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70화 (70/325)

< 제 21장. 청해성의 거인. -02 >

“네가 보기에도 이게 시작인 거 같지?”

“예.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이 거슬리기는 하지만요.”

이제는 제법 고수다운 풍모를 보이는 청민의 모습에 벽우진이 흐뭇하게 웃었다.

아이였던 동생이 장성한 모습을 보는 느낌이랄까.

지금 벽우진이 받는 느낌이 그랬다.

그는 늘 눈치 보고 자신의 할 말을 억눌렀던 청민보다 지금처럼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청민이 훨씬 보기 좋았다.

예전이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청민의 앞에는 그가 있었다.

곤륜을 넘어, 청해성을 넘어 천하를 아우를 수 있는 그가 말이다.

‘도대체 왜 나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지.’

지이잉.

벽우진의 혼잣말을 유일하게 알아들은 일월쌍환이 미약하게 진동했다.

주변의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하고, 오로지 벽우진만이 느낄 수 있도록 뜻을 전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차차 그 인식을 바꿔 나가야지. 곤륜에는 나만 있는 게 아니라고. 다른 검도 있다고 말이지.”

“아, 아직 제가 곤륜이라는 이름을 달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왜? 곤륜일검(崑崙一劍). 멋지잖아? 패선보다는 훨씬 나은 거 같은데.”

부끄러워하는 청민을 향해 벽우진이 놀리듯이 말했다.

지금은 비록 그 별호로 불리기에 부족하지만 나중에는 다를 터였다.

그렇게 만들 자신이 벽우진은 있었고.

“좋기는 하지만 아직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만들어 나가야지. 너의 이름을 알리는 것을 시작으로. 겸사겸사 아이들 안목도 키우고.”

“다 저에게 돌리실 겁니까?”

“그럼 내가 하리? 이 나이 먹고?”

“크흠!”

청민이 헛기침을 했다.

겉으로만 보면 벽우진이 그에게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게 옳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체 나이도 벽우진이 훨씬 어렸다.

“어쭈? 지금 항명하는 거야?”

“아닙니다. 제가 해야죠. 장문인인 사형께서 직접 나서시는 게 보기에도 좋지 않으니까요. 이제 멸문지화를 입었던 곤륜파가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니 당연히 제가 나서야지요.”

“진즉에 그렇게 말할 것이지.”

“다만 염려되는 게 있습니다.”

청민이 얼굴을 굳혔다.

도전해오는 이들을 상대하면 자신 역시 경험을 쌓을 수 있고, 제자들의 안목 역시 기를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너보다 강한 녀석이 도전해 올까봐?”

“그렇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네 뒤에서 대기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으니까.”

“어, 혹시?”

“맞아. 우리의 태산권께서 나설 것이다.”

“호법님이라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청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진구라면 자신이 지더라도 벽우진에게까지 가지 않게 잘 정리할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도전자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내가 애들 장단에 맞춰줘야 쓰나. 지들이 내 장단에 맞춰야지. 내 체면도 있는데. 아무하고나 어울려 줄 수 없지!”

“맞습니다.”

콧대를 세우는 벽우진을 향해 청민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둘만 있는 곤륜파가 아니었고, 벽우진도 그저 그런 고수가 아니었다.

여전히 본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절대 평범한 고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비공식이기는 하지만 전대의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인 만천독황 당 대협도 제압한 게 사형이시니까.’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청민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물론 당민호는 전성기가 한창 지난 상태였지만 그래도 만천독황이라 불리는 무인이 바로 그였다.

독공의 특성상 육체적인 능력의 비중이 크게 높지 않은 편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고수가 한 명뿐인 것보다는 둘인 게 낫지. 그러니까 부지런히 수련해서 얼른 강해져. 겸사겸사 네가 있다는 것도 알리고. 난 곤륜파와 함께 네가 비상했으면 좋겠구나.”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래그래. 일 끝났으니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저 자는요?”

“산문 밖에 버려. 일어나면 알아서 돌아가겠지. 다시 들어오면 내쫓으면 될 일이고.”

벽우진은 송연걸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로 심소혜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웃긴 건 제자들 중 누구도 송연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허참.”

그 모습에 청민이 헛웃음을 흘렸다.

모양새를 보아 하니 벽우진은 진짜 관심도 없는 듯했다.

“제가 데려다 놓겠습니다.”

“같이 가자꾸나. 혹시 중간에 깨서 난리를 피울지 모르니.”

“예.”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도일수와 함께 청민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송연걸을 들쳐 메고서 산문을 향해 걸어갔다.

청해성의 성도 서녕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정확하게는 무인들이었는데 그들의 중심에는 공동파가 있었다.

북해빙궁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멸문지화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공동파를 재건하고 공동산을 탈환하기 위해 살아남은 본산제자와 속가제자들이 감숙성과 인접해 있는 서녕으로 집결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 중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이들이 대호방을 찾았다.

“도와주십시오, 방주님.”

죽은 공동파의 장문인의 막내사제이자 유일하게 살아남은 장로인 목진자(木晉子)가 허정근을 향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그의 옆에는 속가제자들을 대표하는 백상수가 앉아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힘이 없습니다.”

“청해제일방이라 불리시는 대호방의 주인께서 힘이 없으시다니요.”

“허명일 뿐입니다. 그저 모르는 사람들이나 그리 말하는 것이지요. 이유는 장로님께서도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곤륜파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예. 비록 세력은 적을지 모르나 곤륜파의 강함은 이미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허정근이 조금도 기분 상한 기색 없이 담담히 말했다.

인정하기 싫다고 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곤륜파와의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숫자가 적습니다.”

“그러나 일당백이죠. 특히 장문인과 호법들의 무위는 엄청납니다. 굳이 북해빙궁을 예로 들지 않아도요. 안 그런가?”

“맞습니다.”

허정근의 시선이 잠자코 있던 백상수에게로 향했다.

목진자와 달리 백상수는 벽우진과 진구를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그러니 저보다는 곤륜파로 가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저희도 곤륜산에 오를 계획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방주님께 확답을 듣고 싶습니다.”

“으음!”

목진자의 끈질긴 부탁에 허정근의 얼굴이 난감한 기색이 서렸다.

공동파의 사정은 알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의기만으로 감숙성에 갈 수는 없었다.

허정근이 그 정도로 의협심이 강한 것도 아니었고.

“도와주신다면 본파는 절대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방주님.”

“나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또한 대호방만 나선다고 해서 달라질 상황도 아니고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곳들도 제가 직접 방문할 생각입니다. 이미 인편을 보내 약속도 잡은 상태이고요. 그런데 한 곳만은 사람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혹시 그곳이 곤륜파입니까?”

묘한 낌새를 느낀 허정근이 물었다.

목진자의 말을 들은 순간 왠지 모르게 곤륜파가 떠올라서였다.

“맞습니다. 아무래도 첫 대면이 썩 좋지 않다보니 저희로서도 조심할 수밖에 없어서요.”

“다른 무문들을 찾아가는 것보다 어쩌면 곤륜파의 도움을 받는 게 나을 지도 모릅니다. 귀파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청해성에서 유일하게 북해빙궁과 싸워본 곳이 바로 곤륜파이니까요.”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으음. 쉽지 않습니다.”

백상수가 고개를 숙였다.

공동파가 선뜻 곤륜산을 오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물론 오로지 그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그보다 선대가 저지른 과오도 목진자가 곤륜산에 오르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곤륜파에 대해서는 저로서도 방도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자리를 마련해 주실 수는 있지 않으십니까? 곤륜파 장문인과 몇 번 만나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면만 몇 번 했을 뿐 친분이라고 할 것도 없는 사이입니다. 오히려 그런 부탁을 하시려면 청하상단을 찾아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청하상단의 전대 단주가 곤륜파 장문인의 사제이니까요.”

목진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라고 청하상단을 떠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문전박대를 당해도 할 말이 없다는 점이었다.

곤륜파가 멸문지화를 입고 나서 외면한 곳 중 하나가 바로 공동파였으니까.

‘가장 가까운 곳 중 한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사실 목진자가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정마대전 당시 그는 공동파에 입문하지도 않았던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니까.

그가 공동산에 올랐을 때 이미 곤륜파는 멸문지화를 당한 후였다.

즉 엄밀히 말하면 선대가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그가 치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지.’

현재 공동파는 곤륜파가 걸었던 멸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천년마교와의 전투 이후 곤륜파의 행보와 너무나 똑같은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다른 점은 곤륜파는 어떻게든 스스로 일어나려고 노력하려는 반면에 공동파는 곳곳에 도움을 청하는 중이었다.

“빠른 길을 찾으신다면, 청하상단이 제일 빠를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요.”

벽우진의 성깔을 생각하면 청범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속세에서 상인으로 평생을 살며 온갖 더러운 꼴이란 꼴은 다 본 위인이 서진후였다.

그런 만큼 어쩌면 벽우진보다 상대하기가 더 어려울 수 있었다.

더구나 그의 뒤에는 패선이라 불리는 벽우진이 있었으니까.

‘별호 하나는 진짜 기똥차게 만들었다니까.’

패(覇)라는 뜻보다는 그냥 두들겨 패는 신선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벽우진의 모습에 허정근은 피식 웃고 말았다.

패선보다 더 잘 어울리는 별호는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같이 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청하상단입니까, 곤륜파입니까?”

“곤륜파입니다.”

잠시 눈을 감고 고뇌하던 목진자가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결단에도 불구하고 허정근의 표정은 복잡했다.

목진자를 데리고 곤륜파에 가는 게 그로서는 께름칙했던 것이다.

두 곳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걸 아는데 자신이 목진자를 데려간다?

자신까지도 피해를 볼 가능성이 컸다.

“흐으음.”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 했습니다. 감숙성은 이미 북해빙궁의 손아귀에 떨어진 상태고 하남성의 코앞까지 진격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과연 청해성을 가만히 놔둘까요? 언젠가는 반드시 청해성을 노릴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전에 대비를 해야 합니다.”

“지당하신 말씀이기는 한데, 전황이 반전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기다리는 게 더 안전한 방법일 터입니다.”

목진자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감숙성과 인접해 있는 곳이 바로 청해성이었다.

그런 만큼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면, 진짜 강북 무림이 무너진다면 그 다음 목표는 청해성일 가능성이 높았다.

“양쪽에서 쳐야 합니다. 그래야 강북 무림도 힘을 낼 것입니다. 북해빙궁이 오독문을 이용해 중원의 전력을 양분시킨 것처럼 저희도 그래야 합니다.”

< 제 21장. 청해성의 거인.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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