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6장. 반전의 시작. -02 >
벽우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맺혔다.
무인도 아닌 강시들을 상대했을 뿐이지만 수련에 임하는 자세가 확연히 달라져 있어서였다.
물론 예전에도 열심히는 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각오와 결의가 넘치지는 않았다.
“확실히 한층 더 성장했어.”
눈빛만 봐도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기에 벽우진은 미소가 절로 나왔다.
아무리 실전 같은 수련을 해도 진짜 실전과는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런 마음가짐으로 지독하게 수련을 하면 실전과의 차이를 어느 정도까지는 좁힐 수 있었다.
“물론 그 전에 체력부터 길러야 하지만 말이지.”
“사부님!”
“아침부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죄송합니다!”
깃털처럼 가볍게 땅에 착지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제자들이 일제히 수련하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는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고 죄송해 할 필요는 없고. 수련하는 것도, 휴식하는 것도 너희들 선택이니까. 알겠지만 난 강요하는 성격이 아냐.”
“좀 더 보탬이 되고 싶어서요.”
“사문에 먹칠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양일우, 양이추 형제가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웃긴 건 다른 제자들의 표정도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너희들은 가끔 쓸데없이 진지할 때가 있어. 다쳤으면 좀 쉬고 그래야지.”
“움직일 수 있습니다.”
“어제는 체력단련도 했는걸요.”
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몇몇은 붕대를 감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럼 오랜만에 내가 직접 지도를 해줘볼까.”
“감사합니다!”
“한 명씩 와도 좋고, 다 같이 와도 좋고. 쓰러져도 다시 덤벼도 좋고. 부딪치고 깨지다보면 얻는 게 분명히 있을 테니까.”
벽우진의 말에 아이들이 번개같이 서로를 돌아봤다.
이제는 직접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을 정도였기에 의견은 빠르게 일치되었다.
“전음도 할 수 있는 녀석들이 눈치를 왜 봐. 그냥 전음으로 말하면 되지.”
“왠지 사부님은 훔쳐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내가?”
“예. 사부님은 가능하실 것 같아요.”
앙증맞은 체구의 심소혜가 자신의 체형에 맞는 작은 소검을 들고서 말했다.
그런데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제만 해도 벽우진이 펼친 무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였다.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해봐야겠다. 근데 만약에 들을 수 있다고 쳐도 내가 너희들 전음 들어서 뭐해? 기습이라도 하게?”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보게요.”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근데 이미 너무 훤히 드러나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벽우진이 히죽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를 본 이는 몇 없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벽우진이 움직여서였다.
“으힙!”
단순한 움직임이지만 호흡을 빼앗아서 이동하는 것이기에 제대로 반응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 막내인 심소혜는 아예 기겁을 하며 깜짝 놀랐는데 다행히 벽우진이 목표한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서예지였다.
터엉!
“흡!”
맨손인데도 마치 철퇴라도 막은 것처럼 묵직하게 파고드는 반동에 서예지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강하게 내지른 것도 아니고 그저 수도로 휘두른 것뿐인데도 몸이 휘청거릴 정도여서였다.
그래서 그녀는 반격은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다.
“끝.”
상반신이 흔들리는 순간 벽우진의 왼손은 이미 그녀의 목젖 앞에 다가와 있었다.
쫙 펴진 손가락 끝이 그녀의 목전에 닿을락 말락 했던 것이다.
“네에.”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말고. 계속 이어지는 거니까. 하지만 몇 번 죽었는지는 기억해. 그래야 다른 애들과 비교할 수 있을 테니까.”
스슥!
벽우진의 신형이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아이들도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북해빙궁의 공격에 대비해 수없이 훈련한 태청검진을 펼치며 벽우진을 공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반격에 당해주기에는 벽우진이 아는 게 너무 많았다.
“으아앗!”
“켁!”
제자들 중에서 가장 강한 서예지와 똑같은 수준으로 대응을 했음에도 오히려 무너지는 쪽은 아이들이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바닥을 나뒹굴었던 것이다.
하지만 손속에 사정을 두었기에 제자들이 받은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신 악이 바짝 오른 제자들이 넘어지고 쓰러져도 계속 해서 벽우진에게 달려들었다.
“그래. 바로 그 정신이지!”
독과 깡으로 밀고 들어오는 제자들의 모습에 벽우진도 흥이 솟구치는 듯 움직임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러나 일정 수준 이상의 힘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고 어려워도 왼손 하나만 사용했던 것이다.
‘무럭무럭 자라거라.’
어떻게든 오른손을 사용하도록 만들겠다는 듯이 악착같이 달려드는 제자들의 모습에 벽우진이 속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새삼 제자들을 잘 뽑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입문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싫은 소리 내지 않는 게 그로서는 너무나 대견스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가르치고 싶었다.
‘미래는 너희들의 몫이니까.’
수명이 늘었다고 하나 인간은 결국 죽게 되어 있었다.
불사(不死)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또 다른 시작이 있을 뿐.
그렇기에 벽우진에게 있어 제자들은 너무나 소중했다.
그의 뒤를 이어 곤륜의 명맥을 이어갈 존재들이었으니까.
회의실로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하지만 상석에 앉아 있는 남궁진의 표정은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호전되기는커녕 점점 나빠지고 있어서였다.
“다 들어오셨습니다, 가주님.”
두 눈을 감고 있는 그의 귀로 남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비어 있던 자리가 다 찬 것이다.
“상처는 어떠십니까?”
“보다시피 별로 좋지 않아. 아무래도 약발이 제대로 들 나이는 아니니까.”
“그래도 얼른 완쾌되셔야 합니다.”
“그리 말하지 않아도 서두르고 있다네. 제자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얼른 회복이 되어야 하니까. 참고로 투존(鬪尊)은 나의 것이네.”
개왕이 형형한 안광을 뿌렸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음에도 살기를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 있는 누구도 그 점에 대해 지적하지 못했다.
개방의 후개가 죽었는데 개방주가 흥분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건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은 창왕과 낭왕의 위치겠지?”
“그렇습니다.”
남궁진의 대답에 앉아 있던 몇몇 이들이 눈을 빛냈다.
그 중에는 사마륭도 있었다.
특히 숭산전투에서 반수가 넘는 수하들을 잃은 그에게 있어 창왕과 낭왕의 합류는 가뭄 끝의 단비와 같았다.
반등을 위해서는 둘의 합류가 필수였다.
“지금의 이동 속도라면 모레 오후에는 도착하지 않을까 싶네. 그런데 애매한 소식도 하나 있네.”
“애매한 소식이라. 어떤 소식입니까?”
“빙마존과 백귀존이 본대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네.”
“곤륜파가 결국 무너진 겁니까?”
남궁진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곤륜파의 선전에 그들 역시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고 있어서였다.
특히 십존 중 둘을 쓰러뜨린 게 곤륜파의 장문인이었기에 남궁진은 내심 그에 대해서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무너지지 않았네. 오히려 북해빙궁의 공격을 대파했지.”
“오오오!”
“역시 명문의 저력이란!”
개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연전연패만 하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 희망을 주는 소식이어서였다.
하지만 남궁진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어째서 애매하다고 한 것인지 그는 이해했던 것이다.
“백귀존과 빙마존을 놓친 모양이군요.”
“아닐세. 둘이 물러났다고 하더군.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도망쳤다고 봐야지.”
“으음! 곤륜파 장문인의 무위가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이미 증명했지. 빙화파산존과 무음살존을 죽인 게 패선이니까.”
패선이라는 별호에 남궁진은 다시 한 번 궁금증이 치솟았다.
도대체 어떤 무인이기에 패선이라는 별호가 붙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보통은 검선이니 도선이니 하는 별호가 붙는데 말이다.
“두 괴물이 도망쳤다니.”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자기에 두 괴물이 도망친 거지?”
“방주님. 어떻게, 도움을 요청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남궁진이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몇몇 사람들이 입을 열었다.
하나같이 명문대파이자 가문의 수장들이었다.
지금은 비록 그 위세가 급격히 꺾이긴 했지만.
그리고 그들 중에는 사마륭도 눈을 빛내며 얌전히 앉아 있었다.
“곤륜파에게 말이더냐?”
“예. 십존 중 둘을 쓰러뜨리고 둘을 쫓아낼 정도의 실력자라면 저희들에게 정말 큰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네 생각이고. 그쪽 생각이 그럴까?”
“사해가 동도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이야 소원해진 관계이지만 과거에만 해도···.”
“정말 끝까지 이기적인 말만 지껄이는구나. 정작 곤륜파가 어려울 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놈이. 물론 나 역시 너에게 이런 지적을 할 자격도 없는 놈이지만.”
개왕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힘들고 어려웠던 곤륜파를 외면했던 문파 중에는 개방도 있어서였다.
물론 애초에 거지들의 소굴이자 집단인 개방이 누군가를 지원해준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빌어먹는 거지들이 무슨 돈이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잘못한 건 사실이지.’
그간의 정리를 생각하자고 말하는데 반대로 곤륜파가 그렇게 말하면 이쪽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정마대전이 끝난 직후라고 하나 그간의 정리가 있는데 곤륜파를 외면한 건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곤륜파가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면 자신들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과거에 그들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는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상황이···.”
“우리 상황이 이런 거지, 곤륜파 쪽은 아니지. 더구나 그쪽은 피해가 거의 전무한 것이나 마찬가지던데. 잔부상만 좀 입었을 뿐.”
“허어.”
“전체적인 전력이 상당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숫자가 소수지. 일종의 소수정예라고나 할까.”
개왕이 입맛을 다셨다.
누가 뭐래도 아쉬운 사람은 그였다.
만약 패선과 무명이 급속도로 뜨고 있는 곤륜파의 호법들까지 합류한다면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패선의 성향을 보면 쉽지 않겠죠.”
“분타주가 이미 까였어. 애걸복걸 매달려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다더군.”
“으음.”
남궁진이 침음을 흘렸다.
그러나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사천당가만 해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와준다면야 우리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가능성이 희박하지.”
“방법이 없겠습니까?”
“있었으면 내가 가만히 있지는 않았겠지. 게다가 누군가가, 혹은 둘이 야료를 부린 정황도 있어서.”
개왕의 시선이 어느 한 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 시선이 향한 곳에 앉아 있던 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허어!”
“도대체 누가 그딴 짓을···!”
“시끄러워. 너희들은 그런 말조차도 할 자격 없다니까? 입 다물고 있어라.”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던 개왕이 두 눈을 부라렸다.
그 눈빛에 모두가 시선을 피했다.
“무림맹 결성은 힘들겠지요?”
“상황이 여의치 않잖나. 시간도 없고. 북해빙궁이나 오독문이 기다려줄 리도 없고. 이미 점령지 안정화 작업까지 들어간 상태인데. 그동안 숨죽이고 있는 사마외도 놈들도 날뛰고 있는 상황이고.”
개왕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건 남궁진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살펴보고 고민해봐도 좀처럼 돌파구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기에는 전력이 아직 부족했다.
‘승리해도 모든 걸 잃는다면 그건 절대 이긴 게 아니니.’
< 제 26장. 반전의 시작.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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