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77화 (77/325)

< 제 24장. 무음살존(無音殺尊). -01 >

벽우진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다.

강북 무림의 잔당을 뒤쫓고 있으면서도 곤륜파를 신경 쓴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여력이 있다는 사실에 벽우진은 북해빙궁의 전력을 조금 더 상향평가 했다.

“선발대요? 설마 북해빙궁입니까?”

“응. 아무래도 이 녀석 같은데. 기척을 숨기는 게 기가 막힌 걸 보면.”

툭.

벽우진은 아홉 장의 용모파기 중 한 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러자 청민과 서예지의 시선이 벽우진의 손가락 끝으로 향했다.

“확실히 이 자라면 홀로 움직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네요.”

“자신도 있었겠지. 이 정도의 기술이라면 웬만한 고수들은 죽음을 느끼지도 못한 채 죽었을 테니까.”

“호법님들을 부를까요?”

“그럴 필요까지야. 단 한 명뿐인데. 그리고 대호법님도 눈치채셨을 거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

“혼자 가시게요?”

서예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빙화파산존을 때려잡았다고 하지만 지금 본 서신에 의하면 십존이라고 해서 다 엇비슷한 게 아니었다.

무공의 고하(高下)가 명백했기에 서예지가 조금 걱정 어린 눈빛으로 벽우진을 바라봤다.

“나를 만나는 게 영광이지. 언제 또 나만한 고수를 만나보겠어? 안타깝게도 이번이 처음이겠지만. 그리고 이 녀석 놓치면 골치 아파져. 방심하고 있는 지금 처리해야 해. 겸사겸사 구존을 팔존으로 만들 필요도 있고. 아직 강북 쪽을 다 점령하지 않았는데도 구존을 보냈다는 건 어떻게든 우리와 끝장을 보겠다는 소리이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게 방해하는 거라니까.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왔다는 초대장의 답장이나 적고 있어. 괜히 경내의 분위기 망치지 말고. 얼마 걸리지 않을 테니까.”

“정말 괜찮으신 거죠?”

“내가 먼저 눈치 깐 거 보면 몰라? 그리고 여기는 내 구역이야. 곤륜산이 내 꺼라고. 즉, 내가 왕이라는 말이지.”

벽우진이 살짝 경박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청민이나 서예지에게는 너무나 믿음직스러운 미소였다.

“하긴. 사형께서는 패선이시지요.”

“영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쨌든 보고 있어. 주변 정세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니까. 상황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게 현실이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예지는 청민을 좀 도와주고.”

서예지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런 그녀의 몸가짐에는 우아함과 기품이 깊게 서려 있었다.

“예, 사부님.”

“그럼 이따 보자고.”

벽우진이 창문을 통해 바람처럼 사라졌다.

“괜찮으시겠지요?”

“사형께서 괜찮다 하시니, 괜찮을 것이다. 짓궂은 농담을 자주 하긴 해도 빈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시니까.”

“그렇긴 한데···.”

서예지의 시선이 용모파기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냉막한 인상의 중년인이 하북성에서 어떤 이들을 살해했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 거라. 상대해 볼만 하니까 나서신 것일 게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답장을 언제 다 쓸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구나.”

곤륜파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세인들에게 거론될수록 벽우진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늘어났다.

어떻게든 안면을 터서 줄을 대고자 했던 것이다.

강호에서는 힘이 곧 정의였고, 법이었으니까.

물론 무력이 전부인 것은 아니지만 무명이 높고 고수라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본산제자가 되는 것에 대해 문의하는 곳은 단 한곳도 없지.’

앞으로가 기대되지만 언제라도 다시 망할 수 있는 문파.

그게 세인들이 바라보는 곤륜파의 모습이었다.

아직은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게 더 많아서 벌어진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 인식이 곧 달라질 것이라 청민은 장담할 수 있었다.

‘사형의 무위는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게 훨씬 더 크니까.’

청민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경지가 높아지면서 그는 벽우진의 실력을 점점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무인인지, 벽우진이 이룩한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희미하게나마 가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확신했다.

벽우진으로부터 곤륜파는 재건될 것이며 다시 한 번 비상하리라고 말이다.

‘어쩌면 과거 이상의 성세를 이룩할지도.’

청민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는 사이 서예지는 문방사우를 준비했다.

맡기고 간 일이, 업무량이 적지 않았기에 부지런히 해야 했다.

크고 작은 선박들이 황하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각기 다른 배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마치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의 사람들을 빼곡히 싣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시체인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서 있는 수십, 수백 명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시체처리조가 된 거 같은데.”

“영 틀린 말은 아니지. 썩기 전에, 바스러지기 전에 사용해야 한다고 하니까.”

“빙혼강시들은 냉기 때문에 그런가. 썩은내도 전혀 안 나던데.”

“탈백강시는 급조하듯 만든 거니까.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깝지. 이거 만드는데 돈 엄청 들어간다고 하던데.”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장정 둘 중 한 명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가냘픈 체구는 남자다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리여리하다고 만만하게 봤다가 이 세상을 하직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만한 가치를 하니까. 난 진짜 숭산에서 그거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

“나도. 탈백강시를 그렇게 사용할 줄은.”

“소림사가 자랑하던 백팔나한진이 그거 한방에 훅 갔잖아. 그 모습이 얼마나 시원하던지.”

옆에 서 있던 깡마른 체구의 남자가 통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정파인들의 눈치만 봤었는데 그들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소림사가 무너지자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소림사 땡중들을 잡을 때의 손맛은 아직까지도 생생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천하의 소림도 영원하지는 않은 거지. 다들 그렇게 믿었던 것일 뿐.”

“그러니까. 진짜 소림이 무너질 줄이야. 방장이 옥쇄를 하고. 근데 비급들을 챙기지 못한 게 아쉽네. 칠십이종절기 중 하나라도 손에 넣었다면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갈 방도를 찾았을 지도 모르는데.”

“뒤지고 있으니 곧 찾지 않을까 싶은데. 어쨌든 소림사의 땡중들은 본산을 버리고 도주 중이니까.”

“무림맹이 결성된다는 말도 있어.”

최근 들어 악명을 떨치며 당당히 육귀(六鬼)에 꼽힌 변양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육귀의 일인인 한상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 들은 바가 있어서였다.

“나 역시 들었다. 그런데 너무 늦었어. 이미 기둥의 반이 무너졌는데.”

“그래도 긴장해야 해. 정파 놈들이 얼마나 끈질기고 지독한지 알고 있잖아.”

“끊임없이 저항하겠지. 그게 정파 놈들의 특성이니까. 하지만 대세를 거스르기가 쉽지 않을 거야. 강남 쪽은 오독문 애들로 정신없고.”

“사천당가가 그렇게 냉정하게 연을 끊을 줄이야. 근데 그 선택이 자기들에게 독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무당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사천당가인데. 우리가 곤륜파로 가는 것처럼.”

변양진이 끌끌거렸다.

자존심과 고집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생존이었다.

특히 사천당가의 경우 홀로 싸우다가 큰 피해를 입고 봉문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사천당가는 그 사실을 잊은 듯 또 혼자서 싸우려는 듯이 행동했다.

“배신감이 그 정도라는 뜻이겠지. 사실 나 같아도 더럽고 꼴 보기 싫어서 손 안 잡겠다.”

“그러다가 몰살하면? 죽으면 무슨 소용이야?”

“장원 자체가 요새화되어 있는 가문이 사천당가이니 해볼 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아니면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받아주거나.”

“매달리는 모양새가 되면? 근데 반대로 무당산에 집결한 이들이 오독문을 몰아내면? 그러면 상황이 아주 이상해지잖아? 옹졸하기 짝이 없는 정파 놈들이 사천당가의 행태를 잊을 리가 없고.”

변양진이 키득거렸다.

그로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재미있었으니까.

“그럴 여유까지는 없을 걸. 오독문이라는 문제를 해결해도 북해빙궁이 있으니까.”

“근데 독강시가 있어서 만만치는 않을 거야. 그나저나 우리 궁주님께서는 곤륜파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시나 봐. 무려 두 분이나 이곳에 배정하시다니.”

“정확한 건 아닌데, 한 분이 더 계시다는 말도 있다.”

“뭐라고?”

변양진이 화들짝 놀랐다.

두 명만 해도 과하다고 생각하는데 무려 한 명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나 놀란 것이다.

그 모습에 한상혁이 더욱 작게 입을 열었다.

“확실한 건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고.”

“곤륜파를 너무 높게 상정한 거 아냐? 검제(劍帝)가 있던 화산파도 단 두 분만 보내셨는데.”

“빙화파산존이 당했기에 이번에는 확실하게 마무리 짓고 싶으신 모양이지.”

“사실 난 여기 있는 탈백강시들만 올려 보내도 반나절 안에 결판이 날 것 같은데. 아무리 날고 기는 고수라 한들 패선도 결국 사람이잖아? 쪽수에는 장사 없는 법이야.”

변양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무리 패선의 무위가 대단하다고 하나 그래 봤자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 대단하다던, 중원무림에서는 신성시되던 소림사도 결국 물량공세에 무너졌고 말이다.

“나도 같은 생각인데, 별 수 있나.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우리 솔직해지자고. 다 공을 쌓아서 눈도장을 찍으려는 거 아냐? 어떻게든 패선의 모가지를 따려고 말이지. 근데 앞장서려는 녀석은 없을 걸? 빙화파산존을 일대일로 쓰러뜨린 건 사실이니까.”

“그렇지.”

한상혁만 하더라도 먼저 나서서 패선을 상대할 마음은 없었다.

요즘에 그가 육귀에 포함되며 악명을 날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감히 십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물론 나이를 생각하면 그 역시 십존만큼, 어쩌면 그 이상 강해질 가능성은 있었다.

허나 중요한 것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래도 놀랍긴 하네. 변방에 그 정도 고수가 있다는 게.”

“북해빙궁도 세외의 세력이다. 변방은커녕 오지 출신이라고.”

“그것도 그러네. 근데 난 좀 아쉽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는데 정작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서.”

변양진이 허리를 튕겼다.

정확하게는 하물을 앞뒤로 움직였던 것이다.

그 행동에 한상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허리 좀 그만 튕길 수 없나?”

“에이. 같은 남자끼리 그러지 말자고. 넌 계집 안 좋아하나?”

“흥.”

“뭐, 이해는 가. 민심을 잡아야 하니까. 근데 좀 아쉽다 이거지, 내 말은.”

“대신 무가(武家)나 방파들은 마음대로 해도 되잖아? 그런데 아쉬울 게 뭐가 있어.”

한상혁이 혀를 찼다.

냉정하게 따지면 북해빙궁의 선택이 옳았다.

괜히 일반 양민들을 건들면 관부가 움직일 게 분명했으니까.

무림인들의 일은 무림인들 손에서 끝나는 게 맞았다.

“내가 꿈꾼 세상은 더 막장이었거든. 크크큭!”

“대신 곤륜파에는 청해일미가 있잖아.”

“아마 그것 때문에 가는 녀석들도 적지 않을 걸. 계집에 환장한 애들이 한둘이냐고.”

“너를 포함해서.”

변양진이 키득거렸다.

그런 그의 두 눈에는 음욕이 짙게 서려 있었다.

단지 청해일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하물이 뻐근해져왔던 것이다.

정작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지는 아닌 것처럼 말한다?”

“얼른 도착했으면 좋겠군. 손이 근질거리네.”

“다른 데가 근질거리겠지. 흐흐흐!”

황하강물을 바라보는 한상혁을 쳐다보며 변양진이 음흉하게 웃었다.

그러나 한상혁은 능글맞은 변양진의 말에도 강물로 시선을 옮겼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가르며 배는 묵묵히 서쪽으로 나아갔다.

< 제 24장. 무음살존(無音殺尊).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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