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75화 (75/325)

< 제 23장. 내 구역이다. -01 >

“그, 그게 무슨···.”

“거짓말 같으면 한 번 직접 알아 봐. 어차피 곧 알려질 소문이니.”

“정말입니까?”

“내가 너한테 거짓말해서 뭐해? 내게 뭔 이득이 있다고?”

목진자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벽우진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어서였다.

하지만 사실임이 분명할 텐데도 목진자는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소림사가 어떤 곳이던가.

중원무림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지만 수백 년 동안 고고히 제 자리를 지켜왔던 대문파가 소림사였다.

그런데 그 소림사가, 심지어 남궁세가를 비롯한 명문대파들이 집결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반이 날아갔다고 하자 목진자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청하상단과 비호표국 말고는 딱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 텐데?’

목진자가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근래 들어 청하상단과 비호표국이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며 청해성을 주름 잡고 있다 하나 그래 봤자 한 개 성 안에서 만이었다.

중원 전체로 보면 두 곳의 영향력은 극히 미비했다.

또한 정보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도 없었고.

‘사천당가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는데.’

대외적으로 사천당가가 유일하게 우호적인 곳이 곤륜파였다.

하나 사천당가는 독과 암기, 기관 쪽이 유명하지 정보력은 다른 곳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물론 사천성에서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그것도 봉문 전의 이야기지 지금은 아직 그 정도까지 회복한 상태는 아니었다.

‘혹시 다른 곳과도 손을 잡은 건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목진자의 머리가 팽팽 회전했다.

지금의 정보는 어떻게 보면 벽우진이 돌려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곤륜파는 무력뿐만 아니라 정보력도 갖추었다고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섬서성으로 가 봐. 같은 처지끼리 뭉치면 좀 낫지 않겠어?”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할 거 없다니까. 그냥 나는 내 갈 길 가고, 너희는 너희 갈 길 가면 되는 거야. 어차피 인생은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거잖아? 그러니 우리는 각자 갈 길 가자고.”

“장문인.”

“내가 허락하는 건 여기까지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말라고. 이 이상은 나도 참지 않을 거니까.”

느물느물 거렸던 벽우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언제 농담을 했냐는 듯이 그의 전신에서 삼엄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며 좌중을 압도했던 것이다.

“자, 장문인. 제발 다시 한 번만···.”

“난 더 이상 할 말 없으니 이제 그만 나가보도록.”

“후우···.”

단호한 벽우진의 축객령에 목진자는 결국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더 있어 봤자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였다.

일말의 동정심도 담겨 있지 않은 투명한 눈빛에 목진자는 이내 속가제자들을 이끌고서 접객당을 나섰다.

그러나 누구 하나 산문으로 걸어가는 그들을 불쌍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자업자득이었으니까.

“어때? 기분은.”

“시원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복잡하네요. 그냥 소식으로 들었을 때는 통쾌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저 꼴을 보니 옛날이 떠오릅니다.”

“네가 혼자 사문을 지키고 있을 때?”

“예.”

문이 열리며 청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옆방에 있던 그가 벽우진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래도 인원이 있으니 다시 일어서겠지. 우리 때와는 상황이 좀 다르잖아?”

“훨씬 낫죠. 제가 있었을 때는 여기 전체가 다 불탔으니까요. 무공서고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다 불태웠고요. 하지만 적어도 본파는 구걸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거야 고리타분한 고집 때문이지. 막말로 무인보다는 도인에 가까웠던 분들이니까.”

“그러면서도 신의와 협심을 지니고 계셨죠.”

청민이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어른들은 너무나 멋지고 의로운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닮고 싶은 이들이기도 했고.

“그건 인정. 내가 그래서 많이 고민한 거 아냐. 내 성격상 그렇게 사는 건 불가능하니까.”

“저는 지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퍼주기만 하면 호구가 되니까요.”

“준 것 이상 받아내야지. 그래서 내가 열심히 작업 치고 있는 거 아냐.”

“피독주 말인가요?”

“물건도 물건이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 자고로 인재는 많아서 나쁠 게 없어. 내가 요즘에 새삼 그 말을 절감하고 있잖아.”

곤륜파가 성장하는 만큼 벽우진의 할 일 역시 비례해서 늘어났다.

장문인인 만큼 그가 결정해야 할 일들이 수두룩했던 것이다.

물론 서예지가 도와준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 곤륜파에는 사람이 부족했다.

“요즘 사람이 부족한 것 같기는 하더라고요. 인력을 뽑고 있기는 한데 중요한 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는 것이죠.”

“너도 아직 제 몫을 다 못하고 있고.”

“대신 대벽검(大壁劍)이라는 별호를 얻지 않았습니까.”

“무인으로서는 한참 멀었어. 장로로서의 업무능력 역시 기준 이하고.”

“크흠!”

통렬한 지적에 청민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차마 아니라고 반박할 수가 없어서였다.

“뭐,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 해. 재미있기도 하고. 언제 또 이런 업무를 보겠어?”

“슬슬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형의 말씀대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넌 안 믿었잖아?”

“설마 하니 이렇게 쉽게 밀릴 줄은 몰랐죠.”

청민이 멋쩍게 웃었다.

사실 그는 중원무림이 이렇게나 밀릴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북해빙궁과 오독문이 세외의 패자라고 하나 그렇다고 중원 전체를 상대할 저력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였다.

그런데 두 문파는 단독으로 중원무림을 상대하기보다는 서로 손을 잡고 침공해왔다.

그 결과 지금의 모습이었고.

물론 청민이 보기에 중원무림이 북해빙궁과 오독문을 과소평가한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역사적으로 늘 막아왔으니 이번에도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안일한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방심했다고도 볼 수 없는 게 단순히 숫자만 비교하더라도 북해빙궁과 오독문은 중원무림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결과가 나온 것은 두 곳이 과거와 달리 손을 잡았고, 강시라는 막강한 패를 쥔 덕분이었다.

만약 그 두 개가 아니었다면 중원무림이 이렇게까지 밀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어. 늘 변수와 예외, 그리고 기적이 난무하지. 그것을 너무 맹신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배척해서도 안 된다.”

“저는 사형만 믿고 있습니다.”

“나보다는 너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정말 복안이 있는 것이죠?”

“말했잖아. 이것저것 준비 중이라고. 전체적인 전력이 우리가 열세인 것은 분명하니까. 당가 역시 오독문을 막기 급급할 테고.”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집무실에 처 박혀 업무만 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할 일을 다 하면서도 준비 역시 차곡차곡 진행 중이었다.

“강남의 상황도 썩 좋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도 숭산보다는 낫잖아?”

“사형은 어찌 되리라 보십니까?”

“무너질 수도 있지. 말했다시피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으니까. 어쩌면 역사 이래 최초로 소림사가 숭산을 포기할지도 모르고.”

청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제는 벽우진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아서였다.

또한 막연하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청민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중원은 정말 큰 충격에 빠질 겁니다.”

“이미 충격에 빠져 있어. 정마대전 때에는 우리랑 당가만 죽을 둥 살 둥 했지만 지금 봐. 공동, 점창, 화산, 종남이 무너졌어. 하북팽가 역시 초반에 멸문지화를 입었고. 하지만 이것 역시 자연의 이치지. 약하면 도태되고 사라지는 거야. 대신 새롭게 부상한 강자가 그 빈자리를 차지하고. 우리와 형산파가 바로 그 예 중 하나지.”

“우리에게 기회일 수도 있겠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 하지만 굳이 구대문파, 구파일방에 속해 있는 게 좋은 걸까? 난 꼭 그래야 한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고. 구파일방의 곤륜파보다, 그냥 무림의 곤륜파가 더 멋있지 않아?”

벽우진이 씨익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에는 자신감이 듬뿍 담겨 있었다.

마치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말이다.

“꼭 멋이 중요합니까?”

“당연하지. 구질구질한 것보다는 그래도 멋있는 게 좋잖아? 도인이라고 해서 늘 낡은 도복에 원시천존만 찾을 필요는 없지. 시끌벅적하고 친근하며 막강한 도인들이 있는 문파로 인식을 쇄신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젊은 문파라. 확실히 지금의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4년 남짓이야. 이게 무슨 말인지 알지?”

호법들과 언약한 기간은 정확히 5년이었다.

물론 그 후에도 남고 싶다면 곤륜파에 남아도 상관없지만 벽우진이 생각하기에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결국에는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사람이었으니까.

다만 한 가닥 기대할 것은 바로 정이었다.

함께 보낸 시간만큼 정이라는 이름의 끈이 점점 더 굵어질 터였다.

“그때까지 호법님들만큼 강해지겠습니다. 적어도 한 분 몫은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제자들도 가르쳐야지. 본산제자는 물론 속가제자들도. 아마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거야.”

벽우진의 시선이 푸른 하늘로 향했다.

새하얀 구름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는 하늘로.

“근데 사형.”

“왜?”

“정말 자신 있으신 거죠?”

“무림의 전쟁은 국가의 전쟁과는 조금 달라. 그러니 넌 네 할 일만 제대로 수행하면 된다. 다른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고.”

벽우진이 평소에 보기 힘든 믿음직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청민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모습을 보니 청민은 점점 더 커져가던 걱정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걸 느꼈다.

‘만약 패배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 죽지만 않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어.’

한 번 무너져봐서일까.

아니면 끝없는 절망을 느껴봐서일까.

청민은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갖 걱정들과 두려움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었는데 생각을 달리 하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마지막까지 사형을 보필하겠습니다.”

“아니. 너 죽을 때까지는 내가 널 지킬 것이다. 또한 곤륜파와 곤륜산을 지킬 것이고. 그게 내 사명이자 천명이니까.”

어릴 때 해주던 것처럼 벽우진이 청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나 벽우진은 몰랐다.

양팔에 걸려 있는 일월쌍환이 지금 이 순간 미약한 빛을 발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북해빙궁과 오독문으로 인해 일어난 전란을 피해 청해성으로 이동한 설향은 임시적으로 서녕에 있는 분타를 본부처럼 활용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사천성의 성도보다 이곳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물론 본부에 있을 때보다 지시사항이나 명령이 조금 늦게 하달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차이가 큰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고.

“참 신기하단 말이지.”

“북해빙궁이요?”

“아니.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을 준비했을 게 분명한 북해빙궁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 정도의 물량이 말이 되지 않아. 게다가 탈백강시가 빙혼강시에 비해 턱없이 약하다고 하나 그래도 저 많은 숫자의 강시를 만들려면 재료값만 하더라도 엄청날 게야. 그런데도 북해빙궁은 그것을 가능케 했지.”

“곧 한계가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그렇기에 소림사를 노린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 제 23장. 내 구역이다.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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