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2장. 추락(墜落). -03 >
화창한 날씨와 달리 곤륜산을 오르는 목진자의 표정은 비구름이 잔뜩 낀 하늘처럼 어두침침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기가 너무나 어려워서였다.
왠지 모르게 걸음을 옮길수록 점점 더 발이 무거워지는 느낌에 목진자는 자기도 모르게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장로님.”
“난 괜찮다. 그나저나 곤륜파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구나.”
“사당도 있고, 사원도 개방해서 점점 더 많은 양민들이 곤륜파를 찾는다 합니다.”
“허어.”
“요즘에는 비무를 신청하는 무인들도 곤륜파를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부러움이 하나둘 떠오르는 목진자의 표정을 살피며 백상수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을 하는 백상수의 얼굴에도 부러운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곤륜파는 누가 봐도 빠르게 복구되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장문인이 만나줄까요?”
부러움이 짙게 서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종혁진이 입을 열었다.
목진자를 보필하기 위해 수행원 자격으로 따라오기는 했지만 벽우진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해서였다.
특히나 벽우진의 성격을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종혁진은 만남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노력해 봐야지. 한 번이 안 되면, 두 번, 두 번이 안 되면 세 번이라도 찾아가서 부탁해야지. 지금 우리의 상황을 생각하면.”
“상수의 말이 맞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우리의 상황 상 어떻게든 장문인을 만나야 한다. 비가 오고 눈이 오더라도 서서 기다려야 해.”
“으음!”
목진자의 단호한 말에 종혁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곤륜파의 산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그곳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사문의 재건을 위해서는, 본산을 탈환하기 위해서는 곤륜파의 도움을 무조건 받아내야 했다.
곤륜파의 마음만 얻으면 청해성의 지원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기간 새에 이만큼이나···.’
그 사실을 깨달은 종혁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사이에,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혹은 수십 년이 걸릴 거라고 했던 일을 벽우진은 단 몇 개월 사이에 이룩해 내었다.
그게 종혁진은 너무나 부러웠다.
같은 처지가 되어 보니 문파를 재건하는 게, 명문을 다시 일으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할 수 있을까.’
종혁진의 얼굴에 다시 한 번 회의감이 떠올랐다.
곤륜파의 경우만 하더라도 벽우진이라는 걸출한 무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흔하디흔한 멸문지화를 입은 무문의 길을 걸었다.
다시 재기하기가 불가능할 거라는 평가를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의 등장과 함께 곤륜파의 미래 역시 달라졌다.
그 말인 즉슨 걸출한 무인만 있다면 공동파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나 문제는 벽우진처럼 구심점이 되어줄 절대고수가 공동파에는 현재 없다는 사실이었다.
‘장로님이 계시기는 하지만···.’
다시 묵묵히 곤륜산을 오르는 목진자의 등을 종혁진이 무거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분명 목진자는 구대문파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던 공동파의 장로답게 고수였다.
그러나 벽우진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도 벽 장문인 같은 인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면 이렇게 애걸복걸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종혁진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럴 확률이 희박하다는 걸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저기 산문입니다.”
“들어가자꾸나.”
“예.”
머리가 복잡한 종혁진과 달리 무표정한 얼굴로 산을 오르던 백상수가 앞장서서 산문을 향해 뛰어갔다.
목진자가 왔음을 곤륜파의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허어.”
한데 백상수가 조심스럽게 말은 건 소년을 본 목진자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빛냈다.
곤륜파의 제자로 보이는 소년의 자질이 범상치가 않아서였다.
근골도 근골이지만 상당한 내력을 쌓은 듯한 소년의 모습에 목진자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저 아이, 대단하구나.”
“사형이랑 대화하는 아이요?”
“그래. 쌓은 내공이 상당해. 육신도 더할 나위 없고. 저런 인재를 어디서 구했지?”
목진자가 연신 감탄을 내뱉자 종혁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근골은 좋은 편이지만 목진자가 이렇게나 놀랄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건 곁에 있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이에 비해 뛰어난 편인 것 같기는 하지만, 장로님께서 감탄하실 정도인가요?”
“적어도 육체에 한해서는 저 아이보다 나은 아이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허어.”
단언하듯 대답하는 목진자의 말에 종혁진은 물론이고 다른 속가제자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니 그 정도일 줄은 몰라서였다.
하지만 놀라는 속가제자들과 달리 목진자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았다.
소년이 쌓은 내력은 결코 일이 년 만에 쌓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였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목진자가 미간을 좁힐 때 대화를 마친 백상수가 다가왔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방금 전과 달라 밝았다.
“장로님. 접객당으로 안내해 주겠답니다.”
“정말이더냐?”
“예. 그런데 이건 제 느낌이긴 한데 마치 저희가 올 걸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대호방도 있고, 백운산장과 청하상단도 있지 않더냐.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지. 그보다 중요한 건 장문인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겠다는 것이냐?”
“일단 안내는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백상수의 시선이 십대로 보이는 소년에게로 향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소년도 확답을 하지 않아서였다.
“가자. 그래도 문전박대는 안 당하지 않았더냐.”
“예.”
목진자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문전박대까지 생각했던 그였기에 일단 산문을 넘었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벽우진을 설득할 방법들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목진자가 결정을 내렸을 때 양일우가 공손하게 입을 열고는 몸을 돌렸다.
이윽고 목진자를 위시로 속가제자들이 양일우의 뒤를 따랐다.
또르륵.
양일우의 안내로 접객당에 도착한 목진자는 조용히 차를 따랐다.
그러나 접객당 그 어디에서도 벽우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내했던 양일우 역시 인사와 함께 나간 뒤 소식이 없었다.
“기를 죽이려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면 업무 때문에 지연되는 것일 수도 있고.”
“제가 생각하기에는 전자 같습니다. 만약 후자 때문이라면 미리 언질을 해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굳이 그렇게 삐딱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혁진이 너도 알다시피 곤륜파는 지금 한창 바쁜 시기이지 않더냐. 북해빙궁의 상황도 신경 써야 하고.”
목진자가 종혁진을 다독였다.
설사 이 기다림이 진짜 자신들의 기를 죽이려는 행위일 지라도 지금은 그저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쪽은 곤륜파가 아니라 자신들이었으니까.
달칵.
일 각(대략 15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문이 열리며 낡은 도복을 입은 한 명이 접객당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인물을 본 백상수와 종혁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장문인을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장문인.”
“어, 그래.”
절도 있는 두 사람의 포권지례에도 벽우진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상석에 가서 앉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동의 목진자라고 합니다.”
“그래, 나를 보자고 했다고.”
나이로 따져도, 배분으로 따져도 자신이 높았기에 벽우진은 대뜸 말을 놓았다.
그러나 목진자는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을 띠지 않았다.
목진자 역시 보기와 달리 벽우진의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게다가 일개 장로인 그와는 다르게 벽우진은 일파의 장문인이었다.
“예, 장문인.”
“왜 찾아왔는지 짐작은 가지만, 그래도 묻기는 해야겠지.”
“우선 감사하단 말을 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희는 문전박대까지 각오했습니다. 본파가 저지른 잘못을 생각하면 문전박대를 당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고마워 할 필요 없다. 난 그저 똑같은 놈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니까.”
벽우진이 의자에 삐딱하게 앉으며 말했다.
사실 문전박대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선대가 저지른 죗값을 공동파는 이미 충분히 치르고 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장문인.”
“네가 사과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저희가 감당하고 감내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정 사과를 하려면 전대 공동파의 장문인이나 장로들을 데려 와. 내 앞에.”
싸늘하기 짝이 없는 벽우진의 말에 목진자를 비롯한 공동파의 제자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의 말이 결코 허언처럼 들리지 않아서였다.
동시에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살아 있다면 멱살부터 잡았을 것 같은 벽우진의 모습이 말이다.
“그, 그건···.”
“사과는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구파일방, 오대세가 다 마찬가지야. 아, 당가는 빼고.”
“으음!”
목진자가 무거운 침음을 흘렸다.
기세를 보니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내 대답은 거절이다. 우린 여유가 없어.”
“장문인.”
단칼에 거절부터 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목진자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놀란 기색은 없었다.
“처지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아.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역시 앞가림하기 급급한 상태라.”
“조금만, 조금만 힘을 보태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부탁하는 것이 얼마나 염치없는 짓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산을 탈환하는 일을 도와주신다면 본파는 그 어떤 일이라도 곤륜파를 지지하겠습니다. 저 역시 평생의 은인으로 장문인을 모시겠습니다.”
목진자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심지어 그는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 모습에도 벽우진의 표정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제 와 아쉬워서 그러는 거잖아. 당장 도움이 필요하니까.”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그 정도로 절박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장문인.”
“우리도 절박해. 당장 내일 본파가 무너지지는 않을까. 북해빙궁이 기습을 하지는 않을까 밤마다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벽우진이 몸을 부르르 떨며 손톱을 씹었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발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장문인.”
“왜 나한테 그래.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를 찾아가라고. 나한테 와서 그러지 말고.”
벽우진이 앉은 채로 손을 크게 휘저었다.
마치 날벌레를 쫓아내듯이 건성으로 흔드는 모습에 백상수를 비롯해서 속가제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차마 그걸 따지지는 못했다.
“아시겠지만 중원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저 역시 지원을 요청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힘들다는 답변만 받았습니다.”
“이제는 불가능할 거야. 현재 숭산이 불바다가 되었거든.”
“예?”
목진자는 물론이고 조용히 앉아 있던 속자제자들 전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뭐, 불을 지른 것은 북해빙궁이 아니라 사마세가지만. 그래도 외원을 잃은 대신에 북해빙궁의 1차 공격을 막아냈으니 손해는 아니지. 다만 급한 불만 끈 상태라는 게 문제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목진자가 당혹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숭산이 불바다가 되었다는 말이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게다가 북해빙궁이라니?
하나같이 그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어젯밤 북해빙궁의 주축이 소림사를 습격했어. 야밤에 기습공격을 펼쳤지. 그로 인해 소림사에 모여 있던 전력 반이 날아갔고.”
< 제 22장. 추락(墜落).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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