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8장. 하나뿐이야. -01 >
문 너머에서 살짝 망설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벽우진이 전음을 보냈다.
-누군데 그러더냐?
-제갈세가에서 왔습니다.
서예지의 대답에 벽우진의 표정이 일변했다.
정말 상상조차 못한 방문객이어서였다.
그리고 그 변화를 설향은 놓치지 않았다.
“일단 숙소로 안내해 드리거라.”
“알겠습니다.”
“저희가 피해드려야 하는 게 아닐는지요?”
“괜찮소.”
벽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지도 못한 방문객이었기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괘씸해서라도 바로 만나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겠지.’
벽우진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그러면서 그는 새삼 방문객이 얼마나 은밀히 움직였는지도 알 수 있었다.
‘제갈세가라.’
사천당가에 제갈명이 찾아간 것을 벽우진은 당민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 제갈명이 했던 말과 오늘 찾아온 이의 말은 대동소이할 터였다.
하지만 벽우진이 궁금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추면색귀의 행적은 내일 쯤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추면색귀를 왜 찾으려고 하는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의뢰 아닌 의뢰를 받아서 말이오. 그래서 그 놈의 현재 위치가 꼭 필요하오.”
“그렇습니까.”
자세한 설명을 피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설향 역시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그 후로 설향은 벽우진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북해빙궁과 오독문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투두두둑. 투둑.
밤부터 내리던 비가 아침이 되었음에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빗발이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해졌던 것이다.
그 모습을 제갈현이 창문 앞에 서서 바라보았다.
“고요하구나.”
어제 오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제갈세가에서 왔음을 알렸음에도 곤륜파의 장문인은 그를 찾지 않았다.
그저 제자를 시켜 동떨어진 숙소에 머물게 했다.
물론 식사는 꼬박꼬박 가져다주었지만 제갈현은 답답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가문은 오독문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게 분명해서였다.
“명이가 있으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구나.”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제갈현이 중얼거렸다.
하나뿐인 동생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워낙에 변수가 많은 게 바로 전쟁이었다.
게다가 오독문의 기세가 심상치가 않기에 아무리 동생을 믿어도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는 건 사천당가가 본격적으로 참전했기에 제갈현은 걱정을 아주 약간 덜 수 있었다.
“일단은 기다려야겠지.”
제갈현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은 곤륜파의 일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어지럽게 꼬여 있는 매듭을 풀어야 중원무림은 그 다음 과정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물론 그게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로서는 반드시 해야만 했다.
“후우. 그래도 문전박대를 당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제갈현이 피식 웃었다.
사실 그는 문전박대까지 생각했었다.
사천당가야 같은 오대세가의 일원이었고, 구파일방과 달리 만남이 잦은 편이었다.
아무래도 속세에서 활동하는 무가(武家)들이다보니 이래저래 엮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곤륜파는 달랐다.
일단 중원무림에서 동떨어져 있기도 했거니와 멸문한 지 시간이 너무나 많이 흐른 뒤였기에 접점이 아예 없었다.
만약 부친이라도 살아있었다면 조금이라도 연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부친은 이미 10년 전에 귀천한 상태였다.
“패선이라.”
문전박대를 당해 노숙을 했다면 아마 지금쯤은 비에 쫄딱 젖은 쥐와 같은 몰골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제갈현은 속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문전박대를 하지 않았다는 건 대화할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어서였다.
그러면서 그는 벽우진에 대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오왕, 아니 어쩌면 삼제(三帝)와 비등할지도 모르는 고수.”
벽우진이 지금껏 보여준 결과를 생각하면 삼제와 같은 선상에 놓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십존들 끼리의 고하가 상당하다고 하나 벽우진은 그 중 무려 둘을 혼자 상대에서 쓰러뜨렸다.
그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는 백귀존과 빙마존도 패퇴시켰고 말이다.
때문에 그는 벽우진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호법들의 전력들 역시 만만치 않고.”
제갈현이 팔짱을 끼었다.
패선이라 불리는 벽우진에 가려 있어서 그렇지 호법들이 보여준 무위 역시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심지어 벽우진은 청민의 사형이라고 밝혀지기라도 했지 호법들은 정말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은 것처럼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벽우진이 데려왔다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강남의 반전은 사천당가가, 강북은 곤륜파가 이끌어야 하는데···.”
제갈현이 말끝을 흐렸다.
말은 쉬웠지만 그리 만드는 게 너무나 어려울 거라는 걸 그 역시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물론 방법을 찾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결정권자는 그가 아니었기에 차선책과 차차선책도 생각해 두어야 했다.
“아예 실패할 가능성도 상당하고 말이지.”
사천당가의 경우 설득의 여지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가주인 당문경이 스스로 생각해둔 것이 있었기에 참전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곤륜파는 달랐다.
이미 개방의 분타주가 실패한 사실을 알기에 제갈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빗소리에 정신이 팔린 사이 누군가가 그가 머무는 방에 찾아온 것이다.
“누구십니까?”
“그 쪽이 만나고자 한 사람.”
“들어오시죠.”
무뚝뚝함이 물씬 느껴지는 음성에 제갈현의 신형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른 몸놀림으로 방문을 열었던 것이다.
동시에 제갈현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나름 잘 쉬고 있던 모양이군.”
“배려해주신 덕분입니다.”
“제갈세가의 가주가 머물기에는 초라한 방이었을 텐데.”
“아닙니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요.”
방 안으로 들어온 벽우진은 제 집 안방인 마냥 탁자로 가 앉았다.
그러자 그의 앞으로 제갈현이 조심스럽게 앉았다.
“역시 말은 잘하는군.”
“허허허.”
벽우진의 직설적인 화법에도 제갈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 역시 오랜 세월 무림을 겪어온 노강호였다.
고작 이 정도에 당혹감을 드러낼 정도로 그는 평정심은 얕지 않았다.
투둑. 투두둑.
자리에 앉은 벽우진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음.’
점점 더 무거운 침묵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에 제갈현이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그는 벽우진을 빠르게 살폈다.
무거운 적막에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확실히 환골탈태와 반로환동이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 외모로군.’
많이 쳐줘야 이십대 중반 남짓으로 보이는 벽우진의 외모에 제갈현은 내심 감탄했다.
만약 그가 청민의 사형인 것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칠십대의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아서였다.
당장 그만 해도 벽우진이 칠십대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나이는 그보다 벽우진이 열 살 넘게 많았는데 말이다.
‘일단 분위기를 환기시켜야 하는데.’
감탄을 가라앉히며 제갈현이 눈치를 살폈다.
어렵게 만들어진 자리인 만큼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어서였다.
더구나 급한 쪽은 벽우진이 아닌 그였다.
“차를 따라 드릴까요?”
“생각 없다.”
단칼에 거절하는 벽우진의 말에 제갈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벽우진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어찌 생각하는지를 엿볼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자신이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역지사지라고, 반대 입장이었다면 벽우진보다 덜하지는 않았을 거라 제갈현은 생각했다.
“늦었지만 귀파의 어려움을 외면했던 것에 대해서 사과를 하고자 이렇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물론 이런 저를 어찌 생각하시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실수라고 해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니까요.”
대답이 없는 벽우진을 향해 제갈현이 고개를 숙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오대세가라 불리는 가문의 수장이 벽우진을 향해 허리가 꺾일 정도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벽우진의 눈동자는 여전히 싸늘했다.
“진짜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야.”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고요. 분명 잘못한 것은 저희들이니까요. 그리고 단순히 사과를 한다고 그 배신감과 서운함이 풀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저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니까요.”
“그걸 알면서도 찾아왔다는 건 진짜 급한 상태라는 뜻이겠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제갈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서였다.
그러나 이 과정을 피할 수는 없었다.
꼬인 매듭을 풀지 않고서는 다시 끈을 묶을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잘 아는 이가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왔을까. 똑똑한 사람이니 여기서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늦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벽우진이 냉소했다.
지금 오든 나중에 오든 그로서는 딱히 다를 게 없어서였다.
꼴 보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지금이라도 왔으니 문전박대를 안 당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차가운 벽우진의 대답에 제갈현이 겸연쩍게 웃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은 여전히 냉소를 머금은 채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그거야 그 쪽과 똑같은 놈들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름 도인인데 그 정도 도량은 있어줘야지. 구석에 몰릴 대로 몰려 있는 이들을 냉대하면 강호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대놓고 이죽거리는 모습에도 제갈현은 웃어야 했다.
여기서 정색하면 지금껏 해온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기에 제갈현은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했다.
이미 예상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표정관리가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죄송합니다. 곤륜파와 쌓아온 그간의 정리를 외면한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사과드립니다.”
스윽.
재차 깊게 허리를 숙인 제갈현이 품속에서 돌돌 말린 서찰 하나를 꺼내서 벽우진을 향해 내밀었다.
그러나 벽우진은 선뜻 그것을 받지 않았다.
“이런다고 한들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설마 제갈세가의 가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지금이라도 좋지 않았던 과거를 청산하고 싶어 장문인을 찾아뵌 것입니다.”
“원하는 게 없다?”
“예.”
제갈현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진심으로 그는 과거를 청산하고자 곤륜파를 찾아온 것이기에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물론 곤륜파가, 아니 벽우진이 나서준다면 정말 고맙겠지만 거기까지 부탁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첫 단추를 잘못 꿰기도 했고.’
이미 비틀려 있는 상대에게 아무리 애걸복걸 해봤자 돌아오는 건 욕설과 무시뿐이었다.
그리고 제갈현은 다른 가문이 어쭙잖게 나서서 사태를 더욱 꼬아버린 것도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흠.”
시종일관 저자세로 나간 덕분일까.
벽우진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한 가문의 수장이 이렇게까지 저자세를 취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더구나 보통 가문도 아니고 오대세가의 한 곳이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고 냉큼 손을 잡아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 제 28장. 하나뿐이야.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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