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7장. 방문자. -03 >
땅! 따앙!
이른 아침부터 경쾌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소리가 곤륜파 경내 곳곳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그 소리에 오늘도 어김없이 체력훈련을 하고 있던 제자들이 귀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지?”
“어제 사부님께 손님이 오셨데.”
“요즘 들어 방문객은 늘 많잖아?”
함께 연무장을 돌던 양이추와 심대현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다른 아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몸을 푸는 중이었다.
“도 사제가 직접 사부님께 안내해 드렸다는데? 사부님이 직접 만나보겠다고.”
“헤에. 얼마만이지?”
양이추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북해빙궁의 공격을 패퇴시키고 많은 이들이 벽우진을 만나고자 곤륜파의 산문을 넘었지만 정작 그를 만난 이는 손에 꼽았다.
원래부터 아는 이들이 아니면 벽우진은 바쁜 업무를 핑계로 누구도 만나주지 않았었기에 양이추의 놀람은 당연했다.
“아마 처음일 걸? 청해성에서 방귀 깨나 뀐다는 권문세가들이 찾아와도 콧방귀 끼며 깐 게 사부님이시잖아.”
“우리 사부님은 이제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급이 아니시지. 암.”
양이추가 마치 자신이 벽우진이라도 되는 양 거들먹거렸다.
벽우진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왠지 모르게 뿌듯해졌던 것이다.
“어제 필교 아저씨가 건물을 하나 따로 짓더라.”
“건물이요?”
“응. 대장간이랬어. 아마 찾아오신 분이 대장장이신가 봐.”
달리기를 시작한 심대혜가 둘을 따라 잡으며 말했다.
그러자 두 아이가 눈을 빛냈다.
대장장이라는 말은 병장기를 직접 만든다는 말이었기에 자연스레 기대가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계속 머무는 거래?”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저렇게 직접 만드는 것을 보면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
“사부님 검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근데 그 정도 실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심대혜가 남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실력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이왕이면 벽우진의 검은 진짜 명검이었으면 싶어서였다.
적어도 강호에 이름 높은 십대보검 수준의 명검을 말이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혹시 모르지. 대장장이계의 은거고수일지도. 세상에는 각자의 영역에서 엄청난 실력을 지닌 이들이 모래알처럼 많다고 하잖아.”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참, 꼬마아이도 하나 있어. 이제 열 살 된.”
“열 살?”
심소천과 재잘거리며 기마자세를 하고 있던 심소혜가 귀를 쫑긋거리며 소리쳤다.
거리가 제법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케 심대혜의 말을 엿들은 것이다.
“거기서 들려?”
“응! 나 청력도 좋아졌으니까! 나도 무인이라고, 언니!”
“후후!”
조숙한 티를 내고 있지만 그래도 막내는 막내였다.
그렇기에 달리면서도 심대혜는 웃었다.
“진짜 열 살이래?”
“응. 왜? 동생이라 할 수 있는 애가 생겨서 좋아?”
“우웅. 아니?”
몸 푸는 걸 다 했는지 쪼르르 달려와서 나란히 뛰던 심소혜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 모습에 심대혜는 물론이고 심대현과 양이추도 미소를 지었다.
언제 봐도 귀엽고 깜찍한 막내의 모습이어서였다.
“정말?”
“응. 일단은 손님이잖아. 그러니까 나이가 어려도 막 대할 수는 없지. 사부님이 그러셨어. 사람 대 사람의 사이에는 존중과 예의가 있어야 한다고.”
“이야. 그 말도 기억하고 있었어?”
“나 애 아냐! 애 취급하지 마!”
심소혜가 뽀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듯한 말에 토라진 것이다.
하지만 심소혜는 몰랐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서 언니오빠들이 더욱더 애 취급을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안녕?”
“어?”
“양 분타주님!”
그런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연무장 입구에서 들려왔다.
양선이 눈치를 살피며 손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산문을 넘었는데 하인들이 좀처럼 보이지 않아서. 그래서 너희들을 찾아왔어.”
“아, 사부님을 찾아오신 건가요?”
“응. 문주님과 함께 왔어. 여기는 나 혼자 왔고. 참고로 엿본 건 없다?”
양선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름 민감한 문제였기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것이다.
“괜찮아요. 아직 본격적으로 수련한 것도 아니고, 형(形)을 본다고 진의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가장 연장자인 양일우가 다가오며 어른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자 동생들이 박자를 맞추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제가 옥청궁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탁해. 어제 전서구를 보내기는 했는데 또 불쑥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그렇지요.”
안 본 새에 더욱 다부져진 양일우를 보며 양선은 눈을 빛냈다.
막내 항렬의 도일수도 그렇지만 양일우 역시 하루가 다르게 몸이 달라지고 있어서였다.
게다가 설향에게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더욱 다르게 보였다.
‘대체 어떤 신묘한 비술을 사용했기에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거지?’
양선이 걸음을 옮기며 눈을 빛냈다.
하지만 뚫어져라 바라본다고 그가 벽우진의 비밀을 알아낼 리는 만무했다.
“어? 오늘은 함께 오신 분들이 많네요?”
“아무래도 분위기가 흉흉하니까. 황하수로채도 생각해야 하고. 물론 여기까지 황하가 닿아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근데 대장간도 만드는 거야?”
양선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굳이 지금 인원에 대해서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저도 아직은 들은 게 없어서요. 그런데 대장간은 맞는 거 같아요.”
“흐음. 새로 사람을 받아들이신 거니?”
“잘 모르겠어요. 사부님께서 따로 해주신 말이 없어서요.”
은근슬쩍 정보를 캐내려 했던 양선이 속으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태풍의 눈이나 마찬가지인 곤륜파였기에 사소한 것 하나라도 허투루 넘길 수는 없어서였다.
“오랜만이로구나.”
“안녕하세요.”
“키가 더 큰 거 같은데?”
“아직 성장기니까요. 수련 덕분에 몸의 균형이 잡히기도 했고요. 일단 따라 오시죠.”
양일우가 다시 앞장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설향과 함께 있던 백여 명의 장정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젊기도 했지만 하나같이 고도의 수련을 겪어온 것처럼 보여서였다.
‘왜 저들을 데리고 왔지?’
양일우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까지 최소한의 수행원만 데리고 왔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행보였기에 의문이 안 생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 약속이 잡혀 있다 하니 그로서는 벽우진에게 안내할 수밖에 없었다.
똑똑똑.
옥청궁에 도착한 양일우가 조심스럽게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보통 벽우진은 집무실에 있기에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부님. 하오문주님과 양 분타주를 데려왔습니다.”
“모시 거라.”
안쪽에서 들려오는 벽우진의 나른한 목소리에 양일우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두 여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문인.”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소이다. 고작해야 3주 남짓인 거 같은데.”
“짧은 시간은 아니지요. 그리고 큰 피해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다 문주 덕분이오. 적절한 정보 덕분에 큰 피해를 피할 수 있었소.”
“아닙니다.”
설향이 겸손하게 손을 저었다.
솔직히 말해 정보를 제공한 것 말고는 딱히 한 일이 없어서였다.
더구나 정보가 살짝 늦기도 했었고.
육로가 아닌 수로로 움직였기에 하오문도 북해빙궁의 움직임을 조금 늦게 발견했다.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니.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소? 올라오는 길이 쉽지 않을 텐데.”
“아직은 괜찮습니다. 너무 안 움직이는 것도 좋지 않고 말이죠.”
다짜고짜 용무부터 물었지만 설향은 당황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이런 성격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곤륜파는 더 이상 예전의 곤륜파가 아니었다.
이번 북해빙궁의 공격을 막아내도 곤륜파는 다시 한 번 도약했다.
‘나만 하더라도 이렇게 목적이 있어 찾아왔으니까.’
지금까지는 친분을 쌓기 위해 방문했었다.
꾸준히 강호 정세를 알려주며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고.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터였다.
“적당한 운동이 삶의 질을 높이긴 하니.”
“장문인께 하오문주로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이라.”
벽우진이 별로 놀라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이유 없는 호의와 공짜는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어서였다.
다 이유가 있기에 지금까지 하오문이 호의를 베푼 것일 터였다.
때문에 벽우진은 갑작스러운 설향의 말에도 놀라지 않았다.
“주고받는 관계로는 부족한 사안인가 보오?”
“그렇습니다.”
설향은 순순히 인정했다.
굳이 에둘러 말해서 짜증을 유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오히려 솔직히 말하는 게 오해의 소지를 없애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말해보시구려.”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적어도 말을 꺼낼 자격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어마어마한 도움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히 하오문의 덕을 본 게 적지는 않았으니까.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본문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우는 아이들을 이번에 데려왔습니다.”
“백여 명 정도 되는 것 같더구려.”
“맞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좀 겪게 해주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늘 같이 있는 이들과 대련을 하면 익숙해지고 타성에 젖기 마련이니까요.”
“흐음.”
벽우진이 묘한 눈으로 설향을 응시했다.
그러나 설향은 그런 벽우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담담하게 벽우진의 눈빛을 마주했던 것이다.
“절대 방해가 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지내는 동안 필요한 생활비 역시 저희가 모두 부담할 생각입니다.”
“이곳에 한동안 머물겠다는 뜻이오?”
“장문인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물론 저도 함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경험이라.”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무슨 의도로 이렇게 말하는지 모를 수가 없어서였다.
더불어 확실히 눈치가 남다르단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아이들의 눈부신 성장세가 궁금한 것이겠지.’
묘한 미소를 머금고서 벽우진이 설향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시선에도 설향은 담담히 대답을 기다렸다.
애초에 칼자루는 벽우진이 쥐고 있어서였다.
“이건 말 그대로 부탁이지 요청이 아닙니다, 장문인.”
“알고 있소. 그래서 고민하는 것이고.”
“부담스럽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그렇지는 않소이다. 고작 함께 한다고 진의가 들통 날 공부가 아니니. 다만 내가 허락을 한다 하더라도 하오문 측에서 얻는 게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오.”
설향이 눈을 빛냈다.
말투를 보아하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닌 것 같아서였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애초에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부탁을 드린 것이니까요. 곤륜산의 영험한 기운도 좀 받고 말이지요.”
“그렇다면야. 단, 머무는 건 허락하겠지만 모든 곳을 다 공개할 수는 없소이다. 허락된 공간에서만 이동이 가능하오.”
“그거야 당연하지요. 절대 허락 없이 곤륜파 내부를 돌아다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설향의 얼굴이 밝아졌다.
비록 비밀을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일대제자들과의 대련은 무룡대(武龍隊)에게 큰 자극이 될 게 분명했다.
어쩌면 덩달아 큰 성장을 이룰지도 몰랐고.
‘운이 좋다면 장문인의 가르침을 받을지도 모르지.’
설향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상상만 해도 심장이 벌렁벌렁 거렸기에 기대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헛된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지레 포기하는 것도 옳지 않았다.
“사부님.”
“무슨 일이냐.”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흘러갈 때 문 밖에서 서예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저어. 손님이 오셨습니다.”
< 제 27장. 방문자.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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