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81화 (81/325)

< 제 25장. 곤륜파의 사람들. -02 >

벽우진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방금 전의 일격이 그 정도로 충격적이어서였다.

물론 할 수 없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렇게 무모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펼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일단 비효율적일뿐더러 낭비도 저런 낭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노물이야.”

“괜히 패선으로 불리는 건 아니라는 건가.”

“하지만 내공소모가 엄청났을 거야. 검기라고 해도 검도 없이 검결지로 뿌렸으니.”

“기선제압은 확실하지만, 글쎄. 앞으로도 잘 싸울 수 있을까.”

두두두두!

변양진과 한상혁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탈백강시들이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술법사들이 재차 탈백강시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러자 다시 한 번 곤륜산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벽우진의 손에 수백 구가 썰려 나갔음에도 여전히 탈백강시들의 숫자는 많았던 것이다.

“우리는 자리만 지키면 돼!”

“혹시 폭발할 것 같으면 미리 말해주고!”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바로 말해!”

양일우와 양이추 형제가 소리쳤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아이들과 진형을 구축했다.

며칠 밤낮을 새며 연습한 합격진을 펼친 것이다.

두 개의 소청검진을 합친 태청검진을 펼치며 아이들이 탈백강시들을 상대였다.

콰직!

그 중 가장 큰 활약을 펼치는 이는 단연 서예지였다.

첫 번째 제자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듯 서예지는 태청검진의 가장 선두에서 탈백강시들을 몰아붙였다.

첫 실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망설임 없이 탈백강시들을 베어버렸던 것이다.

스극! 극!

그 다음으로 활약을 펼치는 이는 의외로 도일수였다.

가장 많은 실전 경험 소유자답게 도일수는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간결하게 탈백강시들을 상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린 사형들과 사저들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력이야 충만하다지만 실전은 단순히 내력이 많다고 해서 살아남는 게 아니었기에 도일수는 서예지와 마찬가지로 가장 앞장서서 탈백강시들을 쓰러뜨렸다.

“밀어내!”

“억지로 쓰러뜨리지 마! 우리는 밀어내기만 하면 돼!”

“응!”

“알았어!”

노도처럼 달려드는 탈백강시들을 아이들은 제법 견고하게 막아냈다.

진형을 탄탄하게 구축하고서 탈백강시들을 상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숭산에서 탈백강시들이 몸을 폭사시켜 백팔나한진을 쓸어버렸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에 다들 긴장감을 풀지 않았던 것이다.

‘허허허!’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청민이 속으로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마냥 어리기만 보였던 아이들이 이제는 어엿한 무인의 모습으로 사문의 위기를 함께 막아내고 있자 그렇게 기꺼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흐뭇하게만 바라보고 있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언제라도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위치에서 탈백강시들을 쓰러뜨렸다.

‘만약 폭사한다면 내가 막아야 해.’

미래의 곤륜파를 이끌어갈 이들이 바로 이 아이들이었다.

또한 현재 곤륜파의 일대제자들이기도 했고.

그런 만큼 청민은 자신의 목숨보다 아이들의 목숨이 더욱 중요했다.

‘사형은 내 목숨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셨지만, 나와는 다르지.’

벽우진의 지원과 가르침으로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나 청민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다.

사실 지금의 경지만으로도 감지덕지하고 있었고.

하나 그렇다고 현재의 경지에 정체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더욱더 강해져야만 곤륜파 역시 강성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들이 걸어갈 길을 다져줘야 하기도 하고!’

늦게 시작해서 늦게 이룬 자신과 달리 아이들의 미래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창창했다.

그렇기에 청민은 생각했다.

자신이 먼저 길을 다져서 아이들이 맘껏 질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이다.

“그 길에 마물 따위가 있어서는 안 되느니라!”

퍼퍼퍼펑!

강맹한 일격에 청민 주위에 있던 탈백강시들이 터져 나갔다.

검세에 담긴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파괴당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한상혁과 변양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벽검이라 불린다고 하나 저 정도로 강해졌을 줄은 몰라서였다.

“터트려.”

“존명.”

소수인원이지만 제법 방어진형을 구축해서 잘 막아내고 있는 곤륜파의 모습에 말수가 적은 빙마존(氷魔尊)을 대신해 백귀존(白鬼尊)이 지시를 내렸다.

용케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커다란 구멍이 있는 한 곤륜파의 방어선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벽력탄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콰과과광!

이윽고 첫 번째 탈백강시가 폭발했다.

역시나 목표는 백귀존의 시선이 향해 있던, 아이들이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무모한 자신감은 결국 독이 되어 되돌아오는 법이지.”

“글쎄.  과연 그럴까?”

“음?”

연달아 폭사하는 탈백강시들을 무심한 눈으로 주시하며 중얼거리던 백귀존이 순간 눈을 부릅떴다.

마치 그의 말에 응답하듯 들려오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너희들은 아직도 우리를 만만하게 보고 있구나.”

“아니!”

손수 받아들인 제자들이 있던 장소에서 폭발이 일어났음에도 벽우진의 음성은 너무나 담담했다.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백귀존은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숫자가 적다고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여기 곤륜산에서 네 친구들이 무려 둘이나 뒈졌어. 우리를 얕잡아보다가 말이지. 그리고 오늘은 묏자리가 두 개 더 늘 예정이지.”

“모두 터트려!”

어린아이들 쪽에 있던 탈백강시들뿐만 아니라 다른 탈백강시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인간 벽력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죄다 달려들면서 육신을 터트렸던 것이다.

그 결과 사방팔방에서 폭발과 굉음이 터져 나왔다.

아예 산 전체를 날려버릴 기세로 탈백강시들이 터졌던 것이다.

투둑. 투두둑.

이윽고 장내가 뿌연 먼지구름으로 가득 찼다.

탈백강시들의 폭발로 주변이 초토화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후방에 있던 백귀존의 표정은 어두웠다.

분명 탈백강시들의 폭사는 위력적이었지만 확실하게 벽우진을 죽였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였다.

‘백팔나한진은 탈백강시들이 터질 거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거고. 곤륜파는 알고 있었으니까.’

처음 대면했을 때 백귀존은 진심으로 놀랐다.

벽우진도 벽우진이지만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호법들의 실력 역시 범상치가 않아서였다.

장문인이라는 벽우진과 다른 무공을 익힌 듯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자들이 없었다.

일대일이라면 승리할 자신이 있었지만 이대일이라면 힘들 정도라는 생각이 바로 들 정도였다.

‘어디서 저런 고수들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는 먼지구름을 주시하며 백귀존이 한숨을 내쉬었다.

탈백강시들의 숫자가 많다고 하나 그렇다고 모조리 날려버릴 정도는 아니었기에 백귀존은 손을 들어 사파인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생존자를 확인함과 동시에 공격 명령을 내리려는 것이었다.

“허어.”

근데 그때 빙마존이 묘한 탄식을 내뱉었다.

백귀존보다 먼저 그는 생존자를 확인했던 것이다.

“땅거죽을 이용했군.”

“저런 방법을 쓸 줄이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 조각들의 앞에는 깊게 파인 흔적이 있었다.

탈백강시가 폭발하기 직전 땅을 가격해서 한순간이지만 흙벽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게 폭발을 막아냈음을 한눈에 꿰뚫어본 두 사람이 옅게 감탄어린 표정을 지었다.

저런 식으로 탈백강시의 폭사를 막아낼 줄은 몰라서였다.

“가자!”

“공격해라!”

그때 빙마존과 백귀존을 따라 왔던 일백여 명가량의 사파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백귀존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발적으로 공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든 것은 절대 아니었다.

지금껏 탈백강시들을 상대하기도 했고, 폭사를 막아내느라 내공소모가 심할 테니 그 틈을 타 공격한 것이다.

“쯧쯧.”

즉 믿는 바가 있었기에 몸을 날린 것이다.

그런데 벽우진은 그런 그들을 보며 혀를 찼다.

나름 머리를 굴리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보는 눈은 없는 것 같아서였다.

그들은 왜 백귀존과 빙마존이 바로 움직이지 않았는지를 한 번쯤은 생각해 봤어야 했다.

“패선은 우리가 상대한다!”

“넘보지 마라!”

변양진과 한상혁이 메뚜기처럼 훌쩍 날아올랐다.

가장 빠른 움직임으로 오로지 벽우진만을 노리고서 쇄도했던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의 눈에는 야망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패선이라 불리는 벽우진을 잡고 중원에 자신들의 이름을 널리 알릴 생각으로 가득 찼던 것이다.

‘비어 버린 천하고수의 자리에 내 이름을 올린다!’

‘천하에 내 이름을 널리 알리리라!’

성격은 달랐으나 야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빛만큼은 똑같았다.

그러나 득달같이 벽우진에게 쇄도했으나 정작 그들의 검과 도는 벽우진에게 닿지 못했다.

따아앙!

청아한 소리와 함께 두 개의 인영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물론 단순히 가로막기만 한 건 절대 아니었다.

“흡!”

“크흠!”

충돌하는 순간 손목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에 두 사람이 똑같이 비틀거렸다.

손목에서부터 시작된 고통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그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두 사람은 네댓 걸음은 뒷걸음질쳐야 했다.

“아해들이 너무 제 주제를 모르는구나.”

“핏덩이들이 어딜 감히. 팔존이 와도 모자랄 판에!”

변양진과 한상혁을 튕겨낸 자리에 두 사람이 내려섰다.

단 한 번의 격돌로 안색이 달라진 둘과 달리 너무나 태연한 신색의 두 노인을 발견한 변양진과 한상혁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벽우진도 아니고 호법들의 등장에 기분이 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사라졌다.

‘둘을 쓰러뜨리고 곧바로 패선에게 간다!’

벽우진만큼은 아니었지만 곤륜파의 호법들 역시 명성이 상당했다.

패선이라 불리는 벽우진에게 가려 있어서 그렇지 호법들의 무명도 청해성을 넘어 중원까지 퍼져 있었기에 둘은 다소 아쉬움을 느끼기는 했으나 지금의 상황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패선을 잡기 전에 호법들로 몸을 푸는 것도 괜찮다 여긴 것이다.

“허어. 두 눈에 탐욕이 가득하도다.”

“그래 봤자 한낱 부나방에 불과합니다, 형님.”

“차합!”

두 호법이 지껄이거나 말거나 변양진과 한상혁은 달려들었다.

각자 앞에 놓인 노인을 향해 저돌적으로 짓쳐들었던 것이다.

특히 변양진은 쌍섬귀(雙閃鬼)라는 자신의 별호답게 무지막지한 쾌검을 펼치며 작고 호리호리한 호법을 향해 쌍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섬전과도 같은 그의 공격을 받아내야 하는 작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노인은 너무나 느리게 반응했다.

‘역시 소문이 과대평가 되었던 것이었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움직임도 움직임이었지만 노인이 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낡은 부채였다.

철선(鐵扇)도 아닌 나무로 만든, 더울 때 부채질을 하는 바로 그 평범한 부채를 천천히 들어 올리는 모습에 변양진은 득의 찬 미소를 지었다.

저 부채가 다 들려지기 전에 자신의 쌍검이 노인의 목과 심장을 꿰뚫을 게 분명해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텅. 텅. 푹.

“어?”

변양진의 두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분면 느리기 짝이 없던 움직임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의 쌍검을 튕겨낼 정도로 빨라졌다.

일순간 그의 육안에서 벗어날 정도로 말이다.

주르륵.

그리고는 어느새 자신의 심장을 찌르고 있는 낡은 부채를 바라보며 변양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후, 후발선제(後發先制)의 묘리인가.”

“알면서 왜 묻나.”

< 제 25장. 곤륜파의 사람들.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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