면 곤륜파와 인연이 있는 모든 무문들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혹시 당가도 이렇게 꿰었나?”

“사천당가의 경우 곤륜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기에 제가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가 애매합니다.”

“당가 쪽 연판장도 있다는 소리로군.”

어제 양선이 급히 알려준 소식을 거론하며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역시나 사천당가를 움직인 것도 제갈현인 것 같아서였다.

기성(奇星)이라 불리는 제갈현이라면 혼자서 행적을 들키지 않고 사천성과 청해성을 오가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였다.

은신술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기문진법의 대가가 제갈현인 만큼 특별한 비술이 있을 게 분명했다.

“사천당가에도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니까요. 다들 그 부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흐음.”

진중한 제갈현의 말에도 벽우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연판장을 탁자 위에 내려놓기만 했다.

“물론 연판장으로 제대로 된 사죄를 할 수 없다는 걸 저를 포함해서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여의치 않기에 우선은 연판장으로 사과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을 때 연판장에 적힌 이들이 제대로 사죄를 할 것입니다. 모두 곤륜산에 오르기로 약속했습니다.”

제갈현이 절절하게 말을 이었지만 벽우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지그시 연판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모습에 제갈현은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무표정한 얼굴도 그렇고 눈빛도 벽우진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아서였다.

“이런 말이 있지. 뒷간에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의 마음은 너무나 다르다는.”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일단 말은 잘 들었다. 푹 쉬도록.”

벽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의 처소를 나갔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로 인사도 없이 방을 나간 것이다.

그러한 벽우진의 모습에 제갈현은 두 눈을 감았다.

사문에 머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방문객들의 숫자가 점차 증가하면서 서예지와 심대혜는 더 이상 주방을 들락날락 거리지 않았다.

둘이서 끼니를 챙기기에는 인원이 너무 늘어난 탓이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주방 일을 비롯해 잡다한 일을 해줄 인력을 따로 뽑았다.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덕분에 제자들이 오롯이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것이다.

“흐음.”

그런 벽우진의 마음을 알기에 제자들은 수련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평소 하던 일이 줄은 만큼 그 시간을 단련하는데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청소 같은 일은 절대 손에서 놓지 않았다.

경내를 치우고 닦는 일은 곤륜파의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누구 하나 불평불만 하지 않았다.

“신경 쓰이지?”

“안 쓰이는 게 이상한 거 아냐? 근데 사부님께서 진짜 허락해 주셨다고?”

이른 아침부터 연무장의 한쪽에서 몸을 풀고 있는 하오문의 무인들을 힐끔거리며 양이추와 심대현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체력 단련이라지만 이쪽을 계속 훔쳐보기에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어서였다.

“여기는. 일단 이곳이 연무장 중에 제일 크잖아. 인원도 저 쪽이 제일 많고.”

“흐음.”

“불편하면 우리가 옮기면 되지. 저 사람들은 여기만 허락되었지만 우리는 다르잖아. 다만 밀려나는 기분이 들어서 그렇지.”

“뭐가 밀려나. 어차피 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건데. 단지 여기가 편해서 그렇지.”

서예지가 웃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런 그녀의 곁에는 늘 그렇듯 심대혜와 심소혜가 있었다.

“난 오히려 좋은데? 북적북적 거리고. 그리고 눈치는 저 사람들이 봐야지 우리가 보나?”

“맞아요!”

“역시 소혜는 나랑 생각이 통한다니까.”

“헤헤헤!”

친오빠들과 달리 양일우, 양이추 형제에게는 존댓말을 사용하는 심소혜가 귀엽게 웃었다.

사형제들도 좋고 사부님과 장로님, 호법님들도 좋지만 역시 심소혜는 시끌벅적한 게 좋았다.

어른들이야 고적한 게 좋다고 하지만 한창 뛰어노는 게 재미있는 심소혜는 시끄러운 게 더 좋았다.

“그리고 자극도 되잖아? 우리야 아직 만들어진 느낌이 강하지만 저 사람들은 온갖 수련을 겪어온 티가 나니까.”

“우리와 비슷한 수준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보기에도. 경험은 우리가 밀리겠지만. 근데 어쩔 수 없지. 우리는 정식으로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양일우가 호승심이 감도는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사부를 만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선물을 받고 상승절학도 익혔지만 아직 그나 동생들은 완연한 무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수련한 시간도 그렇고 순수하게 이룩한 성취도 별로 높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하오문의 무인들은 달랐다.

“사형 눈빛이 아주 쪽쪽 빨아먹고 싶다는 눈빛인데요?”

“티 났어?”

“네. 근데 뭐, 저도 마찬가지에요. 흐흐흐!”

심대현이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승부욕이라면 그 역시 어디 가서 꿀리지 않아서였다.

반면에 막내이지만 가장 연장자이며, 실전 경험도 제법 많은 도일수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도 사제는 어떻게 생각해요?”

“저도 사부님의 의중을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 편히 하시죠.”

“전 이게 편해요.”

“저에게만 높이지 않습니까, 사저.”

도일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말을 편하게 하면서 자신에게만 말을 높였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살짝 다른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자신만 특별하게 여긴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지.’

도일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얼마 가지 않아 알 수 있어서였다.

“저는 본산제자는 아니니까요. 물론 본산제자나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도적에 올라가 있지는 않으니까요. 나중에 좀 더 익숙해지면 그때 편하게 할게요.”

“알겠습니다.”

여전히 선을 긋는 서예지를 보면서도 도일수는 옅게 웃었다.

그녀가 말했던 대로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될 문제였다.

그리고 시간은 도일수에게도 필요했다.

‘어후. 아침부터 이렇게 살 떨려서야.’

이상하게 시간이 갈수록 예뻐지는 듯한 서예지의 미모에 도일수는 아침부터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넋을 놓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만 볼 것 같아서였다.

‘전 그 마음 다 압니다.’

‘역시.’

그리고 그런 도일수를 양일우가 다 이해한다는 듯이 바라봤다.

같은 남자로서 도일수의 심정을 양일우는 십분 이해할 수 있어서였다.

“모두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양 분타주님.”

“다들 잘 잤니?”

“예!”

곤륜파의 제자들이 하오문의 무룡대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 막 씻은 티가 나는 양선이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 오지 않았다.

하오문주인 설향과 같이 연무장을 찾았다.

“근데 분타주님이라는 호칭은 너무 딱딱한 거 같지 않니? 우리가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데.”

“맞는 말씀이시긴 하지만 그렇다고 저희가 또 친밀한 사이는 아니니까요.”

“어머. 그렇게 말하면 난 좀 섭섭한데. 우리 사이가 친밀하지 않다니.”

서예지의 선을 긋는 발언에 양선이 진심으로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서예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여자는 여자가 잘 안다는 말처럼 지금 양선이 보이는 모든 행동이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는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저희만 그렇게 생각했다면 죄송합니다.”

“하긴. 각자가 생각하는 속도가 각기 다른 법이니까. 내가 독촉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내가 좀 성급했을 수도 있으니까 사과할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그래도 앞으로는 좀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어. 그건 괜찮지?”

양선이 부드럽게 웃으며 서예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이는 어려도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네.”

“오늘 아침은 좀 시끄럽지? 무룡대 애들이 와 있어서.”

“평소와 다르긴 했죠.”

“불편하다면 애들을 보낼게.”

양선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러나 의외로  양일우는 고개를 저었다.

사문의 무공을 수련할 때는 모르지만 몸 풀기나 체력단련을 할 때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서였다.

게다가 꼭 자신들이 손해 보는 것만도 아니었고.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근데 혹시 너희들 대련해 볼 생각 없어? 우리 아이들이랑.”

“있습니다.”

양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이추와 심대현이 대답했다.

벽우진에게 따로 들은 말은 없지만 아마도 이 부분까지 고려하지 않았을까 하고 둘은 생각했다.

“진짜? 싫은데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장문인께서도 선택권은 너희들에게 주겠다고 했으니까.”

“정말 괜찮습니다. 다들 바라기도 하고요. 다만 저희들끼리는 좀 위험하고, 참관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게 가장 좋지. 누가 좋을까?”

양선이 그리 말하며 주변을 살폈다.혹시나 주변에 적당한 사람이 있나 찾아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설향과 무룡대, 그리고 곤륜파의 제자들뿐이었다.

“제가 장로님이나 호법님께 찾아가 보겠습니다.”

“그래줄래?”

시기적절하게 들어오는 도일수의 말에 양선이 눈을 반짝였다.

어쩌면 잘 알려지지 않은 호법들을 만나 안면을 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녀는 특히 비현이라는, 가장 감춰져 있는 그 호법을 꼭 만나고 싶었다.

“찾으러 다닐 필요 없다. 내가 봐줄 테니까.”

“진 호법님.”

“아침부터 얼마나 성화이던지. 진짜 내가 얼른 강해져야지, 원.”

연무장 담벼락에서 진구가 툴툴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찮다는 듯이 그냥 담을 넘은 것이었다.

그 모습에 양선은 물론이고 무룡대원들도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강자인 것은 알았지만 정말 입을 열기 전까지는 조금의 기척도 느끼지 못해서였다.

‘괜히 용담호혈이라 표현하는 게 아니구나.’

무룡대주가 침을 꿀꺽 삼켰다.

곤륜산을 오르면서 그는 설향과 양선에게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들은 말이 있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게 곤륜파라고 말이다.

특히 장문인과 호법들을 만났을 때는 더욱 각별히 대해야 한다고 말이다.

‘어후.’

그 말을 무룡대주와 무룡대원들은 실감하고 있었다.

‘나 고수요.’라고 말하는 듯한 진구의 기도에 전신이 절로 떨려왔던 것이다.

반면에 진구를 거의 매일 같이 봐서 그런지 곤륜파 제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 차이를 느끼게 해주시려고 그런 건가.’

무룡대주가 착 가라앉은 눈으로 반 보쯤 앞에 서 있는 설향을 바라봤다.

문도수는 개방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더 많은 문파가 하오문이었지만 정작 고수라고 할 수 있는 무인은 없었다.

기껏해야 절정고수가 최고수이니 무슨 말을 할까.

하지만 곤륜파는 달랐다.

‘강해. 그것도 아주.’

무룡대주의 시선이 다시 진구에게로 향했다.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건들거리는 걸음걸이였지만 막상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빈틈이 없었다.

달려들기도 전에, 칼을 뽑는 순간 목이 뽑힐 것 같은 느낌이랄까.

무룡대주는 손바닥이 축축해짐을 느꼈다.

“어이, 애송이. 네 상대는 내가 아냐. 그리고 어딜 넘봐? 감히 너 따위가.”

< 제 28장. 하나뿐이야.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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