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87화 (87/325)

< 제 27장. 방문자. -02 >

도일수가 머뭇거렸다.

그런데 보이지 않음에도 그가 난감해한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벽우진이 말을 이었다.

“일단 들어와.”

“예.”

이윽고 문이 열리며 말끔한 도복 차림의 도일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벽우진과 청민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누가 날 찾아온 거야?”

“그게 두 사람이 사부님을 찾아왔는데 한 분은 노인이시고, 다른 한 명은 아직 어린 남자아이입니다.”

“소속은 모르고?”

청민이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루에도 많게는 수십 명이 벽우진을 만나고자 찾아왔으나 실질적으로 대면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아는 사이이거나 만나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벽우진이 자리를 허락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 결정에는 청민 역시 동의했고.

벽우진은 이제 더 이상 몰락한 문파의 장문인이 아니었다.

청해성을 대표하는 고수인 만큼 당연히 아무나 만나줄 필요는 없었다.

“예. 그런데 상당히 절박해 보였습니다. 꽤 먼 길을 온 듯했고요.”

“네가 판단하기에는 보고해도 될 정도다?”

“예. 일단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장로님께서도 여기에 계신다고 해서.”

청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자신에게 먼저 찾아오려고 했는데 벽우진과 함께 있자 이리로 온 것임을 알 수 있어서였다.

“다른 말은 없고?”

“예.”

“데려와.”

“알겠습니다.”

고민하는 청민과 달리 벽우진은 시원스럽게 결정을 내렸다.

아무나 만나지 않는 그였지만 도일수가 이렇게 보고할 정도라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게다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보통은 권문세가나 나름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는 무문들이 찾아오는데 일노일소 단 둘이서 찾아왔다고 하자 벽우진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직접 만나보시게요?”

“못 만날 것도 없잖아? 내가 지금 바쁜 것도 아니고.”

“평소에는 잘 안 만나시잖아요.”

“시답잖은 대화를 할 게 뻔하잖아. 간이나 보고 어떻게든 빼먹을 게 있나 궁리하는 족속들 상대할 바에는 그냥 낮잠이나 자는 게 낫지.”

청민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이들을 만날 바에는 차라리 쉬는 게 나았다.

물론 달라져가는 위상에 기껍기도 했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궁금하네요.”

“넌 할 일 없어?”

“저는 사형과 달리 제자도 없지 않습니까. 무공수련도 이미 충분히 하고 있고요.”

“그렇다면야.”

벽우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곤륜파의 핵심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청민인 만큼 같이 있어도 상관은 없어서였다.

“모셔왔습니다, 사부님.”

“안으로 모셔.”

눕듯이 의자에 앉아서 잠시 졸던 벽우진이 눈을 비비며 자세를 바로 했다.

청민이나 제자들이야 이미 망가진 모습을 수도 없이 봤지만 지금 들어오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름 곤륜파에 대한 환상 같은 것도 있을 것이기에 벽우진은 그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나름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일노일소가 도일수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도일수의 말마따나 두 사람의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둘 다 옷에는 흙먼지가 가득했고 며칠을 굶은 것인지 안색은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식사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오.”

“괜찮습니다.”

꼬르륵!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시커멓게 죽어 있는 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아이의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재 공복임을 몸이 스스로 알려왔던 것이다.

그 소리에 열 살 남짓한 남자아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아이는 좀 먹어야 할 것 같소만.”

벽우진이 노인을 향해 말했다.

그러면서도 벽우진은 노인을 살폈다.

신장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단단한 체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농사꾼이나 촌로로 보이지는 않았다.

촌부라고 하기에는 옷에 가려진 근육들이 나이에 비해 너무나 탄탄해서였다.

“죄, 죄송합니다!”

“배고픈 게 사과할 이유는 아니지. 아직 한참 먹을 때인데. 일수야.”

“예, 사부님.”

“간단한 요깃거리 좀 가지고 오너라. 두 사람이서 먹을 수 있게 넉넉히.”

벽우진의 지시에 도일수가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옥청궁을 나섰다.

그런 다음 그는 조손지간으로 보이는 둘에게 자리를 권했다.

“일단 목부터 축이시죠.”

괜히 사제가 아니라는 듯이 청민도 노소가 앉기 무섭게 차를 따라주었다.

보아하니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곤륜산을 오른 것 같아서였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모자라면 말하거라. 더 줄 터이니.”

“네에.”

남아가 조부와 청민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낯선 곳이라 그런지 낯을 많이 가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자신이야 같이 온 조부와 비슷한 또래지만 벽우진은 한참이나 젊고, 위치 역시 장문인이었기에 어려운 게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와그작와그작.

잠시 후 도일수가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져왔다.

하지만 남자아이만 먹을 뿐 노인은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감정을 추스르는 듯 굳게 다문 입술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눈을 떴다.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모양이오.”

“그렇습니다.”

“그래. 무슨 용건으로 나를 보고자 한 것이오?”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준 벽우진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그의 성격답게 처음부터 직설적으로 물었던 것이다.

“장문인. 우리의 원통한 한을 풀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털썩!

꾀죄죄한 얼굴이 한순간에 붉어졌다.

그러면서 노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벽우진을 향해 엎드렸다.

“원통한 한이라.”

“크흐흐흑!”

노인이 엎드린 채로 눈물을 쏟아냈다.

지금까지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는 듯이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이 쏟아냈던 것이다.

그러자 허겁지겁 간식을 먹고 있던 아이 역시 조부를 따라 바닥에 엎드렸다.

“부, 부탁드립니다. 장문인.”

“일단 자초지종부터 듣고 싶소이다.”

단순히 울고 있는 것뿐인데도 심금을 울리는 듯한 소리에 벽우진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서글프게 우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또한 어째서 자신을 찾아왔는지도 알고 싶었다.

“저는 대장장이입니다. 감숙성 난주에서 조그마한 대장간을 운영하며 손녀손자 셋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나름 재주가 좋아 농기구뿐만 아니라 병장기도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사달이 났습니다.”

노인의 눈에서 다시 한 번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인지 얼굴에 깊은 슬픔이 서리며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추면색귀(醜面色鬼). 그 놈이 제 손녀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골백번은 죽였을 법한 눈빛으로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극도의 분노로 몸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다.

“추면색귀라면.”

“얼마 전에 호법들의 손에 죽은 쌍섬귀와 혈광도귀와 함께 강북 무림에서 육귀(六鬼)에 뽑힌 녀석입니다. 이제는 사귀(四鬼)가 되었지요.”

“맞습니다. 바로 그 녀석입니다. 또한 감숙성에서 유명한 색마이기도 합니다. 여자라면 나이가 어리건 많건 아름답기만 하다면 가리지 않고 간살하기로 유명한 놈입니다.”

노인이 씹어 먹을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런 그의 두 눈에서는 무인과는 다른 살기가, 순수한 살의가 번들거렸다.

추면색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타오를 것 같은 살기가 솟구쳐서였다.

스윽.

무인의 살기와는 다른, 사람이 내뿜는 순수한 살의에 가까운 기운에 벽우진이 손을 휘저었다.

옆에 아이도 있는데 살의가 너무 짙은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의외로 남자아이는 그 살의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나이는 어려도 누나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으음.”

조숙한 아이의 반응에 벽우진은 입맛이 썼다.

한창 뛰어 놀고 순수해야 할 아이가 너무 빨리 세상을 안 것 같아서였다.

‘더구나 가족까지 잃었으니.’

셋이서 살았다고 했으니 부모가 모종의 일로 죽었거나 혹은 떠났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남자아이에게는 누나의 빈자리가 더욱 컸을 것이다.

“관부에는 찾아가 보았습니까?”

“무림과는 불가침의 관계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자신들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또한 추면색귀가 활동한 기간도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현상금도 정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청민이 침음을 흘렸다.

한 가닥 기대를 했었는데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의 답변이 나와서였다.

“원통하게 죽어간 제 손녀의 한을 풀어주십시오, 장문인. 제발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장문인.”

조부를 따라하듯 남자아이가 고개를 조아렸다.

둘에게 있어 손녀와 누나의 복수를 해줄 사람은 벽우진이 유일했다.

적어도 조손은 그리 생각했다.

같은 육귀의 일원이던 쌍섬귀와 혈광도귀를 물리친 벽우진이라면 관부에서도 포기한 추면색귀를 추살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사형.”

거기에 청민까지 가세했다.

별호만 들어도 어떤 잡놈인지 알 수 있어서였다.

그리고 과거에도 곤륜파는 이런 일을 회피하지 않았다.

관부가 하지 못한 일을, 아니 청해성의 치안은 곤륜파가 적지 않게 담당했었다.

또한 이건 굳이 곤륜파뿐만 아니라 중원의 명문대파들도 하는 일이었다.

“장문인께 무작정 도와달라고 말할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습니다. 만약 저희의 원한을 풀어주신다면 제 남은 인생을 장문인께 바치겠습니다.”

쿠웅!

노인이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손녀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노예라도 될 수 있었다.

추면색귀에게 복수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저, 저도···.”

“그럴 필요 없소이다.”

조부에 이어 남자아이마저 이마가 차가운 바닥에 닿았을 때 벽우진이 말을 잘랐다.

남의 인생을 조건으로 받을 정도로 그는 무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악인이라면 보이는 족족 처치하는 게 맞았다.

한 명의 악인을 죽임으로써 죄 없는 수십 명을 구할 수 있다면 벽우진은 손에 피 묻히는 일을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그럼?”

“어찌해주길 바라시오?”

꿀꺽!

고개만 든 노인이 벽우진을 쳐다보며 침을 삼켰다.

깊고 심유한 눈동자를 마주하니 결박되어 자신의 앞에 놓인 추면색귀가 보이는 듯해서였다.

“죽여서 데려오는 걸 원하오, 아니면 사로잡아 오는 걸 원하오?”

“제가, 제가 직접 손녀의 한을 풀고 싶습니다.”

“알겠소이다.”

벽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한 눈빛에서 노인의 의지를 충분히 읽을 수 있어서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일단 쉬고 계시구려. 그 놈을 잡아와도 기력이 딸리면 어찌 복수를 하겠소. 우선 체력을 회복하고 몸 상태부터 정상으로 만드시구려. 손자도 마찬가지고.”

“알겠습니다.”

“최대한 서둘러 그 놈을 잡아오도록 하겠소. 일수야. 당분간 머물 숙소로 안내해 드리거라.”

“예.”

나이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글썽거리는 노인이 이내 손자와 함께 도일수를 따라 옥청궁을 나섰다.

그러자 벽우진이 옆으로 자리를 옮긴 청민을 지그시 바라봤다.

“하오문에 전서구를 보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위치를 파악해 달라고 해.”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이참에 감숙성 분위기도 좀 보고 오지 뭐. 무인들이야 관심 없지만 일반 양민들의 생활은 좀 걱정이 되니.”

북해빙궁과의 전쟁은 무인들의 전쟁이었다.

일반 양민들이나 촌로들과는 상관이 없는.

또한 북해빙궁 역시 민심을 의식해 무문과 관련이 된 이들만 겁박할 뿐 일반 양민들에게는 일체 손을 쓰지 않았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관부가, 황실이 나설 수도 있어서였다.

그런데 문제는 추면색귀와 같이 전쟁통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이들이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우리 둘 다 가면 사문은 누가 지키고? 내가 가면 너라도 남아 있어야지. 그리고 난 혼자가 편해. 위치만 파악되면 얼마 안 걸릴 거다.”

벽우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청민에게는 너무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보지 못한 추면색귀의 미래가 지금 이 순간 그의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 제 27장. 방문자.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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