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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76화 (76/325)

< 제 23장. 내 구역이다. -02(3권 끝) >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숭산에서 얼마나 많은 숫자의 탈백강시들이 나타났는지는 보고를 받아서 알았다.

그리고 막판에 그것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도.

“그럴 테지. 아무리 축적한 재화가 많더라도 한계가 없을 수는 없으니까. 더구나 다른 곳도 아니고 그 척박한 동토의 북해이니.”

“속전속결로 끝을 보려는 것일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점령한 성들에서 끌어 모은 재화도 상당할 것이야. 그러니 그 부분도 간과해서는 안 되지.”

“계속 주시하겠습니다.”

옥쇄를 각오한 것처럼 싸우고 있다는 소식 이후 새로운 정보는 없었다.

둘 다 피해가 엄청났던 만큼 일시적인 고착화 상태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오래 가지 않을 터였다.

전력을 추스른 후 2차전이 벌어질 게 자명했다.

“그나저나 이해가 가지 않는단 말이지.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그렇게 빨리 강해진 거지?”

“대벽검 청민 장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도 그렇고, 얼마 전에 들어온 곤륜파의 제자들. 특히 청해일미. 서예지는 내공심법을 익히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무공에 입문한 건 얼마 되지 않았어. 그런데 파악한 바에 의하면 최소 초일류 이상이야.”

“그 정도나요?”

양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주안술을 주력으로 익히고 있다 하나 그녀 역시 무인이었다.

비록 경지는 높지 않았어도 웬만한 이류무사는 가지고 놀 정도는 되었다.

한데 열여덟 밖에 되지 않은, 그것도 정식으로 무공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은 서예지의 무경이 자신을 가뿐히 뛰어넘는다고 하자 믿기지가 않았다.

“나도 놀랐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특히 비밀이 너무 많아. 알려진 것이 빙산의 일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톡톡톡.

설향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녀가 깊은 상념에 빠질 때마다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추측을 하려고 해도 알아낸 정보가 너무 적었다.

‘장문인은 물론이고 호법들의 무공 수위 역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 대충 절정 이상이라고만 짐작할 수 있을 뿐.’

상대했던 모든 이들이 대부분 죽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이가 대호방의 부방주였기에 최소 부방주 이상이지 않을까 짐작하는 게 전부였다.

“확실히 비밀이 많긴 해요. 신비로운 분위기는 절대 아니지만요.”

“그게 더 무서워. 종잡을 수가 없는 성격이니까. 게다가 다른 제자들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어. 단순히 무재가 뛰어나다고 해서 가능한 수준이 아냐. 그렇다고 그 나이에 벌모세수를 해줬을 리는 없을 테고. 낭비이기도 하지만 그럴 만한 여력이 없지. 멸문 직후라면 모를까 지금의 곤륜파는 아직 수익이 크게 들어오는 수준이 아니니까.”

“사천당가 쪽을 파보는 게 어떨까요? 단순히 친분 때문에 사천당가의 기술자들이 성도를 벗어나 곤륜산까지 올 리는 없으니까요.”

“천하의 그 사천당가를 상대로 말이냐? 그 고집쟁이들에게서? 당가타도 겨우겨우 들어가는 상황인데.”

설향이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보면 하오문보다 더 폐쇄적인 집단이 사천당가였다.

그런 만큼 사천당가를 들쑤시는 건 제아무리 하오문이라도 부담스러웠다.

“분명 무언가가 있는 것 같기는 해요.”

“그러니까. 혹시 영초라도 구했나? 영물을 잡았다던가.”

“영초나 영단은 씨가 말랐잖아요. 공청석유는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렸고요.”

“진짜 연단가도 없지. 죄다 사기꾼들만 있으니.”

양선이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사기꾼들의 대부분이 바로 하오문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설향은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도 없으니.”

“물어볼 수는 있지. 눈치껏. 다만 대답해주느냐 안 해주느냐가 문제지.”

“의외로 말해줄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글쎄다. 내가 보기에는 역정부터 낼 것 같은데. 자기 사람에 대한 애착이 보기보다 심한 사람이라.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 정도까지 관계진척이 되지는 않았고.”

설향은 상황을 냉정하게 주시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예 끈끈한 사이는 아니었다.

서로 언제라도 등을 돌릴 수 있는 사이.

이게 가장 정확한 표현이었다.

“일단 알아볼 수 있는 데까지는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해다오. 어쩌면 이번 비밀로 인해 우리도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설향은 본능적으로 촉이 왔다.

곤륜파에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반드시 알아내고 싶었다.

아니면 벽우진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거나.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나가 보거라.”

“예.”

양선이 공손히 인사한 후 방을 나서자 이내 고요한 적막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적막감을 설향은 즐겼다.

홀로 조용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였다.

“시기가 멀지 않은 듯해.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만약 소림이 무너진다면 균형의 추는 더욱더 기울어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보면 절대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고.

때문에 설향은 최악의 상황도 떠올렸다.

“복속이냐, 저항이냐를 고를 때가 오겠지. 안 오면 좋겠지만···.”

설향의 시선이 곤륜산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물론 서녕에서 곤륜산이 보일 리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눈에는 곤륜산이 떠올라 있었다.

“한 사람이 천하를 지배할 수도 있는 게 무림이기도 하지.”

역사적으로 천하제일인이라 불린 인물은 의외로 그리 많지 않았다.

세상에 강자는 많고 은거고수 역시 모래알처럼 많아서였다.

하지만 천하제일인이라 인정받는 이가 나타났을 때는 정말 전 중원이 평정되었다.

모든 무인들이 단 한 명을 우러러 봤던 것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

고개를 저은 설향이 다탁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자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하들이 한 아름이나 되는 보고서들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잠시 동안의 상념을 끝내고 다시 업무를 시작한 것이다.

늘 그렇듯이 벽우진은 의자에 비스듬히 눕듯이 앉아 하오문에서 보내온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서신이라기보다는 보고서에 더 가까울 정도로 양도 많고 내용도 다양했지만 벽우진은 지겨워하지 않고 천천히 읽었다.

집무실에서 세상 굴러가는 소식을 보는 것도 의외로 쏠쏠한 재미가 있어서였다.

게다가 서신에 중점적으로 적힌 내용이 바로 현재 숭산의 상황이었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실시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오문의 역량을 생각하면 시차가 길어야 하루 정도일 터였다.

“강시벽력탄이라. 이건 생각지도 못한 방법인데.”

탈백강시가 일제히 폭발하며 무인들을 쓸어버렸다는 말에 벽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더럽고 끔찍해서였다.

더불어 주검을, 무인을 모욕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껴둔 것이겠지.”

일반 양민이 아닌 무인들로 만들어진 탈백강시는 생전에 지니고 있던 능력에 따라 폭발력이 다르다고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보며 벽우진은 다시 한 번 북해빙궁의 강시술이 상당한 수준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방식을 동조하거나 이해하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정당한 방법은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숭산이 날아갔단 말이지. 방장과 백팔나한, 팔대호법이 같이 옥쇄하고 생존자들은 두 무리로 나눠져서 남쪽과 동쪽으로 향했다라.”

벽우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북해빙궁은 그 일을 진짜로 해냈다.

소림사를 밀어내고 숭산을 차지했던 것이다.

“동쪽으로 향하는 이들은 남궁세가겠군. 안휘성이 동쪽에 있으니. 소림사와 나머지 무문들은 무당으로 향했을 테고.”

짐작한 그대로 이어지는 보고서의 내용에 벽우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그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사형. 접니다.”

“저도 왔습니다, 사부님.”

“들어 와.”

벽우진의 허락에 문이 열리며 청민과 서예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둘의 등장에 벽우진은 여전히 앉은 채로 의자를 향해 손짓만 했다.

“나중에 다시 올까요?”

“그럴 필요까지야. 어차피 너희들도 알아야 하는 내용들인데. 여기까지 봐봐. 난 거기까지 봤으니까. 보고는 이걸 다 본 이후에 하자고.”

“예.”

자신이 본 것까지를 벽우진이 청민에게 넘겼다.

그런데 내용을 본 청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상황이 하필이면 최악으로 치달고 있음을 알고 있어서였다.

“왜 그러세요?”

“읽어 보거라.”

“으음!”

심각해지는 청민의 표정에 조심스럽게 물었던 서예지가 이내 서신을 건네받고는 침음을 흘렸다.

소림사가 숭산을 빼앗겼다는 말에, 방장이 죽고 소림제일고수이자 삼제(三帝)의 일인인 소림무제가 치명상을 입고 남쪽으로 도주 중이라고 하자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삼왕칠성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사분오열 되어 더욱 위험한 상황이었다.

“진짜 소림사가 무너질 줄이야···.”

“방심한 대가지. 아마 곧 무림맹을 결성하지 않을까 싶다. 근데 우리는 걔네들 걱정할 때가 아냐.”

“혹시?”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이곳으로 올 가능성이 높아. 정확하게는 우리를 노리고서 말이지.”

강호의 모든 문파가 원한을 잊지 않는 건 똑같았다.

하물며 곤륜파만 하더라도 과거의 배신을 이유 삼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철저히 외면하지 않았던가.

북해빙궁 역시 빙화파산존의 죽음을 빌미로 들어 청해성을 공격해 올 것이었다.

“다들 대비는 하고 있습니다. 또한 호법님들 역시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요.”

“필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 중입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요.”

“걱정은 안 해도 돼. 엄청 튼튼해졌을 테니까.”

다른 이도 아니고 그가 직접 비천단을 소화시키도록 도와주었다.

게다가 다른 당가의 식솔들과 달리 훨씬 더 꼼꼼하게 신경 써 주었기에 단순히 몸 상태만 보면 청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역시 선견지명이 있으십니다.”

“선견지명은 무슨.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고자 어떻게든 잔머리를 굴린 거지. 그리고 이렇게 전심전력으로 도와줄 줄은 나도 몰랐고.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간사한지 잘 알잖아? 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게 인간이니까.”

“저는 아깝지 않은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준비는 철저히 해야 해.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 북해빙궁은 중원의 절반을 차지한 곳이야. 피해가 크긴 하지만 강시들의 존재를 잊어선 안 돼.”

“저뿐만 아니라 다들 명심하고 있습니다. 호법님들도 긴장을 풀지 않은 상태고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벽우진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서신과 함께 보내진 아홉 장의 용모파기를 확인했다.

하오문이 목숨을 걸고 알아낸 구존의 얼굴들이었다.

“아, 사형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 귀는 열려 있으니.”

“청하상단과 비호표국을 통해서 사형께 이런저런 초대장이 많이 옵니다.”

“초대장?”

빙화파산존을 제외한 구존의 얼굴과 지금까지 알아낸 특징에 대해 정독하던 벽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난데없이 초대장이 왔다고 하자 의아했던 것이다.

“예. 지역 유지부터 새로이 탄생한 무문들. 그리고 청해표국연합과 상단연합에서도 자리를 한 번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속내가 너무 훤히 보이는데.”

“지역 유지들 같은 경우는 선대와 알게 모르게 연이 닿아 있으니 가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돈 구해오라 이거지?”

청민이 허허 웃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의미는 충분했다.

비호표국과 청하상단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고 하나 아무래도 성장과 함께 투자도 하는 만큼 실질적으로 곤륜파에 들어오는 금액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다익선이라는 말처럼 돈은 많아서 나쁠 것이 없었고.

“얼굴 정도는 익혀도 되지 않겠습니까. 정 불편하시면 제가 청범과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사형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곤륜파의 장로이지 않습니까.”

“뭐, 그것도 괜찮지. 네 얼굴도 알릴 겸. 이제는 일개 무인이 아니라 대벽검이라 불리니까. 정 뭣하면 진 호법을 함께···. 뭐야?”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말을 끊으며 눈썹을 꿈틀거리는 벽우진의 모습에 청민은 물론이고 서예지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도 표정이지만 눈빛이 한순간에 달라져서였다.

“이거이거, 아무래도 선발대가 온 모양인데? 단 한 명이긴 하지만. 근데 배짱이 두둑한데. 내 구역에 홀로 온 것을 보면.”

< 제 23장. 내 구역이다. -02(3권 끝)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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