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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83화 (83/325)

< 제 26장. 반전의 시작. -01 >

고풍스럽게 꾸며진 방 안에서 설향이 양선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방 안에는 한 명이 더 있었다.

아직은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십대 후반의 소녀가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빙마존과 백귀존이 도주를 선택했다라.”

“예.”

“둘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죽고?”

“예. 근래 들어 악명을 떨치는 쌍섬귀와 혈광도귀가 참전했음에도 전부 도륙 당했다고 합니다.”

담담히 이어지는 양선의 보고에 설향의 주름 가득한 얼굴에 짙은 놀람이 떠올랐다.

곤륜의 승산이 높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압도적인 격차를 보여줄 줄은 몰라서였다.

특히 벽우진은 아예 나서지도 않았다는 말에 설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팔존이 아무 이유 없이 물러나지는 않았을 터.”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무리하게 싸우기보다는 다음을 기약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미 십존의 둘을 잃은 상태이기도 하고요.”

“대단하구나.”

설향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십존 중 둘을 쓰러뜨린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인데 벽우진은 또 다시 두 명을 물리친 것이나 다름없어서였다.

현재까지 이런 성과를 낸 이는 중원무림에서 벽우진이 유일했다.

“저도 이렇게 수월하게 막아낼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아무리 저희가 정보를 주었다고는 하지만 피해가 거의 없다시피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천하의 소림사조차 숭산을 버리고 도망쳤는데···.”

양선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물론 규모로 따지면 곤륜파가 상대한 강시들의 숫자는 감히 숭산에서의 전력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놀라운 점은 곤륜파의 전력 역시 숭산에 집결해 있던 전력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사천당가의 기술자들이 있다고 하나 그들의 수준은 곤륜파 전력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수준이 결코 아니었다.

“자잘한 부상만 입었다고?”

“예.”

“우리가 여전히 곤륜파를 과소평가한 모양이구나. 곤륜파에는 패선만 있는 게 아니었어.”

설향이 담담히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평가를 높게 했다고 했는데, 그마저도 과소평가를 한 듯했다.

특히 그녀는 제자들의 성장에 가장 놀랐다.

무공에 입문한지 1년도 채 안 된 이들이 어엿한 한 명의 무인이 되어 탈백강시들을 상대했다고 하자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빙혼강시처럼 도검불침이 아니라고 하나 탈백강시도 결코 만만한 마물은 아니었다.

한데 그런 탈백강시들을 상대로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고 하자 설향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욕심이 났다.

‘우리 아이들도 패선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수없이 오랜 세월 동안 핍박 아닌 핍박을 받아온 하오문은 좀처럼 고수를 키워내지 못했다.

상승절학이 없는 것도 있었지만 앞에서 이끌어줄 스승이 없었기에 제대로 된 고수를 육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겠지.’

벽우진 정도나 되는 고수가 아무 이유 없이 하오문을 도와줄 리가 없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편견이 없다고 하나 딱 거기까지였다.

서로 상부상조 하는 관계이지 그리 깊은 관계가 아니기에 도와달라고 해봤자 콧방귀만 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주고받으려고 해도 하오문으로서는 딱히 줄 게 없었다.

‘내밀 패가 없어.’

지금이야 규모가 작기에 하오문과 사천당가의 도움을 받지만 이번 습격을 막아낸 것이 알려지면 곤륜파는 다시 한 번 급속도로 성장할 터였다.

눈치만 보던 이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컸다.

“하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얻고 싶은 게 있는데 도통 그것을 받아낼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그녀는 제자들을 빠르게 키워낸 비밀을 가장 알고 싶었다.

단순히 무공이 뛰어나서, 혹은 잘 가르친다고 해서 경지가 쑥쑥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조심스럽게 알아봤는데 비현이라는 호법이 가장 수상합니다.”

“이번에도 나서지 않았다지?”

“예. 아무래도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는데 호법의 자리에 앉아 있단 말이지.”

설향이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였다.

벽우진의 성격상 아무 이유 없이 호법이라는 직위를 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비밀병기일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천당가의 기술자들까지 이번 전투에 나섰으니까요.”

“굳이 건물을 지킬 필요도 없고 말이지.”

“예.”

“얻고 싶은 건 많은데 방법이 없구나. 그렇다고 미인계를 쓴다고 해서 넘어올 것 같지도 않고. 제자로 들어가는 게 가장 확실하기는 한데,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지금의 상황으로 보건데 청해성의 어린 아이들이 곤륜파의 제자가 되겠다고 달려들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과거 구대문파의 한 자리를 차지하던 시절 산문에는 제자가 되고 싶다며 찾아온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게 다시 재현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소림사의 패배로 인해 강북 무림의 분위기도 전체적으로 흉흉하고 말이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분위기가 조금은 달라졌다는 거지. 북해빙궁의 기세가 꺾였으니까. 탈백강시들의 숫자도 확연히 줄었고.”

“빙혼강시도 더 이상 추가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럴 때가 되기는 했지.”

설향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머릿속 한 구석에는 곤륜파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제자들의 성장세가 떠나지 않았다.

대체 어떤 묘수를 부렸기에 단기간에 그만큼 성장했는지 너무나 궁금했던 것이다.

“거기다 이번 곤륜파의 일로 인해 다른 성의 분위기도 반등될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무너지긴 했지만 명문이 괜히 명문이 아니니까요. 공동, 화산, 종남, 하북팽가 모두 저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남궁세가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다시 한 번 달라질 테지만요.”

“남궁세가가 마지막 보루이기는 하지. 안휘성의 남궁세가마저 무너진다면 강북 무림은 북해빙궁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빙마존과 백귀존이 물러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곤륜파는 분명 눈엣가시이지만 남궁세가와 비교하면 중요도가 확 떨어지니까요.”

“그렇지.”

설향이 머리를 흔들었다.

우선은 강북 무림의 정세부터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현재 합비 쪽으로 창왕과 낭왕이 가고 있습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둘의 목적지가 남궁세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왕 중 넷이 모이게 되는구나.”

죽은 벽력도왕을 제외한 나머지 넷이 전부 모이게 되는 상황이었지만 설향은 크게 기대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결과로 보면 팔존의 무위는 결코 오왕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어서였다.

게다가 중요한 건 아직까지도 북해빙궁주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예.”

“그걸 알고 몸을 내뺐을 수도 있겠어.”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흠.”

설향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양선의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초토화된 것은 강북 무림만이 아니어서였다.

강남 무림 쪽 역시 오독문으로 만만치 않게 박살이 난 상태였다.

‘곤륜파라.’

소림사의 잔존 병력과 강남 무림의 전력이 무당산에 집결해 있다는 말에도 설향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좀처럼 곤륜파와 벽우진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던 것이다.

더불어 그녀는 근시일 내에 다시 한 번 곤륜산에 올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직접 부딪쳐봐야 할 것 같아서였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말이지.’

설향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으며 묘한 빛을 발했다.

운무가 짙게 내린 이른 시간에 벽우진은 연무장으로 나왔다.

서늘한 기운이 오히려 잠을 깨우는 듯한 느낌에 벽우진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남들은 춥다고 할지 모르나 벽우진은 이런 자연의 조화가 너무나 좋았다.

시공간의 진에 갇혀 있을 때는 느끼고 싶어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좋구나.”

바람결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새벽안개를 보며 벽우진이 어제 있었던 전투를 떠올렸다.

솔직히 말해 전투라고 할 수도 없는 싸움이었지만 그래도 얻은 게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제자들이 실전을 경험했으며 사문의 명성 역시 드높았다.

벽우진도 나름 얻은 게 있었고 말이다.

“역시 아직 배우고 경험할 게 많아. 아직도 나아갈 길이 멀었다는 뜻이지.”

시공간의 진에서 벽우진은 늘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다.

자신과 똑같은 경지의 또 다른 자기와 싸워서 이겨야지만 했기에 일대일의 경험은 그 누구보다 많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편협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온갖 잔머리와 변초가 난무했지만 그건 자신에게 한정된 경험이었다.

스윽. 스으윽.

그 사실을 벽우진도 잘 알고 있었기에 탈출과 동시에 새로운 이와 많이 대결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다른 이와의 비무는 분명 도움이 되기는 했으나 성장에는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걸 알게 된 후 벽우진은 고민하고 고뇌했다.

이대로 정체되어 있을 수 없기에, 사문을 재건해야 하기에 벽우진은 무공에 매진했다.

자신이 강해져야만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켜야지만 곤륜파를 다시 일으킬 수 있어서였다.

그럴 때마다 벽우진은 홀로 무공을 수련했는데 그게 어느새 지금의 춤사위가 되었다.

휘리릭. 휘릭.

바람을 타듯 너울너울 움직이는 벽우진의 움직임은 결코 무인의 것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힘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곤륜파 무공의 진의가 담겨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스으으윽.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는 듯한 벽우진의 움직임에는 신묘함이 있었다.

묘하게 자연을 닮은 듯한 느낌을 풍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기도 했다.

벽우진은 사람이 아닌 자연에게서 많은 걸 배우고 있었으니까.

“무공의 극의라.”

한껏 신나게 춤사위를 추던 벽우진이 멈춰 서며 중얼거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더불어 곤륜파의 무공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사실 곤륜파의 무공은 파괴와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무(武)를 쌓아 신선이 되고자 하는 공부가 바로 곤륜파의 무공이었다.

다만 속세에서 살기에 다툼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일 뿐.

“어쩌면 시공간의 진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걸 다 배워서인 걸지도.”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벽우진은 근래 들어 실감하는 중이었다.

경지가 완숙해질수록 자연의 위대함을 절절히 깨닫고 있어서였다.

또한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 없다는 말도 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자신의 육체부터 완벽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하지.”

무릇 모든 일이든 기초가 중요했다.

그리고 벽우진이 깨달은 사실은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게 가장 먼저였다.

머리로 이해하고 깨달아도 몸이 그걸 따라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스스로의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다루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가 볼까나.”

이른 시간이지만 이미 일어나서 수련하고 있을 게 뻔한 제자들이었기에 벽우진이 땅을 박찼다.

이윽고 벽우진의 신형이 마치 신선처럼 하늘로 두둥실 떠올라 제자들의 숙소로 향했다.

까가가강!

뒷짐을 지고서 바람을 타듯이 훌쩍 날아간 벽우진이 숙소의 지붕에 내려섰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벽우진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새벽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고요한 새벽에 숙소 뒤쪽에 마련된 연무장에서 각자 짝을 지어 대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흠.”

각자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있었지만 의외로 움직임이 가벼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성으로 대련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어제의 전투를 복기하듯이 평소보다 더욱 투지 넘치게 대련에 임했다.

“확실히 경험이 크다니까.”

< 제 26장. 반전의 시작.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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