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85화 (85/325)

< 제 26장. 반전의 시작. -03 >

한 명의 무인이기에 앞서 남궁진은 한 가문의 수장이었다.

그것도 오랫동안 오대세가의 수좌를 지켜온 가문의 가주였다.

때문에 동귀어진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마저도 욕심인가.’

자신의 대에서는 힘들더라도 후대가 번창할 기반은 남겨두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문득 그 생각마저도 욕심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똑똑똑!

한데 그때 누군가가 회의실의 문을 두드렸다.

왠지 모르게 다급함이 느껴지는 두드림에 남궁진은 물론이고 수뇌부라 할 수 있는 모두의 시선이 출입문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냐.”

“가, 가주님. 북해빙궁 측에서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서신?”

“예. 북해빙궁주가 직접 작성한 서신을 옥면검존이 가져왔습니다.”

벌떡!

옥면검존이라는 말에 남궁진과 개왕을 제외한 모든 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정도로 옥면검존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남달라서였다.

“오, 옥면검존이 왔다고!”

“혼자 왔느냐?”

화산검제를 일대일로 쓰러뜨리며 단번에 무명을 알린 옥면검존이 왔다고 하자 수뇌부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특히 몇몇은 대놓고 살기를 드러냈다.

선봉장이라 할 수 있는 옥면검존의 손에 죽은 이들이 수두룩했기에 반사적으로 살기를 띤 것이다.

“호, 혼자 왔습니다.”

살기 넘치는 수뇌부들의 시선에 남궁세가의 무사가 말을 더듬었다.

그도 어디 가서 기가 죽는 성격이 아닌데 수뇌부들의 살기가 집중되자 감당하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스윽.

그 모습을 본 남궁진이 손을 휘저었다.

가솔에게 집중된 살기를 흐트러뜨리기 위해서였다.

“죄 없는 아이에게 살기 피우지 말고. 그 투지는 싸울 때나 사용해라.”

남궁진에 이어 개왕도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 죄 없는 무사에게 화풀이하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서였다.

“서신은?”

“여기 가져왔습니다.”

“이리 가져오너라.”

“예.”

남궁진과 개왕의 도움으로 살기의 바다에서 빠져 나온 무사가 바짝 언 기색으로 다가와 공손히 서신을 건넸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남궁진의 손에 들린 서신으로 향했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지 다들 궁금했던 것이다.

촤르륵!

그런 수뇌부들의 시선을 느끼며 남궁진이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서신을 펼쳤다.

한데 서신을 읽던 남궁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지더니 두 손을 부르르 떨었던 것이다.

“왜 그러나?”

“이게 정녕 옥면검존이 가져온 것이더냐?”

“예, 가주님.”

“허허허허!”

남궁진이 웃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거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기에 그러는 건가?”

“방주께서도 보시죠.”

남궁진은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옥면검존이 가져온 서신을 그에게 건넸다.

잠시 후 개왕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봉문, 봉문이라. 허허허!”

남궁진에 이어 개왕 역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의 웃음소리에도 어마어마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설마 하니 이렇게 광오한 제안을 해올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봉문이요?”

“설마 북해빙궁주가 봉문하라고 한 것입니까?”

“봐라. 너희들에게도 해당되는 내용들이지.”

사라락!

개왕이 수뇌부들에게 서신을 건넸다.

그리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분노도 분노지만 더 화가 나는 건 거절했을 때의 결과였다.

창왕과 낭왕이 오고 있다고 하나 그 정도로는 균형만 간신히 맞출 수 있는 정도였다.

‘소림이라도 있었다면···.’

개왕은 소림사의 전력이 너무나 아쉬웠다.

만약 소림사만 건재했더라도 북해빙궁주가 이런 망발을 지껄이지는 못했을 터였다.

‘아니지. 지금은 가정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떻게 헤쳐 나갈지에 대해서 궁리해야 해.’

분노는 잠시뿐이었다.

지금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이런 잡것들이···!”

“감히 오랑캐 따위가!”

남궁진과 개왕이 침묵하는 것과 달리 다른 이들은 노발대발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치솟았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몇몇 이들은 조용히 눈치를 살폈다.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그 자존심이 가문보다 중요한 건 아니어서였다.

더구나 태풍이 왔을 때 잠시 피해 있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조간회의는 여기서 끝마치겠소이다.”

“으음!”

“방주님은 잠시 남아주시지요.”

“알겠네.”

복잡하게 흐르는 분위기에 수뇌부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리가 되지 않은 지금 이 상황에서는 회의 자체가 소용없다는 걸 알아서였다.

동시에 많은 이들이 남궁진과 개왕의 눈치를 살폈다.

“옥면검존은?”

“서신만 주고서 돌아갔습니다.”

“알았다.”

서신을 가져왔던 무사 역시 고개를 꾸벅 숙인 후 회의실을 나서자 널찍한 방 안에는 남궁진과 개왕만이 남게 되었다.

“남궁가주는 어찌할 생각인가?”

“어차피 양자택일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자존심을 굽히던가, 결사항전 하던가. 이미 굽히려는 이들도 꽤 보이던데.”

“멸문지화를 피할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하나 허락해줄 수 없네.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는.”

개왕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어쩌면 북해빙궁이 노리는 게 분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막말로 봉문을 선택해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남몰래 기습해서 지워버리고 흔적을 없애면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할 테니까.

“저 역시 방주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가뜩이나 전력이 밀리는데 사분오열되기까지 한다면 정말 승산이 없지요.”

“후우.”

막막한 현실에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개왕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했다.

답이 없다고 가만히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서였다.

“그래서 말인데. 방주님께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혹 방도가 있는가?”

“곤륜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패선이 후방에서 휘저어 주기만 해도 저희는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저희가 버티며 강북 무림의 구심점이 된다면, 장기전으로 간다면 승산이 있습니다.”

“으음!”

개왕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라고 그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곤륜파 장문인의 태도가 너무나 완강했다.

“지금이라도 사과를 해서 마음이 풀어진다면, 제가 직접 서신을 쓰고 직인까지 찍을 생각이 있습니다. 직접 찾아갈 수가 없어서 그렇지 찾아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바로 움직일 생각도 있습니다.”

“간절함이야 나도 마찬가지기는 한데, 워낙에 완강해서 말일세. 더구나 성격이 개차반이라는 말도 있고. 일단 맺고 끊는 게 확실하다고 하니.”

“사천당가보다는 곤륜파가 더 쉽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지금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건 다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물론 이게 염치없는 생각이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끈이 잘못 묶였다면 풀어서 다시 묶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곤륜파에서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저희가 패배한다면 북해빙궁의 다음 목적지는 곤륜산이 될 테니까요.”

“일리는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패선의 속마음이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러니 패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더해서 참전까지 이끌어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요.”

“나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구먼.”

“방주님 밖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허허허.”

개왕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 말의 의미를 그는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더불어 백도의 한계를 여실히 깨달았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해보겠네. 아니, 해내야지. 그래야 우리가 살 거 아닌가. 가주나 나나 항복은 절대 없으니.”

“맞습니다.”

후대를 생각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굴욕의 역사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차라리 지더라도 끝까지 항전하고 버티며 다시 일어나는 게 바로 남궁세가였다.

“바로 움직여야겠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없으니.”

개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가 회의실에서 나갔음에도 남궁진은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당민호가 가주 전용 집무실이라 할 수 있는 무독각(無毒閣)에 들어갔다.

오늘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시비에게 전해 들어서였다.

“나다.”

“들어오시지요.”

두드리는 것도 없이 목소리만으로 자신의 방문을 알린 당민호가 안에서 들려오는 당문경의 목소리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들어가 당문경의 앞에 앉았다.

“정말 그가 왔더냐?”

“예. 저도 놀랐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고 하지만 기성(奇星)인 제갈가주가 직접 올 줄은 몰랐거든요.”

“여기까지 올 만한 상황이 아닐 텐데.”

“혼자서 이동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한 손이 아쉬운 상황이니까요.”

당문경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실 아직도 얼떨떨한 상태였다.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은 알지만 기성의 다른 신분은 제갈세가의 가주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방문이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것은 하나겠구나.”

“예. 그보다 이걸 먼저 봐주셨으면 합니다, 아버지.”

“흠.”

당문경이 자신의 탁자 위에 돌돌 말려 있던 서찰을 당민호에게 건넸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는 게 딱 봐도 작성한지 제법 오랜 시일이 지난 것 같은 서찰을 말이다.

주르륵.

두께도 제법 나가는 서찰을 펼친 당민호는 살짝 궁금한 표정으로 내용을 확인해나갔다.

아들이 괜한 것을 보여줄 리가 없기에, 그리고 제갈현과도 관련이 있을 게 분명하기에 찬찬히 서찰을 읽어 내려갔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당민호의 표정이 기기묘묘하게 변했다.

“허어.”

“예상 밖이지 않습니까? 황보세가와 하북팽가야 강북에 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강남 쪽은 전부 다 보내왔습니다.”

“놀랍구나.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이겠지요. 오독문을 밀어내도 강북에 북해빙궁이 있으니까요. 알아보니 남궁세가에 집결해 있는 병력이 최후의 정예인 것 같습니다. 각각의 성에서 소소하게 저항을 하고 있지만 북해빙궁이 마음먹고 움직이면 못 쓸어버릴 것도 없으니까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당민호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 콧대 높은 이들이 이 정도로 납작 엎드릴 줄은 몰라서였다.

“상황이 심각할 정도로 안 좋기는 하지. 물론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방심이었지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초반에 전력으로 승부를 걸었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정반대였을 겁니다. 물론 강시들로 인해 피해가 상당했겠지만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밀리지는 않았겠죠.”

“맞아.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냐?”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아버지께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당문경이 담담한 얼굴로 당민호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러자 깊은 용정차의 차향이 방안을 은은하게 채워나갔다.

“사천당가의 가주는 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결정은 제가 해야 한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조언 정도는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네 생각은 어떻더냐?”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본가가 천하제일가가 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지금껏 단 한 번도 넘어서지 못한 남궁세가를 밀어낼 기회가 지금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민호가 대답 대신 차를 들이켰다.

천하제일가라는 다섯 글자가 사천당가에 어떤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어서였다.

그 역시 소가주였던 시절에는 천하제일가문이라는 그 말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때문에 누구보다 당문경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천하제일가라.”

< 제 26장. 반전의 시작.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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