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69화 (69/325)

< 제 21장. 청해성의 거인. -01 >

‘무공도 제법이고 말이지.’

서예지를 힐끔거리며 송연걸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서예지를 처음 본 순간 두 번 놀랐다.

미모에 한 번 놀라고 실력에 두 번 놀랐던 것이다.

언뜻 풍겨지는 기도가 절정의 수준이자 송연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만해 보이나보군. 대놓고 한눈을 파는 걸 보면.”

“아닙니다. 혈기왕성한 나이다보니 저도 모르게 그만.”

“이해는 하네. 하지만 기분은 썩 좋지 않군.”

“죄송합니다.”

송연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여전히 진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성의 없는 사과에도 청민은 흥분하지 않았다.

이게 세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임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언제까지 떠들고만 있을 거야? 시간은 금이다란 말 몰라?”

“이제 시작할 겁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제대로 해, 제대로.”

“예.”

청민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은근히 자신감이 서려 있는 미소였다.

그리고 그 미소를 정면으로 본 송연걸이 살짝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앞에 두고 너무 긴장하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하긴. 몰라볼 수도 있지. 하수가 고수를 가늠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송연걸은 이내 찝찝한 느낌을 털어냈다.

대신 앞으로 벌어질 일을 떠올렸다.

멋들어지게 청민과 벽우진을 발아래 두는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선배로서 삼 초식을 양보하겠네. 오게.”

“그래도 되겠습니까?”

송연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러자 청민이 담담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게.”

“그럼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스르릉.

송연걸이 도를 뽑았다.

알아서 도와주겠다는데 굳이 두 차례나 거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벽우진을 상대할 것을 감안하면 체력과 내공은 아낄 수 있을 때 아껴두는 게 좋았다.

“오게.”

“갑니다.”

생사결이 아니기에 둘 다 어느 정도의 격식을 차렸다.

이윽고 송연걸이 도를 부드럽게 움켜쥐고서 땅을 박찼다.

‘일격에 끝낸다!’

낡은 검을 편안히 늘어뜨리고 있는 청민을 향해 송연걸이 빛살처럼 달려들었다.

보법이 상당한 수준이라는 듯이 단숨에 3장(약 9미터) 정도의 거리를 좁혔던 것이다.

동시에 그의 참격이 벼락처럼 뿜어져 나오며 청민을 사선으로 베었다.

그야말로 깔끔하고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쩌어어엉!

하나 예리하게 베어 들어가던 송연걸의 참격은 어느 순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어느새 들려진 청민의 검이 그의 도를 막아섰던 것이다.

“흡!”

그러나 송연걸은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의 일격을 막은 건 놀라웠지만 그렇다고 충격적인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공격이 막혔다면 두 번째 공격을 하면 될 일이었다.

‘반발력이 제법이지만, 그래 봤자지.’

송연걸이 쥐고 있는 도를 비틀어서 재차 휘둘렀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반발력이 예상보다 강해서 놀랐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터어엉!

“어?”

그런데 이어지는 연격도 막히자 송연걸의 두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두 번째 공격마저 막힐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이제 하나 남았네.”

“흐으읍!”

놀란 그와 달리 너무나 담담한 청민의 목소리에 송연걸이 내공을 가일층 끌어올렸다.

깊게 가라앉은 청민의 눈빛을 보자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어서였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는 깊은 의문이 들었다.

두 번의 공격은 결코 이류무사가 막아낼 수 있는 공격들이 아니어서였다.

‘고수에게서 사사했다, 이거지?’

웬만한 일류무사도 막아내기 힘든 연격을 쉽게 막아내는 모습에 송연걸은 청민에 대한 평가를 조금 더 올렸다.

그러나 자신의 패배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우우웅!

단전에서부터 흘러나온 진기가 순식간에 애병을 향해 노도처럼 뻗어나갔다.

동시에 도신에서 황색의 도기가 맹렬하게 솟구치더니 이내 압축되기 시작했다.

설명은 길었지만 한순간에 도기에서 도강으로 변화했던 것이다.

‘하지만 검술은 늘었을지 모르나 내공은 말이 다르지!’

사부가 평생을 쌓아온 내공을 모조리 전이 받은 그였다.

그렇기에 송연걸은 도강으로 찍어 누를 생각이었다.

웅웅웅.

하나 그 생각은 창졸간에 사라졌다.

어느새 그의 눈앞에 형형한 푸른빛을 발하는 검강 하나가 솟구쳐 있어서였다.

“무, 무슨!”

“하나 남았는데, 안 올 텐가?”

“이익!”

너무나 선명하게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검강의 모습에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던 송연걸이 이내 이를 악물었다.

연거푸 놀라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비무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어서였다.

그리고 절정고수라고 다 같은 절정고수가 아니었다.

‘어쨌든 이기기만 하면 된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무위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래도 결과는 똑같을 터였다.

무능했던 청민과 달리 그는 타고난 천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연걸은 당혹감을 추스르며 지금껏 수도 없이 수련하고 펼쳐왔던 무공을 펼쳤다.

쌔애애액!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참격이 송연걸의 손에서 펼쳐졌다.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의 무시무시한 속도로 청민을 노렸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참격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무려 여섯 개의 참격이 동시다발로 청민의 사혈을 노리고서 쇄도했다.

“흠.”

하나만 맞아도 전신이 찢겨나갈 강맹한 공격이었으나 청민은 반격하지 않았다.

이번까지는 양보하기로 약속해서였다.

콰콰콰쾅!

이윽고 여섯 줄기의 도강이 정확히 청민의 몸에 적중했다.

청민이 피하지 않았기에 그대로 도강이 쏟아져 내렸던 것이다.

“후욱! 훅!”

생각지도 못한 무위에 전력을 다한 송연걸이 잔뜩 굳은 얼굴로 청민이 서 있던 자리를 주시했다.

강기와 강기의 충돌로 인해 상당한 폭발이 일어나 청민이 있던 자리에는 흙먼지가 짙게 일어난 상태였다.

‘쓰러졌겠지?’

송연걸이 처음과는 사뭇 다른 눈빛으로 흙먼지를 쳐다봤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경시하는 기색이 없었던 것이다.

저벅저벅.

그때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더불어 송연걸의 표정이 기기묘묘하게 변했다.

전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힘을 쏟아부었는데 발자국소리가 너무 멀쩡한 것 같아서였다.

“이제는 내 차례로군.”

“으음!”

잠시 후 먼지구름 사이를 걸어 나오며 청민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을 본 송연걸이 침음을 흘렸다.

상처 하나 없이 너무나 멀쩡한 모습이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반대로 벽우진을 비롯한 제자들의 표정은 담담했다.

“한 번 받아보게나.”

후우웅.

청민이 처음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검은 송연걸과 달리 빠르지 않았다.

대신 진중하고 견고했다.

마치 거대한 벽이 움직이는 듯이 천천히 송연걸을 압박해왔던 것이다.

‘무, 무슨!’

전신을 짓누르는 묵직한 검압에 송연걸의 동공이 흔들렸다.

검이 다가오기만 하는데도 느껴지는 검압이 상상 이상이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으드득!

점차 굳어가는 육신을 억지로 움직이며 송연걸이 도를 휘둘렀다.

우선 도를 움직여 청민이 뿌리는 검압을 해소하려 했던 것이다.

터엉!

그런데 그 속셈을 눈치 챈 청민이 단숨에 송연걸의 도를 쳐냈다.

먼저 예측하고서 오히려 도를 쳐내 송연걸의 가슴을 훤히 열었던 것이다.

“흡!”

뒤늦게 그 사실을 파악한 송연걸이 다급히 보법을 펼쳤다.

우선은 뒤로 물러나며 황급히 도를 회수할 생각이었다.

다만 문제는 청민이 그것마저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퍼억!

느릿한 검과는 달리 청민의 두 다리는 민첩했다.

순식간에 간격을 좁히며 발끝이 송연걸의 복부에 닿았던 것이다.

“컥!”

예상치 못한 발차기 공격에 속절없이 당한 송연걸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번들거렸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퍼퍼퍼퍽!

자신의 공간을 확보한 청민이 말 그대로 매타작을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비무인 만큼 청민은 검강을 풀어버리고 검신의 옆면으로 송연걸을 두들겼다.

비 오는 날에 먼지 나도록 때린다는 말처럼 무자비하게 그를 두들겨 팼던 것이다.

“크아아악!”

조금의 자비도 없는 매타작에 송연걸이 비명을 지르며 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균형이 무너진 몸으로 펼치는 공격에 힘이 실릴 리 만무했다.

오히려 더욱 큰 빈틈을 보였고, 청민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퍼퍼퍽!

검신뿐만 아니라 두 다리로도 짓밟는 청민이 폭력에 송연걸이 이내 굴복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고통에 체면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제, 제가···. 읍!”

패배를 시인하려던 송연걸이 두 눈을 부릅떴다.

마치 자신의 입을 막으려는 듯이 청민의 주먹이 벼락같이 들어와서였다.

“뭐라고? 잘 안 들리는구려.”

“끄으으읍!”

왼손으로 입을 막은 채 검을 두들기는 청민의 모습에 송연걸이 신음을 흘리며 다급하게 벽우진을 바라봤다.

벽우진이라면 지금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모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겨우겨우 쳐다본 벽우진의 모습을 확인한 송연걸은 이내 몸을 축 늘어뜨렸다.

애초부터 비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듯이 늘어지게 하품하는 모습을 보자 희망이 절로 사라졌던 것이다.

‘제, 제기랄!’

말릴 생각이 보이지 않는 벽우진의 모습에 송연걸의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 맺혔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순식간에 사라졌다.

볼을 정확히 가격하는 차가운 감촉에 허공으로 흩뿌려졌던 것이다.

“괘, 괜찮을까요?”

“상대를 괄시한 대가다. 어떻게 보면 좋은 인생 경험 하는 거지. 만약에 생사결 때 저랬어 봐. 아마 고문이란 고문은 다 당하고 죽었을 걸? 그래도 이 자리는 서로 죽이는 자리는 아니잖아.”

“그렇긴 한데요···.”

양일우가 침을 꿀꺽 삼키며 개 패듯이 송연걸을 쥐어 패고 있는 청민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싸가지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불쌍했다.

“아자!”

“아오, 시원하다!”

반면에 양이추와 심대현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흥을 주체하지 못했다.

예의를 차리면서도 거만하기 짝이 없던 송연걸을 두들겨 패자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지금 청민이 보여주는 모습이 누군가와 묘하게 닮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 자업자득인 것이지. 누굴 탓하겠어.”

“선택은 본인이 했으니까요.”

“다들 잘 봤지? 모르겠어도 계속 복기해. 그럼 얻는 게 있을 테니까.”

“옙!”

철퍼덕!

벽우진이 가르침 아닌 가르침을 내리는 사이 비무가 끝났다.

패배 시인을 하지 못한 송연걸이 결국 기절하는 것으로 비무가 마무리 되었던 것이다.

마치 짐짝 다루듯이 송연걸을 내다 던진 청민이 벽우진과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많이 컸어, 우리 청민이. 근데 손속이 너무 과격해진 거 아냐?”

“저도 이제는 좀 마음대로 살아보려고요. 그동안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살았으니까요. 그리고 좋은 예시를 보기도 했고요.”

“지금 나 돌려 까는 거지?”

벽우진이 두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그 표정에도 청민은 태연히 웃었다.

이 정도 갈굼에는 이제 면역이 된 상태였다.

“전 사형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정말 많이 컸어. 어후. 이제는 무서워서 말도 못하겠네. 아주 사형을 잡아먹을 듯이 두 눈을 노려보고 대답을 하니.”

“그렇게 말씀하셔도 수긍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는 말발도 날 잡아먹는 수준이고.”

벽우진이 동정심을 유발하듯 처연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청민은 넘어가지 않았다.

지금 하는 표정, 말투, 목소리 다 연기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그런데 사형. 앞으로도 계속 저에게 맡기실 생각이십니까?”

< 제 21장. 청해성의 거인. -01 > 끝

ⓒ 윤신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