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5장. 곤륜파의 사람들. -03 >
이름 대신 파풍(擺風)이라 불리는 노도인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 치고는 참으로 허무한 질문이어서였다.
“제, 젠장···.”
그 사실을 변양진도 뒤늦게 알아차렸는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결국 부귀영화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고향도 아닌 외딴 곳에서 죽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자업자득이었다.
터엉! 텅!
그리고 함께 온 한상혁에 비하면 그의 죽음은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적어도 깔끔하게, 고통 없이 죽었으니까 말이다.
“커헉!”
“어허! 아까 전의 그 패기는 어디 갔느냐! 패선을 때려잡겠다는 그 호기 말이다!”
“크흐읍!”
혈광도귀(血狂刀鬼)라 불리며 감숙성을 공포로 물들였던 신진고수 한상혁은 그 위명에 어울리지 않게 진구에게 두들겨 맞고 있었다.
피만 보면 미쳐서 달려든다던 그가 오히려 얼굴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연신 뒷걸음질쳤던 것이다.
‘자, 잘못 생각했다.’
단순하고 우악스럽지만 그럼에도 피할 수가 없는, 보이는데도 피하지 못하는 진구의 주먹질에 한상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보이는데도 피할 수 없다면 그건 오직 한 가지만을 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한상혁은 뒤늦게 깨달았다.
호법들은 허장성세를 부린 게 아니라 애초에 지치지가 않은 것이었다.
‘아무리 탈백강시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소림사를 비롯하여 강북 무림의 정예들마저 공포에 떨게 만든 게 바로 강시였다.
그런데 그 강시들을 곤륜파의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상대했다.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이대로는 위험해.’
여기까지 함께 왔던 변양진이 단 삼 초식에 싸늘한 시체로 화한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그였다.
그렇기에 한상혁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호법 한 명도 상대하기 버겁다는 사실을 말이다.
“잔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나.”
콰아앙!
노인의 주먹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솥뚜껑을 방불케 하는 진구의 정권 찌르기를 한상혁은 도신으로 가까스로 막아냈다.
그런데 권기 하나 서려 있지 않은 일권을 막았음에도 오히려 그의 애병에 잔금이 갔다.
도강으로 휩싸여 있던 그의 도가 주먹질 한 방에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롭게 변했던 것이다.
‘도, 도움을 청해야···!’
그 모습에 한상혁의 얼굴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애병의 상태로 보건데 앞으로 많이 버텨야 세 번을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충돌할수록 몸에 가해지는 충격의 강도 역시 중첩되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서둘러 빠져 나와야 했다.
‘빙마존과 백귀존은 도대체 뭘 하는 거지?!’
한상혁의 시선이 전방이 아닌 후방으로 향했다.
본대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왜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이제는 한눈까지 팔고. 역시 젊음이 좋긴 좋아.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가 넘치는 것을 보면!”
“켁!”
번개같이 복부로 파고드는 일권에 한상혁의 두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솟구쳤다.
그리고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백귀존과 빙마존은 끝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더불어 무명을 얻기 위해 달려들었던 사파인들 역시 빠르게 시체로 화하고 있었다.
“이런 녀석이 육귀라니. 다른 성에는 고수라 불릴 만한 무인이 별로 없는 모양이군.”
쩌저적!
손날에 부딪친 거패도가 손잡이만 남기고 산산이 조각났다.
결국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박살난 것이었다.
그리고 한상혁 역시 시커멓게 죽은 피를 토하며 바닥에 엎어졌다.
“수준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지. 괴물이 흔한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하죠.”
진구의 시선이 벽우진에게로 향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현존하는 가장 크고 강력한 괴물이 바로 벽우진이었으니까.
“다 들으셨을 걸?”
“제가 솔직한 성격이란 걸 알고 있으시잖습니까. 장문인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선은 지켜. 장문인이시기 전에 종주이시니까.”
“저도 잘 알고 있죠. 그런데 보아하니 안 달려들 것 같은데요?”
진구의 시선이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팔존들에게로 향했다.
탈백강시들도 모두 소비하고 이끌고 온 사파인들도 전멸한 상태였다.
즉 이제는 둘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간을 보는 것이지. 이길 수 있나, 없나. 허장성세가 아닌 것은 확인했고. 그리고 차륜전까지 사용했으니까.”
“역시 비겁하고 교활한 놈들답군요.”
진구가 주먹을 팡팡 부딪쳤다.
도인이자 무인인 그에게 강시는 존재해서는 안 될 마물이었다.
괜히 중원무림에서 강시가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래도 만만하게 보면 안 돼. 우리도 아예 안 지친 것은 아니니까.”
“저희가 지더라도 뒤에는 장문인이 있지 않습니까. 청민도 이제는 제 몫을 하고 있고.”
“그렇긴 하지.”
파풍의 시선이 제자들과 함께 있는 청민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그의 눈빛이 조금 묘했다.
한편 모두의 시선을 받고 있는 백귀존과 빙마존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무음살존의 죽음으로 둘 다 쉽지 않은 전투가 되리라고는 예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부딪쳐보니 곤륜파의 전력은 짐작했던 것보다 더 대단했다.
특히 호법들의 무위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내 생각에도.
백귀존은 머뭇거리지 않고 결단을 내렸다.
굳이 개죽음을 당할 필요는 없어서였다.
게다가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는 무인이기에 앞서 북해빙궁에 충성을 맹세한 전사였으니까.
휘이익!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내뺐다.
승산이 없다고 생각되자 망설이지 않고 도주를 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 없이 몸만 돌린 것은 아니었다.
둘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주했다.
“호오.”
혹시 모를 추격까지 예상하고 각자 다른 쪽으로 도주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벽우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음살존도 그렇고 여기까지 온 둘도 북해빙궁주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것 같아서였다.
저 정도 되는 무인들이 자존심을 꺾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상황판단이 빠르군요. 도망치는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더욱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예가 아닌 실리를 택하는 강자만큼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은 없으니까요.”
“저런 이들이 모여 있으니 중원의 반 가까이를 차지한 것이겠지요.”
설백이 상당히 놀란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팔존 씩이나 되는 인물들이 이렇게 쉽게 몸을 내뺄 줄은 몰라서였다.
“추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까요. 둘마저 여기서 죽으면 십존이 육존으로 쪼그라들 테고, 그러면 북해빙궁 입장에서는 너무나 큰 손해이니까요.”
“이대로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수는 없죠.”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전력을 다해 도망치는 둘을 차례대로 응시하며 벽우진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바닥을 나뒹굴고 있던 두 자루의 검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가장 가까이에 떨어져 있던 검 두 자루를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들어 올린 것이었다.
쌔애애액!
벽우진의 손짓에 따라 하늘 높이 솟구친 두 자루의 철검이 이내 허공을 맹렬히 갈랐다.
허공을 찢어발기겠다는 기세로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토해내며 한 줄기 섬광으로 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자루의 철검이 향하는 곳에는 바로 빙마존과 백귀존이 있었다.
“어후.”
손으로 직접 잡아서 던진 것도 아니고 허공섭물로 들어서 뿌려버리는 공격에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던 진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공력도 말이 안 되는 수준이지만 통제력 역시 상상을 초월했다.
보기에는 쉬웠지만 정말 어려운 기술이 바로 지금 벽우진이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두 팔존과의 거리는 빠르게 벌어지고 있었는데 벽우진이 날린 철검은 처음의 기세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날아가고 있었다.
흠칫!
그러는 사이 전력질주로 도주하던 백귀존과 빙마존도 철검의 기세를 알아챘다.
아니, 알아채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저렇게 살벌하게 날아가는데 팔존 씩이나 되는 고수들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콰앙! 쾅!
무지막지한 기세로 날아오는 두 자루의 철검을 두 사람은 피하지 않고 막았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기에 차라리 몸을 돌려 정면으로 막은 것이다.
그런데 굉음과 달리 신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은 벽우진을 똑바로 주시하는 채로 쭉 날아갔다.
“허어!”
“충돌로 일어난 반발력을 그대로 이용할 줄이야.”
호법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기습과도 같은 벽우진의 공격을 막아낸 것을 넘어 충돌로 인해서 발생한 반발력을 이용해 날아가자 자기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충격까지는 어쩔 수 없던 모양이었는지 둘 다 입가에 옅은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진기를 좀 더 때려 박을 걸 그랬나.”
“허어. 지금보다 더 강력하게 날릴 수 있으셨던 겁니까?”
“예. 검이 부서질까봐 진기를 조절해서 날렸는데, 좀 더 넣었어도 될 것 같았습니다. 충돌 직후 부서지도록 만들었으면 둘 다 사로잡을 수 있었을 텐데.”
벽우진이 진심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이 좋은 생각이 뒤늦게 떠올라서였다.
그러면서 그는 역시 아직은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허허.”
“역시 이런저런 경험을 좀 더 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추격하라고 지시할까요?”
“이미 늦었습니다. 저 정도 되는 고수들이 마음먹고 도주하는데요. 그리고 체력들도 신경 써야 하고.”
설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살아온 세월 덕분에 내력은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지만 노쇠화 된 육체는 아무래도 추격전을 펼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벽우진이 직접 움직여도 한 명을 잡는 게 고작일 터였고.
게다가 함정일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희박하기는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하오문의 정보를 맹신해서도 안 되고.’
어차피 북해빙궁과는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벽우진은 욕심을 버렸다.
만약 황하강에서 배를 탄다면 제아무리 그라도 쫓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거리가 조금만 더 가까웠어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영악한 녀석들이라 아마 도주도 생각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올 때는 저희 역시 더 강해져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요.”
벽우진은 조금의 아쉬움도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청민과 제자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쿨럭!
그런데 그때 청민이 검붉은 피를 토했다.
아직은 호신강기를 여유롭게 펼칠 수준이 되지 못했기에 검벽으로 탈백강시를 막았는데 그로 인해 미약하게나마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장로님!”
“난 괜찮다.”
“응. 정말 괜찮아. 조금 다친 것뿐이니까. 운기요상 며칠하면 금방 나을 거야.”
“맞습니다.”
걱정 어린 눈으로 다가오는 제자들을 물리며 청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벽우진의 말마따나 심하지 않은 내상이어서였다.
다만 바로 조치하지 않은 이유는 혹시라도 피를 토하는 자신을 보고 팔존이 달려들지는 않을까 싶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한 것이었다.
“그냥 토하고 유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저를 그렇게 이용하고 싶으신 겁니까?”
“이용하긴. 환경을 적절히 활용하는 거지. 그것도 다 전략전술 아니겠냐.”
“하아.”
“한숨 쉬지 마라. 복 달아난다. 너희들은?”
청민을 일별한 벽우진이 제자들을 살폈다.
그나마 경험이 좀 있는 서예지와 도일수가 선두에서 잘 막아주었기에 큰 부상을 입은 아이들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하지도 않았다.
각자 자잘한 상처가 상당했던 것이다.
“저희들은 괜찮아요!”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치 상처가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의연하게 대답하는 제자들의 모습에 벽우진이 씨익 웃었다.
아닌 척 하고 있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어서였다.
그래서 벽우진은 웃는 얼굴로 아이들의 어깨를 한 차례씩 두드려주었다.
< 제 25장. 곤륜파의 사람들.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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