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0장. 달라진 위상. -01 >
은근히 떠보는 벽우진의 말에 청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나이 어느덧 일흔 살이었다.
눈앞의 벽우진이야 외관은 스무 살 남짓으로 보인다지만 그는 아니었다.
누가 봐도 노인네였기에 청민은 언감생심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전혀요. 제 나이가 얼만데요.”
“나도 나이는 엄청나지. 무공도 엄청나고.”
“대신 젊어 보이시잖습니까. 연세를 밝히시지만 않으면 약관으로 볼 걸요.”
“전략적으로도 아주 효용성이 높지. 일단 어려 보이면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기본적으로 있으니까.”
“도발도 제대로 먹히고 말이죠.”
청민이 피식 웃었다.
벽우진이 적을 상대할 때 심리적으로 어떻게 흔들어 버리는지 곁에서 너무나 봐왔기에 자기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역시 넌 나를 너무 잘 알아. 그리고 의외로 효과적이라고?”
“자기를 감추는 것도 능력이니까요.”
“진짜 내가 잘 키웠다니까.”
“사형께는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청민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 모든 변화가 바로 벽우진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만약 벽우진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면 청민은 눈앞이 깜깜했다.
자신은 여전히 하루하루를 비관하며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오늘따라 너무 좋은 말만 하는데? 야야, 사람은 갑자기 변하면 안 돼. 특히 네 나이에는!”
“아직은 죽을 생각이 없습니다. 저승사자가 와도 쫓아낼 겁니다. 아직은, 제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요.”
청민의 눈빛에 결의가 서렸다.
이제야 다시 일어서는 사문이었다.
그런 만큼 청민은 절대로 죽을 수 없었다.
죽더라도 곤륜파가 과거의 명성을 되찾은 걸 두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 눈을 감을 생각이었다.
“당연하지. 네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일단 강해져서 2인자의 자리를 차지해야지, 제자도 키워야지. 앞으로 삼십 년은 족히 더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사, 삼십 년이요?”
다부진 얼굴로 결심하듯 말했던 청민이 말을 더듬었다.
그의 나이 칠십, 삼십 년 후면 딱 100년이었다.
“깔끔하게 세 자리 채우고 가는 게 낫지 않아? 99년은 조금 아쉽잖아? 뭔가 미련이 남기도 하고.”
“그때까지 살 수 있을까요?”
“못 살 건 뭐야? 일단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부지런히 수련을 해야겠지. 근데 넌 환골을 이루었으니까 불가능은 아냐. 임독양맥 뚫은 게 얼마나 큰데. 그 효능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고.”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점점 진심이 사라져가는 느낌인데.”
벽우진이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하지만 청민은 늘 진심이었다.
단 한 번도 그 마음이 달라진 적은 없었다.
기괴한 행동과 결정에 의심을 품은 적은 몇 번 있었어도.
“그럴 리가요. 근데 제자라니. 기분이 묘하네요.”
“문하생으로 들어오겠다는 아이들은 없어? 난 청년들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무공에 입문하는 시기도 중요하지만, 그건 성장 폭을 생각해서고. 평생을, 일생 동안 익히는 걸 생각하면 난 어떻게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주의라.”
“위상은 확실히 달라졌는데, 아직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어쩌면 멀리서 찾아오는 중일 수도 있고요.”
“간을 보는 중이라 이건가.”
“아무래도 과거의 본파가 아니니까요.”
예전이었다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청민은 더 이상 벽우진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그 역시 예전의 그가 아니었고.
“뭐,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 우리 상황도 제자들을 막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또 아니고.”
“지금이 딱 적당한 것 같습니다. 지금만 하더라도 사형은 개인적인 시간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처럼 나에게도 유익한 시간이야. 그리고 제자들을 키우는 건 장문인의 의무이기도 하고. 후대를 생각해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너도 최소한 일곱은 받아야 한다.”
“···일곱씩이나요?”
청민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곱 명은 너무 많은 것 같아서였다.
자신의 그릇으로 그렇게 많은 제자를 감당하기란 불가능했다.
“왜 못해? 나도 하는데.”
“사형이랑 저는 다르죠. 역량 자체가 다른데.”
“그래도 해야 해. 사문을 위해서라면. 호법들은 약속했던 기간이 끝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거다.”
“제 생각은 조금 다른데요?”
“글쎄.”
고개를 갸웃거리는 청민의 모습에 벽우진이 입맛을 다셨다.
그 역시 더 오래 남아주었으면 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일월쌍환의 권위로 도움을 강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다행히 좋게 좋게 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기억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다.
“몇 분은 남아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하지만 그건 나중 문제고 우리는 당장 닥친 문제부터 해결하자고. 사문을 복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북해빙궁도 상대해야 하니까.”
“안 그래도 청범이 중원의 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하오문을 쉽게 믿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럴 수밖에.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부딪쳤을 테니까. 게다가 상인이니 기본적으로 남을 쉽게 믿을 리가 있나.”
“그런데도 사형께서는 믿는 겁니까?”
청민의 맑은 두 눈이 벽우진에게로 향했다.
그가 본 벽우진은 의외로 하오문을 신용하는 것 같아서였다.
이제 겨우 세 번을 봤을 뿐인데 말이다.
‘물론 양 분타주가 싹싹하게 잘하는 것도 있지만.’
사소한 정보라도 양선은 매일 오후에 전서구를 통해 보내왔다.
중원의 정세는 물론이고 청해성의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보고서 형식으로 보내왔던 것이다.
그 꼼꼼하고 꾸준한 정보 제공에 청민도 조금이지만 경계심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당연히 신뢰하지는 않지. 얼굴 본지 얼마나 됐다고. 다만 주고받는 것뿐이지. 우리가 필요한 것은 정보, 하오문이 필요한 것은 무력. 특히 강한 무인에 탐을 내는 것 같더라고. 무경이 높을수록 자긍심 역시 비례하니까.”
“아무래도 기녀, 도박꾼, 점소이, 소매치기 등등 밑바닥 생활을 했던 이 밑으로 들어가기는 쉽지 않죠.”
“하오문이 무력을 갖추는 것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을 테고.”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 하오문이 단 한 번도 무림의 중심에 서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천하제일을 다투는 정보력에 강력한 무력까지 갖춰진다면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기에 모두가 하오문의 성장을 방해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의 하오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직까지는 괜찮아. 우리가 가려운 곳을 하오문 쪽이 긁어주기도 하고. 그리고 무공이라는 게 비급만 있다고 대성할 수 있는 게 아냐. 익히는 이의 재능, 사부의 역량, 그리고 뛰어난 무공이 삼위일체가 되어야지만 고수가 만들어지는 거지. 근데 하오문은 이 중 두 개가 부족해. 비급만 달랑 가지고 절대고수가 되는 건 천재 중의 천재에게나 가능한 일이야.”
“요즘 격하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네 재능은 그리 뛰어나다고는 볼 수 없으니까.”
지극히 냉정한 말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청민 역시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그는 조금도 기분 상해하지 않았다.
“그래도 꾸준히 수련하면 달라지겠죠.”
“바로 그 마음가짐으로 수련하면 돼. 불가능한 건 없어. 포기하는 자들만 있을 뿐이지.”
“상당히 낯서네요.”
“나도 나름 경지에 오른 무인이자, 도사야. 내공만 죽어라 쌓아서 여기에 올라온 게 아니라고. 깨달음이 있기에 내공이 따라온 거지.”
벽우진이 으스댔다.
그런데 그 모습이 밉지 않았다.
이제는 내성이 생기기도 했고.
“그래서 아직은 제자를 받아들일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제가 어느 정도 무공에 일가를 이루어야 제자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부가 되지 않겠습니까.”
“흐으음.”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채로 벽우진이 청민을 지그시 쳐다봤다.
하지만 그 부담스러운 눈빛에도 청민은 부드럽게 미소 짓기만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의 상승세를 놓치고 싶지 않기도 하고요. 이제는 좀 길을 찾은 것 같아서요.”
“그 시기가 중요하지. 어쨌든 알았어. 나도 꼭 당장 제자를 들이라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아깝다 싶은 애들은 바로 붙잡아. 인연이라는 게 찰나에만 이어지는 경우가 있으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놓치면 안 될 애들은 반드시 데려오겠습니다. 안 그래도 부쩍 많은 이들이 본파를 찾아오니까요.”
“그래그래.”
청범은 속가제자이기에 엄밀히 따지면 본산제자 중에 사형제는 청민이 유일했다.
그렇기에 벽우진이 시시콜콜하게 신경 쓰는 것이기도 했고.
더불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유일한 사람이 청민이기에 벽우진에게 있어 그는 특별한 존재였다.
“아, 그리고 몇몇 군소방파들에게서 서신이 왔습니다. 근 시일 내에 방문을 하고 싶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
“몇 군덴데?”
“오늘 오전까지 다섯 군데에서 왔습니다. 그중 두 곳이 대호방과 백운산장입니다.”
“대호방?”
벽우진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구와의 일로 사이가 살짝 틀어진 곳 중 하나가 바로 대호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번에 북해빙궁의 일로 한 번 거절하기도 했고.
때문에 대호방 쪽에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 힘들 텐데 다시 한 번 서신을 보냈다는 말에 벽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사형을 꼭 보고 싶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지.”
“아무래도 감숙성의 상황을 들어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정사중간의 성향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도의를 아예 모르는 곳은 아니니까요.”
“일단 보자고 해. 지난번에 거절한 것도 있고 하니 한 번 봐야지. 나 역시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청민이 흐뭇한 얼굴로 대답했다.
현재 청해성의 패권은 대호방이 쥐고 있었지만 그 무게추가 서서히 곤륜파로 기울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그 사실이 청민은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곤륜파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으니까.
“왜 좋아하는 거야?”
“요즘 너무 행복해서요. 북해빙궁과 천년마교만 잠잠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텐데.”
“북해빙궁 덕분에 본파가 위명을 떨치는 거야. 북해빙궁이 없었으면 우리가 이렇게 세인들에게 거론되지도 않았을 걸?”
“그건 그러네요.”
“그리고 너무 많은 걸 바라도 좋지 않아. 과유불급. 적당히, 적당히 하자.”
벽우진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하자 청민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청민이 옥청궁을 나섰다.
이른 아침.
언니오빠들이 각자가 맡은 일을 하러 숙소를 나설 때 심소혜도 고양이 세수를 하고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주방 인근에 위치한 야트막한 평지에 만든 작은 농장을 향해 걸어갔던 것이다.
꼬오옥~!
해는 이미 떴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듯이 크게 울부짖는 수탉의 모습에 심소혜가 히죽 웃었다.
쑥쑥 자라는 가축들을 보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던 것이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농장 안의 가축들이 늘었기에 심소혜는 더욱더 뿌듯함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이만큼 키운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잘들 잤니?”
가축 별로 구역을 나눠 놓은 아이들에게 반갑게 인사한 심소혜가 서둘러 밥을 챙기기 시작했다.
잘 먹여야 쑥쑥 자라서 잡아먹을 것이기에 심소혜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이들에게 밥을 듬뿍 주었다.
“에헤헤헤!”
닭들과 오리, 돼지들이 허겁지겁 밥을 먹는 모습에 심소혜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농장의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산속에 만든 농장인 만큼 혹시라도 산짐승이 공격해 올 수도 있었기에 혹시나 뚫린 곳이 있나 확인하는 것이었다.
< 제 20장. 달라진 위상.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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