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4장. 무음살존(無音殺尊). -03 >
연막탄을 터트린 것과 동시에 지둔술을 펼친 무음살존은 쉴 새 없이 이동했다.
그런데 그가 향하는 방향은 놀랍게도 곤륜파가 자리 잡은 쪽이었다.
도망을 치는 척 하면서 허를 찔러 곤륜파로 나아갔던 것이다.
‘아마 꿈에도 예상하지 못하겠지.’
무음살존이 속으로 히죽거렸다.
자신을 찾기 위해 온 산을 헤집고 다닐 벽우진을 떠올리자 웃음이 절로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는 청민을 비롯해서 벽우진의 제자들을 모조리 죽일 생각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소중한 이들이 시체가 되어 벽우진을 맡아주도록 말이다.
‘그때가 바로 기회다.’
무음살존의 두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격돌한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정면으로 싸우면 자신의 필패라는 점을 말이다.
만나기 전에는 그래도 4할의 승산은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지금은 달랐다.
‘무조건 빈틈을 노려야 해.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어.’
소문은 과대평가되지 않았다.
오히려 축소된 감이 없지 않아 있을 정도로 벽우진이 뿌리는 기도는 예상 밖이었다.
그렇기에 충돌을 하자마자 연막탄을 터트린 것이었고.
하지만 죽이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들이 죽으면 사람은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지. 후후후.’
지금은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지만 청민과 제자들이 죽으면 제아무리 벽우진이라 하더라도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 터였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무음살존은 벽우진을 죽일 생각이었다.
아주 작은 틈만 있다면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게 살수였으니까.
‘승부는 경지가 높다고 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지. 결국에는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지. 처음에 날 죽이지 않은 걸 넌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거다. 사제와 제자들의 시체를 보면서 말이지.’
차갑게 식어버린 시체를 앞에 두고 울부짖을 벽우진의 모습을 상상하며 무음살존이 더욱더 빠르게 양손을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 그의 뒷골에서 찌릿한 감각이 솟구쳤다.
수십 년 동안 누적된 그의 경험이 경고를 보내왔던 것이다.
콰아앙!
무음살존은 본능이 알려주는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다.
지금껏 이 경고로 몇 번이나 사선을 넘긴 적이 있어서였다.
그리고 이번 역시 무음살존은 죽음을 가까스로 피해냈다.
“무, 무슨···!”
“피했나? 살수라서 그런가. 감각이 확실히 예민해.”
“어떻게 여기를!”
솟구치는 흙덩이와 함께 땅 위로 올라온 무음살존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너무나 놀라 몇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육성을 냈던 것이다.
“큼직한 두더지가 움직이는 게 느껴지더라고.”
“그럴 리가 없다!”
“인정하기 싫으면 하지 마.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 대신 목 위에 있는 건 내려놔라.”
피이잉!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벽우진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도 오른손은 여전히 뒷짐을 지고서 왼손 엄지와 검지로 지풍을 날렸던 것이다.
한데 건성으로 날리는 지풍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흡!”
전광석화처럼 뿌려지는 지풍의 세례에 무음살존이 반사적으로 철판교를 펼쳤다.
몸을 최대한 뒤로 젖혀 날아오는 지풍을 피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무음살존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궁리했던 것이다.
‘모습을 숨겨봤자 소용없어. 그렇다고 정면대결을 하면 승산이 없고.’
평소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회전했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습이 드러난 순간 이미 그의 열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망을 치자니 등을 보이는 게 너무나 위험했다.
또한 같은 수법에 벽우진이 당할 것 같지도 않았고.
‘결국 승부를 봐야 하는 건가.’
무음살존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장 피하고 싶은 선택지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방심하고 있는 지금 밖에 기회는 없다.’
무음살존의 시선이 여전히 뒷짐지고 있는 벽우진의 손으로 향했다.
오른손잡이인 벽우진이 왼손을 사용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오른손이 등 뒤에 있는 지금이 어쩌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 순간을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
‘정 안 되면 도망칠 틈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무음살존의 기세가 달라졌다.
있는 듯 없는 듯 흐릿했던 그의 존재감이 갑자기 폭발했던 것이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노도와도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죽음을 각오한 듯이 진기를 전부 끌어올린 것이다.
스이이익!
이윽고 역수로 쥔 두 자루의 단검에서 예리한 검강이 솟구쳤다.
하나 무서운 건 검강이 아니었다.
두 자루의 단검이 그리는 궤적이, 오로지 목숨을 끊는데 특화된 초식이 훨씬 더 위험했다.
오직 살인만을 위한 공격이 벽우진에게 쏟아졌던 것이다.
스슥. 슥.
사혈만을 노리고서 쇄도하는 무음살존의 공격을 벽우진은 가까스로 피해냈다.
조금만 삐끗하면 칼에 찍힐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회피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음살존의 공격은 두 자루 단검만이 아니었다.
두 다리 역시 벽우진의 하체를 노리고 쉴 새 없이 파고들어왔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걸리면 된다!’
체력소모가 극심했지만 무음살존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멈춘 틈을 타 벽우진이 반격할 거라는 걸 알았기에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기세를 탔을 때 승부를 봐야 했다.
죽이던지 아니면 치명상을 입히던지 말이다.
‘맞아라, 좀!’
무음살존이 이를 악물었다.
딱 한 번만 맞추면 되는데 그게 좀처럼 되지가 않아서였다.
얄미울 정도로 요리조리 피해내는 벽우진의 모습에 무음살존의 표정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체력과 공력은 빠르게 떨어지는데 정작 실속은 없어서였다.
‘이익!’
난도질하듯 뿌려지는 검초가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검강에도 벽우진의 옷은 조금도 베어지지 않았다.
자유자재로 늘어났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검강을 벽우진은 그야말로 완벽하게 피해냈던 것이다.
꿀꺽!
그 모습에 무음살존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이제는 승부수를 띄워야 하는 때가 왔음을 느낀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미루고 미룬 이유는 이 승부수가 진짜 마지막에만 펼칠 수 있는 것이어서였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지금껏 무음살존은 생환을 1순위에 두었다.
살행을 실패하더라도 일단은 살아서 돌아갈 것을 우선시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무음살존은 그것을 포기했다.
쌔애애액!
검강을 잔뜩 머금은 두 자루의 단검이 벽우진의 심장과 단전을 노리고서 벼락처럼 날아갔다.
공격하는 척하며 단검을 던졌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허리춤에 감싸놓았던 또 다른 애병인 묵사편(黙死鞭)을 번개 같이 꺼내서 벽우진의 허리를 노렸다.
“흡!”
설명이 길었을 뿐 세 개의 공격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무음살존은 덮치듯이 벽우진에게 달려들었다.
묵사편으로 벽우진의 허리를 감싸서 끌어당기고는 자신 역시 쇄도했던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공격에 벽우진이 살짝 당황한 사이 무음살존은 어느새 그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와 같이 가자!”
새하얀 검강이 서린 단검이 벽우진의 몸을 얇게 감싼 호신강기에 덧없이 튕겨나갔음에도 무음살존은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진짜는 따로 있었다.
단검은 그저 시선을 끄는 용도에 불과했다.
뻐어어엉!
단검이 튕겨져 나감과 동시에 무음살존의 몸이 폭발했다.
선천진기를 이용해 자신을 몸을 폭사시켜 벽우진과 동귀어진을 하려 한 것이다.
투둑. 투두둑.
무지막지한 폭발과 함께 주변에 짙은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그리고 하늘 높이 솟구쳤던 흙덩이들이 하나둘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흙덩이들과 돌멩이들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던 것이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정도로 충성심이 깊단 말이지.”
동귀어진을 선택할 정도로 어떻게든 임무를 수행하려 했던 무음살존을 떠올리며 벽우진이 걸어 나왔다.
그런데 지근거리에서 무음살존이 폭사했음에도 벽우진의 모습은 상당히 깔끔했다.
조금도 그을린 기색 없이 멀쩡하게 먼지구름 사이를 걸어 나왔던 것이다.
“흐음.”
멀쩡히 걸어 나왔지만 벽우진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십존 씩이나 되는 무인이 북해빙궁주의 명에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모습을 보자 다시 한 번 쉽지 않은 상대라는 걸 알 수 있어서였다.
더불어 아직도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북해빙궁주가 궁금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기에 무음살존 정도나 되는 무인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죽음을 선택하는지 너무나 궁금했던 것이다.
“찝찝하네. 손해만 본 것 같은 느낌이야.”
핏자국 하나 없이 오로지 폭발의 흔적만 남아 있는 주변을 둘러보며 벽우진이 입맛을 다셨다.
사로잡아서 이것저것 캐물어보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서였다.
십존이면 북해빙궁에서는 거물급 인사인데 말이다.
“어째 중원무림을 도와준 것 같기도 하고.”
벽우진이 찝찝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얕잡아 보인 것도 기분 나빴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빙화파산존에 이어 무음살존까지 처리했다.
십존 중 무려 둘을 그 혼자서 쓰러뜨린 것이다.
그리고 이건 중원무림에 있어 호재였다.
“제발 중원 쪽부터 정리하고 와라. 괜히 여기에 찝쩍대지 말고.”
북해빙궁의 주력이 온다고 해서 겁먹을 벽우진이 아니었다.
쳐들어오면 족족 깨부술 생각이었다.
그가 있는 한 또 다시 곤륜파가 무너지는 일은 없게 만들 테니까.
하지만 이왕이면 나중에,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에 왔으면 싶었다.
휘이이잉.
옅게 남아 있던 먼지구름이 한줄기 바람에 의해 모조리 날려가자 폭발로 인한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거대한 구덩이가 어느 정도의 폭발이었는지 여지없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벽우진은 그것을 잠시 지켜보고는 이내 몸을 돌렸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무음살존과 북해빙궁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푸드득!
북해의 동토를 닮은 새하얀 깃털의 백응이 허공에 유려한 선을 그리며 창문을 통과해 탁자 위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냉막한 인상의 중년인을 향해 척 하니 한쪽 다리를 내밀었다.
“고생했다.”
영리한 백응의 모습에 중년인이 평소에는 보기 힘든 옅은 미소를 짓고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육포 하나를 집어서 내밀었다.
삐익! 삑!
수고했다는 의미로 건네주는 육포에 백응이 기쁜 듯 뾰족한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교육이 잘 되어 있는지 이내 얌전히 서서 육포를 쪼아먹었다.
“흠.”
백응이 조용히 혼자만의 식사시간을 즐기고 있을 때 중년인은 발목에 있는 작은 통에 담겨 있던 서신을 꺼냈다.
그리고는 청해성에서 온 서신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상황이 썩 좋지 않은 모양이야.”
“···이틀 전부터 무음살존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다고 합니다.”
“죽은 모양이군.”
“그렇게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십존이 어느새 팔존이 되었음에도 여인의 표정은 담담했다.
중원을 침공했을 때부터 누군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 중에는 그녀가 포함될 수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 없다. 최종적으로 허락한 이가 바로 나이니. 다만 놀랍구나. 변방 중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그것도 몰락한 문파에 그 정도의 고수가 있다는 사실이.”
무표정한 여인의 두 눈에 미약하지만 호기심이 일었다.
곤륜파에 빙화파산존과 무음살존을 쓰러뜨릴 만한 무인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것이다.
더구나 두 사람의 유형은 극명하게 달랐기에 그녀는 더더욱 신기했다.
< 제 24장. 무음살존(無音殺尊). -03 > 끝
ⓒ 윤신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