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2장. 추락(墜落). -01 >
도일수의 동공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벽우진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라서였다.
그렇다고 대충 들었던 말을 꺼내는 것도 아니었다.
직접 겪은 이만이 가진 우울한 감정이 벽우진의 말에는 담겨 있었다.
“사부님께서 그런 걸 느껴본 적이 있으신가요?”
“당연하지. 나도 사람인데. 괜히 세상은 넓고 사람도 많다라는 말이 있는 게 아냐. 정말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천재들과 괴물들이 득실거리지. 반대로 그 재능을 모르는 이들도 수두룩하고.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저 나와 상대방의 차이만 보이지. 내가 너무 모자란 거 같고, 부족한 거 같고. 절대 따라잡지 못할 것 같고.”
“···맞습니다.”
“내가 왜 게으름을 피웠는지 혹시 알고 있느냐?”
도일수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청민에게서 벽우진이 농땡이를 피웠다는 말은 몇 번 들었지만 왜 수련을 빼먹었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어서였다.
“모릅니다.”
“지는 게 싫었거든. 그렇다고 너처럼 티를 내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그때의 난 일수 너보다 더 많이 어렸고, 표정이랑 감정을 조절하는 게 쉽지 않았어. 그러니 내가 자리를 피할 수밖에.”
“아···.”
“물론 그게 잘했다는 건 아냐. 하지만 모두가 너와 똑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지. 가장 재능이 뛰어난 일우라고 해서 열등감을 느끼지 못할까? 아니. 아마 쫓아오는 다른 애들에게 따라잡히기 싫어 더욱 노력할 거다. 또한 앞으로 만나게 될 후기지수들에게서 자신감과 좌절감을 동시에 느끼겠지. 예지 역시 그러했었고.”
꿀꺽!
도일수가 침을 삼켰다.
늘 자신만 생각했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였다.
더불어 정저지와(井底之蛙)라는 말이 떠올랐다.
자기가 보는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제가 생각이 너무 짧았습니다. 나름 세상을 제법 많이 돌아봤다고 여겼는데, 착각이었습니다.”
“사람은 늘 그래. 원래부터 완전한 존재가 아니니까. 또한 완벽이란 말과도 어울리지 않고. 반대로 그러니까 노력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 길게 봐야 한다, 일수야.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는 말을 가슴에 담아두어야 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어. 이건 천재들도 마찬가지야. 출발선은 다르지만 마지막 도착점은 같아.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마. 나만 하더라도 결국에는 노력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으니까. 물론 나보다 앞서나가던 이들이 먼저 죽은 것도 있고.”
“명심하겠습니다.”
“느리더라도 포기하지 마. 네 가장 큰 장점이자 재능은 바로 근성이니까. 그리고 너 역시 남들보다 훨씬 앞서 있는 상태라는 걸 잊지 말고. 다른 이들은 바라마지 않는 걸 너는 얻었잖아?”
벽우진의 시선이 도일수의 몸을 훑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도일수 역시 말도 안 되는 행운을 얻은 상태였다.
재능을 부러워하면 안 될 정도로 말이다.
많이 늦기는 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아예 늦은 건 아니었다.
“사부님께 늘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처럼만 해. 아니. 지금처럼 하면 골병이 들지. 적당히 해. 청민을 목표로. 차기 곤륜일검 정도는 노려야 하지 않겠어?”
“사부님을 목표로 하는 건, 역시 힘들겠죠?”
도일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래 들어 청민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지만 도일수는 이왕이면 벽우진처럼 되고 싶었다.
홀로 고고하게 우뚝 선 절대강자가 말이다.
‘아직은 누구도 사부님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 있는지 모르지만, 그 모습조차도 멋있으니까.’
실상은 칠십이 넘은 노인이었지만 그것은 아는 사람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젊은 나이에 절세고수에 오른 모습으로 보일 터였고, 도일수가 원하는 이상향도 바로 그것이었다.
젊은 신비고수.
생각만 해도 도일수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꿈과 목표는 크게 잡는 게 좋다고 하지만. 나처럼이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지, 진짜요?”
“응. 아무도 만나지 않고 홀로 58년 동안 수련하는 거야. 오직 먹고, 자고, 싸면서 무공수련만 하는 거지. 물론 똑같이 한다고 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더 오랜 세월을 폐관해야 할지도 모르지.”
“······.”
도일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벽우진처럼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렇다고 그 오랜 세월을 홀로 무공만 생각하며 버틸 자신은 없어서였다.
아마 10년을 채 버티기도 전에 미치지 않을까 싶었다.
동시에 벽우진이 왜 강할 수밖에 없는 지도 납득했다.
“가정이야, 가정. 실제로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말이지. 그리고 굳이 똑같은 길을 걸을 필요도 없고. 넌 너만의 길을 걸으면 돼. 지금처럼 묵묵히, 꿋꿋이 말이지.”
“예!”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그만하고 쉬어. 잘 쉬는 것도 수련에 포함되니까.”
벽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그리고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척 없이 연무장에서 사라졌다.
하늘을 훨훨 날아서 연무장을 벗어났던 것이다.
“언젠가는 나도 꼭.”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일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언젠가는 자신도 벽우진과 같은 고수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보름달이 뜨긴 했지만 가득한 구름으로 어둠이 더욱 짙게 내린 숭산의 한 전각에서 사마륭은 여전히 업무를 보고 있었다.
모두가 깊이 잠든 야심한 시각이었지만 그의 일과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얼마 전 종남산이 북해빙궁의 손아귀에 넘어갔기에 그는 더욱더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화산의 속가제자들이 힘을 합쳤음에도 십존, 아니 이제는 구존(九尊)이 된 둘을 막지 못하다니···. 그리고 개방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문도 수로 따지면 누가 뭐래도 단연 1순위에 꼽히는 방파가 바로 개방이었다.
물론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거지들이 태반이었지만 그럼에도 어마어마한 숫자에서 나오는 저력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세상 어디에도 거지가 없는 곳은 없기에 정보력 하나만큼은 천하제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북해빙궁을 상대로는 정보망에 구멍이 뻥뻥 뚫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오독문까지 신경 써야 한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데.”
사마륭이 미간을 좁혔다.
개방이라는 위상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보력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들어서였다.
물론 황하수로채가 북해빙궁에 붙었고, 몇몇 산채들 역시 휘하로 들어갔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사마륭은 개방의 정보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많은 숫자를 가지고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 이상 밀리는 건 위험해. 북해빙궁의 기세를 더 살려주면 싸움은 점점 더 힘들어질 게야.”
이미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북해빙궁이었다.
전력 역시 줄어들기보다는 시간이 갈수록 늘고 있었고.
전체적인 질은 하락했을지 모르나 숫자는 몇 배나 불어난 상태였다.
게다가 사마륭은 미친 듯이 늘어나는 강시의 숫자가 부담스러웠다.
탈백강시가 빙혼강시에 비해 턱없이 약하다고 하지만 대신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더구나 지치지도 않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존재가 강시이기에 숫자가 많다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나마 다행인 게 독강시가 아니라는 점인가.”
죽은 시체를 다시 강시로 만들어 시독(屍毒)을 내뿜게 만드는 오독문보다는 탈백강시가 그나마 상대하기 수월했다.
적어도 독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나 숫자였다.
“너무 많아. 짧은 시간에 숫자가 급격히 늘었어. 이 정도로 백도무림의 신망이 옅어졌단 말인가?”
한쪽 벽면에 붙여 놓은 중원전도를 보며 사마륭이 인상을 썼다.
다른 곳도 아니고 세외무림이 쳐들어 왔는데 냉큼 그쪽에 붙은 이유가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는 알면서도 진실을 외면했다.
힘을 쫓는다면 북해빙궁을 밀어내면 다시 자신들의 그늘 아래로 돌아올 것이 분명했으니까.
“지금은 잠시 맡겨둔 것이지. 근 시일 내에 되찾···.”
뎅뎅뎅뎅-!!
사마륭의 말이 도중이 끊어졌다.
사방팔방에서 울려 펴지는 종소리에 그가 말을 하다 말고 벌떡 일어났던 것이다.
동시에 적막하던 소림사 경내가 한순간에 들썩거렸다.
적의 침입을 알리는 종소리에 경내에 있던 모든 승려들과 무인들이 일제히 일어났던 것이다.
후다닥!
더불어 사마륭 역시 맨발로 처소를 나갔다.
그러자 거리가 상당함에도 사방에서 한겨울을 연상케 하는 지독한 한기가 느껴졌다.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얼음이 떠오를 정도의 냉기가 사방에서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던 것이다.
“이, 이게 무슨! 개방에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
사방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사마륭이 다급히 9층 전각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보기 위해 가장 높은 곳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어어···.”
지붕에 올라간 사마륭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어둠에 물든 듯 새까만 파도가 사방에서 소림사를 향해 몰려오는 것을 보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인영들은 하나같이 초립을 쓰고 있었는데 사마륭은 보는 즉시 알 수 있었다.
강시라는 걸 숨기기 위해 초립을 씌우고 펑퍼짐한 경장을 입혔다는 사실 말이다.
“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사방을 새까맣게 물들이며 달려드는 엄청난 숫자의 탈백강시에 사마륭은 개방을 욕하는 것도 잊었다.
지금은 야습을 알아차리지 못한 개방을 탓할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진형을 구축해서 일단은 북해빙궁의 습격을 막아내는 게 먼저였다.
휘이이익!
거기까지 생각이 닿기 무섭게 사마륭은 사마세가의 전력이 모여 있는 숙소로 향해 몸을 날렸다.
우선은 가솔부터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효율적으로 북해빙궁의 기습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수하들의 존재가 필수였다.
‘준비한 것을 사용하려면 본가의 무인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마륭이 전력질주로 전각을 건너뛰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변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야밤의 기습이었지만 그래도 소림사와 남궁세가, 그리고 개방의 무인들이 집결해 있었기에 초반에만 좀 우왕좌왕 했을 뿐 지금은 각각의 세력끼리 모아서 전선을 만들고 있었다.
각 방파의 수장들이 수하들을 이끌고 빠르게 지휘를 시작했던 것이다.
“가주님!”
“기다리고 있었구나.”
“예!”
“피해는?”
“다행히 소림사의 내원 근처 숙소에 있었기에 피해는 아직 없습니다.”
수하의 대답에 사마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전우라고 하더라고 결국에 팔은 안으로 굽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 반전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가문이 바로 그의 사마세가였다.
“장비는?”
“다들 챙겼습니다.”
“좋아. 바로 이동한다.”
사마륭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지시를 내렸다.
그와 동시에 그는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으로 오면서 북쪽 전선에 탈백강시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음을 확인해서였다.
‘다른 곳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가장 무너지지 말아야 할 곳이 바로 북쪽이다.’
소림사의 전력이 모여 있는 곳인 만큼 사마륭은 북쪽 전선이 현재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어쩌면 북해빙궁의 주력이 그곳에 있을 가능성도 높았고 말이다.
‘허를 찔렀어. 설마 하니 대뜸 중심부를 향해 진격할 줄이야.’
< 제 22장. 추락(墜落).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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