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67화 (67/325)

< 제 20장. 달라진 위상. -02 >

“대현 오빠가 땅 파서 들어오는 녀석들도 있으니 확인해 보라고 했지.”

심소혜는 심대현의 말을 떠올리며 꼼꼼히 농장을 한 바퀴 돌았다.

아무래도 족제비나 살쾡이, 그리고 간혹 너구리 같은 산짐승들이 농장 안을 침범했기에 심소혜는 제법 날카로운 눈빛으로 농장 주변을 살폈다.

“괜찮은 거 같은데?”

혹시라도 무의식적으로 놓친 게 있을까봐 한 바퀴를 더 돌고 나서 심소혜가 턱을 쓰다듬었다.

딱히 이상한 곳은 발견하지 못해서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심소혜는 다시 한 번 농장을 한 바퀴 돌았다.

자신이 관리하는 곳인 만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좋았으!”

무려 세 바퀴를 돌아 멀쩡함을 확인한 심소혜는 닭장으로 들어갔다.

오늘 낳은 신선한 달걀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으흐흐흐!”

늘 그렇듯 똑같은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달걀을 확인한 심소혜가 요상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미리 챙겨온 바구니에 달걀을 조심스럽게 담았다.

“오늘도 많이 낳았네. 요 이쁜 것들!”

병아리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쑥쑥 자라 달걀도 쭉쭉 낳는 닭들을 쓰다듬어주며 심소혜가 닭장 밖으로 나왔다.

그러더니 허리를 쭉 피면서 두드렸다.

“흐에. 좋다.”

별 거 아닌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심소혜는 큰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다.

배를 곪지 않고, 때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심소혜는 지금의 삶에 만족했다.

“뭐가 그리 좋아?”

“어? 사부님!”

“어이쿠!”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고개를 번쩍 돌렸던 심소혜가 벽우진을 확인하고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냉큼 달려들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벽우진에게 안겨들었던 것이다.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기면서 하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니?”

“에고!”

벽우진의 말에 심소혜가 자신의 손으로 머리에 꿀밤을 놓았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고 자책하지는 말고. 근데 매일 이렇게 애들 밥 챙겨주는 거 힘들지 않니?”

“괜찮아요! 재미있기도 하고요! 보람도 있어요!”

“그래도 소혜 나이 때는 잠을 잘 자야 하는데. 그래야 키가 쑥쑥 크지.”

“언니도 잠 잘 못 잤는데도 저렇게 크잖아요. 저도 언니만큼은 크지 않을까요?”

벽우진이 잠시 심대혜를 떠올렸다.

확실히 여자치고는 심대혜의 키는 큰 편이었다.

“가능성은 크지만 그래도 잘 먹고 잘 자야지. 소혜의 나이 대에는 식습관이 정말 중요하단다.”

“편식하지 않고 잘 먹고 있어요!”

“그래그래. 잘하고 있네.”

“헤헤헤!”

벽우진이 안고 있는 채로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심소혜가 해맑게 웃었다.

마치 영혼이 맑아지는 듯한 심소혜의 미소에 벽우진도 물들 듯이 미소를 지었다.

“요즘에 힘든 건 없고?”

“없어요. 다들 너무 잘 대해주세요. 호법님들도 칭찬 많이 해주시고요!”

“무공수련이 힘들진 않고?”

“객잔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덜 힘들어요. 그때는 진짜 제대로 쉴 수도 없었거든요. 저보다는 언니랑 오빠들이 더 힘들었겠지만요.”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인지 심소혜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이가 어려도 아이 역시 알 것은 다 알았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아주 잠깐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동정하는 게 더 큰 상처를 준다는 걸 알아서였다.

“앞으로는 달라질 거야. 노력하는 만큼 다른 미래가 너희들 앞에 올 것이란다.”

“열심히 할 거예요. 사부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

“나중에는 나를 미워할 수도 있어.”

어쩌면 평범한 삶을 살아갈 아이들을 괜히 무림이라는 세계에 데려온 걸지도 몰랐다.

비록 힘들지라도 목숨이 위협받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기에 벽우진은 가슴 한 구석에 아주 작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저도 그렇고 언니오빠들도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사부님을 따라서 곤륜산에 온 것을요. 오히려 다들 감사해하는 걸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어, 근데···.”

당차게 할 말을 다 했던 심소혜가 갑자기 우물쭈물 했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참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편하게 말하거라.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어디 있겠니?”

“사부님은 괜찮으신 거죠?”

“무엇이 말이더냐.”

“어, 요새 일도 많으시고 여러 가지 문제도 있고···.”

심소혜가 벽우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근래 들어 벽우진을 중심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서였다.

얼마 전에는 북해빙궁의 빙화파산존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오기도 했었고.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그런데 소혜가 걱정할 정도의 일은 아니에요. 겨우 그만한 일에 흔들릴 사람도 아니니. 그러니까 소혜는 잘 먹고 잘 자며 열심히 수련만 하면 된단다.”

“네에!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할게요! 그래서 꼭 대 곤륜파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는 여고수가 될 게요!”

“허허허.”

딸 같기도 하고 손녀 같기도 한 심소혜의 모습에 벽우진은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러자 심소혜도 마주 웃었다.

“꼭 보여드릴게요, 사부님!”

“그래그래. 내 꼭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아 있으마.”

“히잉. 그런 소리는 하지 마시고요.”

“후후후.”

벽우진이 바닥에 내려놓은 바구니를 비어 있던 손으로 들어 올리고는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한 곳에 머물렀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벽우진은 단 하루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한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일과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이제는 나름 적응이 되기도 했다.

“호오. 황하수로채가?”

오늘도 어김없이 양선이 보내온 서신을 확인하던 벽우진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니 북해빙궁이 황하수로채를 끌어들였을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그리고 그건 중원무림도 마찬가지인 듯 전선이 순식간에 밀렸다고 했다.

북해빙궁의 전력이 숭산까지 내려왔다고 하니 진짜 턱밑까지 비수가 다가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재미있게 흘러가는데.”

산동성과 섬서성을 내버려두고 소림사가 있는 하남성을 노렸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를 뜻했다.

본진을 쳐서 단숨에 결판을 내겠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벽우진은 빙화파산존이 자신에게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해빙궁이 잠잠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이 한 방을 노리고 있었군.”

병력을 분산시키기보다는 한곳에 집중시켜 건곤일척의 승부를 건 북해빙궁의 선택에 벽우진은 내심 감탄했다.

쉬운 듯 보이면서도 절대 쉽지 않은 결정이어서였다.

만약 숭산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되레 북해빙궁 측이 포위당할 수 있었다.

어쨌든 북해빙궁은 외세의 무리들이었고, 시간을 끌게 된다면 여기저기에서 무인들이 들고 일어날 게 분명했다.

“중원이 자랑하는 열다섯 명의 절대고수 중 둘이 죽었고, 그마저도 반으로 전력이 분산되었으니 쉽지 않겠어.”

벽우진이 남의 집에 붙은 불을 구경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했다.

불쌍하기는 했지만 도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곤륜파가 홀로 천년마교를 막아낼 때 중원무림 역시 구경만 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름 준비는 했을 것이다.

단지 곤륜파에 지원을 오지 않았을 뿐.

“우리는 여력이 없으니까. 꼴랑 열 한 명이 가서 뭘 하겠어?”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는 다른 숭산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던 서신을 아예 덮어버리고 다른 장을 읽어 내려갔다.

“호오.”

무슨 내용인지 벽우진이 묘한 눈빛을 뿌렸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글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던 것이다.

“아직 이럴 여유가 있는 모양인데?”

두 번째 장에 적힌 내용은 현재 청해성에서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는 소문에 대해서였다.

몇몇 무인들이 북해빙궁과 오독문이 저리 날뛰고 있는데 왜 같은 명문정파이자 한때는 구파일방의 한 곳이었던 곤륜파가 너무 가만히 있다고 성토하고 다닌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순간 벽우진은 두 가문이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역겨운 냄새가 났던 것이다.

“둘 다 정신없다고 들었는데. 역시 명문정파의 저력이라는 건가.”

숭산의 상황만큼이나 안 좋은 게 강남 쪽이었다.

남존무당(南尊武當)이라 불리는 무당파와 제갈세가를 중심으로 강남의 명문대파들이 오독문을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썩 좋지 못했다.

독이라는 치명적인 무기에 좀처럼 명문대파들이 좀처럼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천당가가 자리 잡은 성도의 상황 역시 청해성과 비슷했다.

일체의 도움도 주지 않는 사천당가를 욕하고 도발하는 소문들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던 것이다.

“이렇게 흔들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는 듯한 모양새에 벽우진이 조소를 흘렸다.

도와달라고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도발을 하는 게 어이가 없어서였다.

자신이야 잘 모른다지만 사천당가의 성향을 그들이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세인들이 아무리 떠들어 봤자 흔들릴 사천당가가 아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오독문이 먼저 달려들지 않는 이상 사천당가가 나설 일은 없었다.

그리고 제갈세가 역시 사마세가처럼 교활하게 오독문과 사천당가를 부딪치게 만들려고 할 테지만 쉽지 않을 터였다.

사방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북해빙궁과 달리 오독문은 전력을 한 곳에 모아 오로지 무당산을 향해 움직이고 있어서였다.

“그래도 준비는 해 놓아야지. 언젠가는 부딪칠지도 모르니.”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만약 북해빙궁이 강북 무림을 점령하고 오독문이 강남 무림을 정복하면 그 다음으로 노릴 곳은 곤륜파와 사천당가가 될 게 분명했다.

북해빙궁이야 이미 충돌을 한 사이고, 오독문은 완벽한 정복을 위해 사천성을 노릴 게 뻔해서였다.

또한 독을 다루는 곳답게 자존심 싸움이 벌어질 것은 자명했다.

“사부님!”

오독문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벽우진은 곧바로 피독주부터 떠올렸다.

무인에게 있어 독만큼 위협적인 것이 없기에, 또한 제자들과 호법들을 생각하면 피독주는 필수였기에 벽우진은 서신을 쓸 준비를 했다.

그런데 옥청궁 밖에서 양일우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헉헉!”

“무슨 일인데 그렇게 화급하게 달려온 것이냐? 북해빙궁의 무인이라도 쳐들어온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숨 좀 고르고. 숨넘어가겠다.”

전력질주로 달려온 모양인지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진 양일우가 황급히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후우! 후우!”

“그래. 무슨 일이더냐?”

“사부님께 비무첩이 왔습니다. 그런데 당사자가 직접 들고 왔습니다.”

“고놈 참 예의 없는 놈이로고. 보통은 비무첩을 먼저 보내고 날짜를 조율하는 게 기본이건만.”

벽우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성격이 급한 것인지, 아니면 버릇없는 녀석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이 없는 건 분명했다.

“안 그래도 사숙께서 먼저 나가셨습니다.”

“혹시 검부터 뽑지는 않았지?”

“일단 누구인지 확인하러 간 것 같습니다. 저는 사부님께 소식을 알리러 이곳으로 와서요.”

“어디 있느냐?”

“제가 이동하기 전까지는 산문에서 혼자 서 있었습니다.”

양일우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에 못마땅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비무첩을 보내는 게 무림에서는 관행이라고 하나 그래도 벽우진은 일문의 장문인이었다.

한데 그런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비무첩을 보내는 행동이 양일우는 너무나 무례하게 느껴졌다.

“가자.”

양일우가 두 손으로 건네 오는 비무첩을 빠르게 읽은 벽우진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의 표정에는 상당히 재미있다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양일우와 달리 언짢은 기색이 딱히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예, 사부님.”

< 제 20장. 달라진 위상.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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