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2장. 추락(墜落). -02 >
수하들을 이끌고 이동하던 사마륭이 입술을 깨물었다.
전선을 크게 넓히기에 그는 북해빙궁이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비옥한 대지를 점령하는 것에 눈이 멀어 무리수를 둔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게 바로 이 한수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반대로 기회이기도 해. 오늘 이 자리에서 북해빙궁의 주력을 쓸어버리면 단숨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사마륭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위기는 어떻게 보면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력으로 따지자면 결코 북해빙궁에 밀리지 않았다.
현재 숭산에는 소림사는 물론이고 오대세가에서 늘 수좌에 꼽혔던 남궁세가까지 합류한 상태였다.
거기다 소림에는 천하제일인을 논하는 거인이 있었다.
콰아아앙!
괜히 중원무림의 정신적 지주라는 말을 듣는 게 아니라는 듯이 곳곳에서 소림사의 무승(武僧)이 대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십팔나한과 팔대호법들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힘을 보태러 온 군소방파의 무인들까지 정신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전투에 들어가자 무지막지한 숫자로 밀고 들어오던 탈백강시들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아무리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지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탈백강시는 빙혼강시처럼 도검불침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나 빙혼강시였다.
“으아악!”
“사, 살려주시오!”
그간의 악명을 증명하듯 새하얀 무복을 입고 있는 빙혼강시는 등장과 함께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강기가 아니면 모든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무지막지한 몸뚱이를 이용해 무인들을 갈가리 찢어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한두 구가 아닌 수백, 수백 구의 빙혼강시들로 인해 극한의 냉기는 더욱더 중첩되었다.
“절정고수들은 뭐하는 거야!”
“이쪽으로, 여기 와서 빙혼강시들을 상대하라··· 끄윽!”
게다가 문제는 빙혼강시가 전면에 나서자 탈백강시들의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비교적 딱딱한 움직임을 보이는 빙혼강시보다 완력이 떨어지는 탈백강시였지만 대신 진짜 사람처럼 부드럽게 움직였고, 짐승처럼 이빨로 사람들을 물어뜯었다.
그로 인해 수십 명의 무인들이 무너지자 애써 만든 전선이 끊어질 것처럼 출렁거렸다.
“이 더러운 마물들이!”
콰아아앙!
가까스로 만들었던 전선이 순식간에 흐트러지자 한줄기 노호성과 함께 옥청색 권강이 강시들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탈백강시들은 벽력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고 빙혼강시들 역시 우그러진 채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개, 개왕( 丐王)이시다!”
“물러나라!”
“옙!”
괜히 거지 왕초가 아니라는 듯이 등장과 함께 무시무시한 악취가 사위를 뒤덮었지만 그러한 냄새에도 눈살을 찌푸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죽다 살아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하나같이 고마움이 담긴 눈빛으로 개왕을 바라본 후 몸을 날렸던 것이다.
하지만 강맹한 권강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빈 공간은 이내 사라졌다.
인해전술을 펼치듯 수많은 탈백강시들이 이내 빈자리를 채웠던 것이다.
“흐으음.”
그 모습에 개왕이 시커먼 얼굴을 굳혔다.
어마어마한 숫자에 기가 질렸던 것이다.
심지어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마물이 강시들이었기에 개왕의 눈빛은 더더욱 침중해졌다.
단순무식 하지만 숫자가 이 정도라면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어서였다.
‘술법사를 잡아야 해.’
개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탈백강시들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바로 빙혼강시였다.
빙혼강시의 무서움이야 공동파와 점창파, 화산파, 종남파를 통해 천하 방방곡곡에 알려졌다.
그런 만큼 개왕은 강시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강시를 조종하는 술법사를 처치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막아!”
“밀려나지 마!”
“각자의 위치를 사수해!”
개왕이 술법사를 찾는 사이에도 무인들의 악전고투는 계속 되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탈백강시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인해전술, 물량공세에 소림사에 집결한 무인들은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고수라 할 수 있는 몇몇 무인들이 개왕과 똑같이 술법사를 찾기 위해 몸을 날렸지만 강시들 사이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찢겨나가거나 온몸이 뜯겨서 절명했다.
‘어중간한 고수는 안 돼. 적어도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수장급은 되어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개왕은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대신 개방의 절기이자 그가 평생 동안 고련한 파옥권(破玉拳)을 펼쳤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는 여전히 한 줄기 의문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많은 숫자가 숭산에 오를 동안 그 많은 개방도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역시 개왕이라고 해야 하나. 멀리서도 확 눈에 띄는군.”
스스스슥!
사방을 향해 파옥권강을 뿌리던 개왕이 갑자기 파고드는 낯선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탈백강시들이 마치 길을 여는 듯이 좌우로 갈라졌다.
“하나 개왕의 무명도 오늘로서 끝이다.”
“추, 춘삼아!”
터벅터벅 걸어오는 백의무복의 거한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개왕이 소리쳤다.
왜냐하면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정확하게는 거한의 손에 들린 더벅머리 수급의 주인이 그의 하나뿐인 제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은 달리 말하면 개방의 후개가 죽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역시 제자라 그런지 단박에 알아보는군. 근데 개인적으로 실망스러웠어. 개방의 후개라기에 실력이 좀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거 원. 약해도 이렇게 약할 줄이야.”
툭. 데구르르.
철탑을 연상케 하는 팔 척 장신의 거한이 들고 있던 후개의 머리를 던졌다.
정확히 개왕을 향해 후개의 뜯어낸 머리를 굴렸던 것이다.
그러자 개왕의 두 눈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제자의 수급을 회수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그 틈을 노리고 거한이 공격할 수도 있었기에 개왕은 선뜻 움직일 수가 없었다.
보는 순간 만만치 않은 적임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였다.
“···누구냐.”
“확실히 예전의 개방이 아니긴 한 모양이야. 천하의 개방주가 내 정체를 몰라서 물어볼 줄이야.”
“구존이냐?”
이죽거리는 거한을 향해 개왕이 누렇게 썩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런데 그 기세가 마치 자식을 잃은 어미호랑이처럼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아, 생각해보니 모를 수도 있겠군. 우리를 본 이들은 대부분 죽었으니까. 용케 도망친 이들이야 아예 대면조차 하지 못할 애송이들일 테니.”
“아이들을 죽인 것도 설마 네놈들이냐?”
“맞아. 그래도 눈치는 있는데? 오늘 이 공격을 위해 다른 이도 아닌 우리들이 진짜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녔지. 오로지 이 숭산을 얻기 위해서 말이야.”
“망상을 꾸고 있군.”
“글쎄. 과연 망상일까? 내가 보기에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거한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단말마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탈백강시와 군데군데 섞여 있는 빙혼강시로 인해 수많은 영걸들이 채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주검으로 변했다.
반면에 북해빙궁 측의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강시들만 보내고 정작 주축이라 할 수 있는 북해빙궁의 무인들은 구경하듯 서 있기만 했던 것이다.
꽈아아앙!
“중원의 저력을 무시하지 마라.”
노도처럼 달려들던 강시들 쪽에서 굉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북해빙궁에서 구존이 나선 것처럼 중원 무림 쪽에서도 수장급 무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소림무제(少林武帝)와 검왕이라 불리는 제왕검(帝王劍)이 있었다.
소림사와 남궁세가를 넘어 천하를 논하는 거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저력이라. 별로 기대가 안 되는데. 다들 화산검제에 실망한 게 있어서 말이지.”
으드득!
거구의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비아냥거리는 말에 개왕이 이를 갈았다.
동시에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시간을 끌면 강시들이 있는 북해빙궁에게 유리하기에 서둘러 끝장을 보려는 것이었다.
‘춘삼이의 복수도 해야 하고!’
개왕의 두 눈에 시퍼런 살기가 번뜩였다.
가까스로 참고 있었을 뿐이지 그는 진즉에 거한에게 달려들고 싶었다.
다만 주변 정세를 생각해서 지금까지 참고 있었을 뿐이었다.
꽈아아앙!
이윽고 개왕과 거한이 정면으로 격돌했다.
둘 다 전초전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제대로 충돌했던 것이다.
화르르륵!
그런데 그때 소림사 경내 곳곳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야공을 가르는 불화살과 함께 불꽃이 타올랐던 것이다.
“으음!”
그 모습에 소림사 제자들을 지휘하던 법우 대사가 침음을 흘렸다.
소림사 경내를 가르는 불화살에 다시 한 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어서였다.
왜냐하면 화공을 끝끝내 반대했던 게 바로 그였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현재 상황은 화공을 써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이곳이 산속이더라도 말이지.’
화산과 종남산에서 화공을 쓰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혹시라도 본산이 불 탈까봐 저어해서 사용하지 않은 것이었다.
화공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한 가지 이유였고.
반면에 지금 이곳에는 화공을 비롯해서 다양한 전술전략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
“생각이 많은 모양이야. 그런데 놀랍군. 천하의 소림사에서 화공을 사용할 줄이야.”
“구존이신가?”
“천라혈존이다. 소림사 방장을 상대하려면 이쪽에서도 나름 급을 맞춰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래야 저승길이 안 외롭지 않겠나.”
곳곳에서 일어나는 화마에도 법우 대사의 표정은 담담했다.
불은 끄면 되는 것이고 건물은 다시 세우면 되었다.
하지만 소림사의 명예가 떨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아미타불. 그대로 돌려주겠소이다.”
“그래. 다른 곳도 아니고 소림사의 방장인데 그 정도 패기는 있어줘야지. 공동파처럼 쉬우면 너무 재미없잖아?”
“재미로 싸우려는 것이오?”
“겸사겸사지. 설마 싸움 하나만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켰겠어?”
“오늘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이 결판이 날 것이외다.”
후우우웅!
법우 대사의 승복이 거칠게 펄럭였다.
거대한 진기에 승복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도 천라혈존은 웃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상대할 맛이 낫기 때문이다.
“맞아. 우리도 그럴 목적으로 왔거든.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커허허헉!”
“아무래도 승기는 우리 쪽으로 기우는 것 같군.”
천라혈존이 히죽 웃었다.
반면에 법우 대사의 안색이 해쓱하게 변했다.
지금 비명의 주인공이 바로 그의 하나뿐인 사형이자 다르게는 소림무제라 불리는 사람이어서였다.
“비겁한!”
“전쟁에 비겁한 게 어디 있어? 승자와 패자가 있을 뿐이지. 그리고 우린 애초에 정정당당하게 싸운다고 말한 적이 없다.”
가슴과 등에서 피를 토하며 뒷걸음질치는 사형의 모습에 법우 대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쩌면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갑자기 머리에 떠올라서였다.
‘아직이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법우 대사가 황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진기를 가일층 끌어 올리며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협공을 펼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천라혈존뿐만 아니라 주변도 살폈던 것이다.
‘위기는 곧 기회다. 구존과 빙궁주만 쓰러뜨리면 전쟁은 끝난다.’
법우 대사도 사마륭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
상황이 좋지 않지만 어떻게 보면 기회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그가 생각하는 걸 북해빙궁 역시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콰콰콰쾅!
그러는 사이 소림사 외원의 고루거각들이 시시각각 무너져 내려갔다.
더불어 시체 역시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원래부터 주검이었던 강시들은 물론이고 무인들 역시 뜨거운 선혈을 흘리며 스러져갔다.
< 제 22장. 추락(墜落).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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