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4장. 무음살존(無音殺尊). -02 >
크고 높은 나무들이 우거진 산 속에 하나의 인영이 소리 없니 내려섰다.
새로 지은 티가 역력한 곤륜파의 전각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흑의복면인이 나타났던 것이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두 눈뿐인, 심지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 체형의 인영은 한없이 깊은 눈동자로 곤륜파를 내려다봤다.
‘조사한 대로 인원이 별로 없군.’
앞서 그가 갔었던 화산파나 종남파, 그리고 소림사와 비교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적은 인원에 무음살존은 속으로 조소를 머금었다.
장문인과 호법들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소문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하나 그 무명도 오늘로서 끝이다.’
무음살존은 살법의 귀재였다.
수많은 암살을 통해 자신만의 살법을 이룩한 그는 자신이 있었다.
패선이라 불리는 벽우진을 죽일 자신이 말이다.
정면대결이라면 확실하게 죽일 자신이 없지만 암살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아무리 고수라도 심장과 머리에 칼이 박히면 죽는 건 똑같다. 독에 중독되는 것도 마찬가지고.’
절대고수도 사람이었다.
전설로 내려오는 불사신공을 익히지 않는 한 심장이 꿰뚫리고 목이 잘리면 죽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기에 무음살존은 벽우진을 처리하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문제는 죽일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이느냐였다.
‘우선은 하나뿐인 사제부터 죽이는 것으로 시작해볼까.’
벽우진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청민이었다.
근래 들어 벽우진의 가르침을 받아 무공이 일취월장하여 대벽검이라 불린다고 하지만 그래 봤자 그에게는 애송이나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류 근처에도 가지 못한 무인이 바로 청민이었다.
때문에 그는 살법의 시작을 청민으로 끊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수족들이 하나둘 죽어나가면 제 아무리 오만한 녀석이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지.’
사람은 강인하면서도 나약한 존재였다.
특히 주변인들이 자신으로 인해 죽음에 빠졌을 때 크게 흔들렸다.
제아무리 천하제일의 고수라고 해도 말이다.
‘궁주님의 명령 때문에 그 모습을 길게 즐기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임무가 먼저니까.’
무음살존은 아쉬운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즐거움보다는 임무가 먼저였고, 본궁의 앞날에 거치적거리는 게 있다면 최대한 서둘러서 치우는 게 맞았다.
스스슥.
생각을 정리한 무음살존은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그러면서 안력에 진기를 집중해 곤륜파 내부를 샅샅이 훑었다.
첫 표적인 청민은 물론이고 곤륜파 제자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벽우진이었다.
휘이이잉.
제법 시원하게 느껴지는 산바람을 그대로 타며 무음살존이 귀신 같이 움직였다.
일체의 소리도 없이 날랜 움직임으로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너뛰며 곤륜파 쪽으로 다가갔다.
자신의 기척을 알아챌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기에 무음살존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거리를 좁혀나갔다.
쉬이익!
주도면밀하게 나뭇가지로 가려진 음영 사이사이로 이동하던 무음살존이 순간 멈칫거렸다.
난데없이 그를 향해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날아와서였다.
툭.
반사적으로 이동을 멈춘 그의 앞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런데 그것을 본 무음살존의 두 눈은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떠졌다.
왜냐하면 발 앞에 정확히 떨어진 것은 바로 그의 용모파기였기 때문이다.
‘무, 무슨!’
제법 비슷하게 그려진 용모파기에 무음살존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자신의 용모파기가 있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그보다는 누군가가 그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방심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렇게 빨리 다시 올 줄은 몰랐는데. 확실히 내가 눈엣가시이기는 한 가봐?”
휙휙!
무음살존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위치 역시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영악하게도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서 육합전성(六合傳聲)을 펼쳤던 것이다.
스르륵.
그것을 파악한 것과 동시에 무음살존은 은신술을 극성으로 펼쳤다.
지금까지는 기척을 죽이는 것에만 신경 썼다면 이제는 아예 모습까지 감추었던 것이다.
그러자 마치 연기가 흩어지듯 무음살존의 모습이 허공에 녹아들었다.
“호오. 그게 은신술이라는 건가? 신기하기는 하네.”
다시 한 번 사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무음살존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보잘 것 없는 곤륜파에서 그나마 자신의 기척을 알아챌 만한 인물은 단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납득이 되는 건 아니었다.
같은 십존이라고 해도 그의 기척을 잡아낼 수 있는 이는 정말 소수였다.
그런데 벽우진이 그것을 해내자 무음살존은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일단은 상황부터 파악한다.’
무음살존이 차분히 가슴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놀라기보다는 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해야 했다.
또한 물러날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승부를 볼 것인지도 결정해야 했다.
‘물러나는 건 안 돼. 이미 내가 온 걸 알아챘으니 암습은 쉽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결정을 내린 무음살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계획했던 것과 달리 여기서 결판을 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일단은 위치부터 파악해야 한다.’
무음살존의 두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우선 벽우진의 위치부터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의 오감 역시 극도로 예민해졌다.
‘분명 이 근처에 있어.’
자신을 봤다는 건 달리 말하면 육안으로 보이는 곳에 벽우진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무음살존은 조급해하지 않고서 천천히, 그러나 꼼꼼하게 주위를 살폈다.
근처에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쌔애액!
그런데 그때 한줄기 날카로운 소성이 적막한 숲속을 갈랐다.
등 뒤에서 맹렬한 기세로 또 다시 무언가가 날아왔던 것이다.
‘어, 어떻게···!’
정확히 그가 있는 곳을 노리고서 쇄도해오는 무언가에 무음살존이 대경실색했다.
방금 전이야 기척만 죽이고 은신술을 펼치지 않았다고 하나 지금은 아니었다.
전력을 다해 은신술을 펼치고 있는데도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서 공격하는 모습에 무음살존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몸은 경악과 달리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피했다.
푹!
‘허!’
반사적으로 몸을 피한 무음살존이 이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곳에 초록색 나뭇잎 하나가 박혀 있어서였다.
절정에 달한 적엽비화(摘葉飛花)의 수법에 무음살존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 한 수만 봐도 벽우진의 경지를 새삼 느낄 수 있어서였다.
쌔애애액!
그러나 무음살존은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이번에는 다섯 개의 나뭇잎이 맹렬한 기세로 그를 향해 날아와서였다.
물론 무음살존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쇄도하는 적엽비화의 궤적을 파악하면서 날아온 방향을 읽으려 애썼다.
‘교활한 놈!’
하지만 벽우진도 만만치 않았다.
직선으로 날리면 자신의 위치가 탄로 난다는 것을 알았기에 다섯 개의 나뭇잎에 각기 다른 회전력을 실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도 방향을 어느 정도 읽을 수는 있겠지만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숨어 있는 거지? 분명 무인이라고 했는데···!’
날아오는 다섯 개의 암기를 피하며 무음살존이 분통을 터트렸다.
그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벽우진은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한데 지금은 살수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초조한 모양이야.”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의 귓전으로 다시 한 번 벽우진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벽우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끝끝내 벽우진은 머리카락도 그에게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스슥!
하지만 그건 무음살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끈질기게 기다렸다.
인내심은 그가 암살자의 길을 걸으면서 가장 먼저 습득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이런 싸움은 보통 누가 먼저 지치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었다.
‘예상치 못한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 상황을 유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음살존이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그와 달리 벽우진은 도인이자 무인이었다.
그런 만큼 초반에는 살수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한계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내 위치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
호흡을 최대한 죽이고 심장박동도 조절하며 무음살존이 주변을 탐색했다.
어떻게든 빨리 벽우진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집중하고 면밀히 살펴도 벽우진의 모습은, 기척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휘이잉!
무음살존이 최대한 기척을 감추고서 천천히 탐색하며 이동할 때 벽우진은 우거진 나뭇가지들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따로 은신술을 익히지 않았기에 벽우진은 가장 먼저 엄폐물부터 확보했다.
그런 다음 존재감을 없앴다.
뛰어난 살수인 무음살존이 시각에만 의존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아예 존재감 자체를 지워버렸던 것이다.
‘이런 방식도 재미있네.’
조심스럽게 사방을 탐색하며 이동하는 무음살존을 내려다보며 벽우진이 히죽 웃었다.
그가 어떤 심정일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않았다.
‘나에게나 쉽지 다른 사람들은 아니니까.’
청민은 물론이고 몇몇 호법들도 위험한 실력자가 무음살존이었다.
적어도 그의 실력만큼은 진짜였기 때문이다.
다만 벽우진과의 상성이 좋지 않았을 뿐.
“슬슬 끝내볼까.”
벽우진이 몸을 일으켰다.
무음살존을 잡아두면서 혹시나 다른 이들이 더 있나 살펴봤는데 더 이상의 적은 없었다.
진짜 무음살존 혼자 온 것이다.
그 사실을 확인한 벽우진은 가볍게 나뭇가지를 박차며 무음살존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파아앗!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파공성에 무음살존의 두 눈이 번뜩였다.
바람을 가르는 그 순간 벽우진의 위치를 파악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서 비침이 비산하듯 폭발했다.
피할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이 독침을 뿌린 것이다.
티티티팅!
그러나 날카로운 독침 중 벽우진의 몸에 닿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고고한 자세로 호신강기를 일으켜 무음살존의 독침들을 튕겨냈던 것이다.
퍼엉!
한데 그때 갑자기 벽우진의 발밑에서 새카만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독침을 날리면서 교묘하게 연막탄도 같이 던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무음살존의 신형 역시 사라졌다.
사위에 연기가 가득 피어오르기 무섭게 몸을 감추었던 것이다.
“독연인가.”
맡지 않아도 느껴지는 기분 나쁜 끈적끈적한 연기에 벽우진이 미간을 좁히며 손을 휘저었다.
역시나 암살자답게 온갖 얍삽한 방법은 다 쓰는 것 같아서였다.
잠시 후 연기가 가라앉았으나 예상했던 대로 무음살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독연을 터트리고 감쪽같이 모습을 숨긴 것이다.
“흐음.”
그런데 무음살존을 놓쳤음에도 벽우진은 그리 다급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나간단 말이지?”
의미심장한 얼굴로 중얼거린 벽우진이 땅을 박찼다.
< 제 24장. 무음살존(無音殺尊).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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