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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65화 (65/325)

< 제 19장. 잠룡(潛龍)인가, 와룡(臥龍)인가. -03 >

공짜를 좋아하는 벽우진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아무거나 막 다 받지는 않았다.

더구나 상대가 수백 년, 어쩌면 태고 이래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졌을지 모를 문파인 하오문의 주인이었다.

비록 단 한 번도 무림의 중심에 선 적은 없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을 버텨온 저력이 있는 문파였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선물이라고 해서 선뜻 받지 않았다.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순수하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필요한 사람에게는 큰 가치가 있을지 모르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딱히 쓸모가 없는 물건이라고나 할까요.”

“나에게는 필요가 있다?”

“예.”

하대인 듯 아닌 듯한 묘한 화법을 구사하는 벽우진이었으나 설향은 조금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이런 성격이라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어서였다.

게다가 벽우진의 나이를 단순하게 생각하면 일흔 다섯이었고, 그녀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그렇게 말하니까 더욱 궁금해지는구려.”

“열어보시지요. 선물을 대가로 무언가를 요구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순수한 호의로 주는 선물이라는 말에 벽우진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감싸고 있던 비단을 벗겼다.

“흠?”

꽁꽁 싸매있던 비단이 풀어지자 그 안에 있던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비단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제법 두꺼운 두께의 책자였다.

“인명록?”

“보시지요.”

먹물이 마른지 얼마 되지도 않은 듯한 세 글자를 내려다보는 벽우진을 향해 설향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벽우진이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서 첫 장을 천천히 넘겼다.

“허어.”

반응은 곧바로 왔다.

첫 장을 본 순간 벽우진은 이 인명록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래서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간략하게 훑고 넘어가는 벽우진의 모습에 설향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단단한 자부심이 깊게 서려 있었다.

지금 벽우진이 보고 있는 인명록은 한 문파의 수장이라면, 그것도 성을 넘어 중원에 자신의 이름을 떨치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보고 싶어 할 게 분명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놀랍구려.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자료를 모았을 줄이야. 혹시 나에 대한 것도 있소?”

“아직은 없습니다.”

“언제라도 만들 수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려.”

설향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벽우진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사실 굳이 물을 필요가 없는 내용이기도 했고.

“확실히 필요한 사람에게는 보물과도 같은 선물이구려.”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냉큼 받고 입을 싹 닦기에는 과한 선물이기도 하고.”

“말씀드렸다시피 따로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지금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하는 게 전부입니다.”

“가끔 도움도 주고 말이오?”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얻어갈 것은 확실하게 얻어가고 있어서였다.

이 세상에 진짜 공짜인 것은 없었으니까.

이미 이 자리에 온 것부터가 다 노리고 온 것일 터였다.

‘겸사겸사 나를 직접 보고 말이지.’

영악한 것도 영악한 거지만 배짱도 상당했다.

아무리 자신이 명문정파인 곤륜파의 장문인이라고 하나 모두가 청렴하고 고결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설향은 자신을 직접 찾아왔다.

분명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만나봤을 텐데 말이다.

“저희를 가엽게 여겨주시면 감사하지요.”

“가엽게 여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되오만.”

“본문이 지닌 가장 큰 힘이 정보력이라는 사실이 현실을 무엇보다 잘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힘은 상대적인 것이오.”

“하지만 있어서 나쁠 것은 없지요. 굳이 강호만 생각하지 않더라도요.”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벽우진은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조금은 씁쓸한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 거릴 뿐.

“아, 생각해보니 부탁할 게 두 가지 있소이다.”

“말씀하시지요.”

“하나는 무공서의 처분이오.”

“감숙성 무인들의 무공인가요?”

설향이 눈을 반짝거렸다.

안 그래도 이 건에 대해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속으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벽우진이 먼저 말해주어서였다.

“맞소. 챙기기는 했는데 처분하기가 애매해서 말이오. 그렇다고 돌려주기도 뭐하고. 솔직히 말하면 본파의 자금사정이 그리 좋지 않기도 하고.”

“저희가 구입을 해도 될까요?”

“그래도 되긴 하는데. 괜찮겠소?”

“물론이지요. 일단 저희가 구입한 후에 다른 곳에 팔아도 되고요. 아시겠지만 상승절학은 돈이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물론 비급만으로 진의를 깨닫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볼 수 있으니까요.”

“절정무공도 있기는 한데 수준이 썩 좋은 건 아니오.”

벽우진이 슬쩍 밑밥을 깔았다.

쉽게 얻을 수 있는 무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무공도 아니어서였다.

그러나 설향은 고민하지 않았다.

“파훼법만 연구해도 큰 성과입니다.‘

“그렇다면야.”

“두 번째 부탁은 무엇인지요?”

“제갈세가와 사마세가에 대해 조사해 주시오. 정확하게는 본파에 어떤 뒷공작을 펼쳤는지에 대해서 말이오. 증거까지 구할 수 있으면 더욱 좋고. 물론 공짜로 해달라는 것은 아니오. 그만한 값은 치르겠소.”

벽우진의 눈동자에 스산한 빛이 어렸다.

그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증거가 없기에 잠자코 있었던 것일 뿐.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어쩌면 증거가 없을 수도 있고요.”

“사마세가와 개방이 지웠다면 증거가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하오문이니 찾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오. 하오문이 나섰는데도 없다면 정말 없는 것일 테고.”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아주시길.”

“받아들여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오.”

“별말씀을.”

과거라면 굳이 하오문을 통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활용할 수 있는 거라면 모든지 활용해야 했다.

곤륜파의 재건과 복수를 위해서라면 말이다.

그리고 이번 역시 시작한 쪽은 저 쪽이 먼저 했다.

“아, 그리고 오독문에 대한 것들도 말씀드리겠습니다. 궁금하지 않으시다면···.”

“해주시구려.”

눈치를 살피는 설향에게 벽우진이 말했다.

안 그래도 그쪽 상황 역시 궁금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사천당가와는 동맹을 맺은 사이였고.

아마 사천당가는 개방이나 다른 문파들이 매달리는 게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비탈길을 내려오면서 양선이 설향의 눈치를 살폈다.

곤륜파의 산문을 넘고 나서 지금껏 아무런 말이 없어서였다.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그저 문주님의 표정이 심각해 보여서요.”

“심각한 건 아니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단다.”

“장문인에 대한 생각이요?”

설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서 새삼 벽우진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래. 확실히 범상치 않던 인물이더구나. 영웅보다는 효웅에 가까운데, 또 보면 그렇지 않고. 광명정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음흉한 쪽도 아닌. 어찌 보면 명문정파보다는 정사중간에 어울리는 인물이랄까.”

“확실히 평범한 분은 아니죠.”

양선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녀 역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였다.

“하지만 적어도 믿을 수 있는 거래 상대이기는 해. 편견도 없고.”

“그리 보이셨어요?”

“응. 무공을 익히지는 못했지만 대신 잡기라고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익힌 나잖니. 관상도 좀 보고. 일단 단명할 상은 아니야.”

“···이미 오래 살았는데요.”

“흘흘!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설향이 실소를 내뱉었다.

젊은 외관에 자신이 진짜 약관 정도로 봤음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도 이번 일은 조금 위험했어요. 제가 나서도 되는 일이었는데.”

“대신에 미약하지만 신뢰를 얻지 않았더냐. 결코 손해 보는 일정은 아니었어. 아무리 자세히 보고를 받아도 직접 본 것만은 못하는 법이니.”

“하지만 만약 장문인이 악독한 마음을 먹었다면 큰일이 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럴 위인이었다면 애초에 직접 찾아가지도 않았지. 다 계산 하에 움직인 것이니라. 그보다 앞으로 많이 바빠지겠어. 사마세가와 제갈세가의 뒤를 파려면.”

설향의 눈빛이 침중해졌다.

자신감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두 곳 다 만만한 곳이 절대 아니었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정보력이 유독 뛰어난 곳이 바로 제갈세가와 사마세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심히 접근해야 해. 두 곳 다 만만한 곳이 아니니.”

“예.”

설향과 양선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곤륜산을 내려갔다.

하지만 둘 다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빙화파산존의 습격 이후 벽우진의 하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루가 멀다하고 그를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서였다.

청해성의 군소방파들은 물론이고 역사 깊은 권문세가들 역시 곤륜산을 올랐다.

새로이 떠오른 강자인 벽우진과 안면을 트고자 다들 곤륜파를 찾았던 것이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사형.”

“피곤할 수밖에. 찾아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그래도 전 보기 좋습니다. 예전 생각이 나서요.”

“아직은 비교하기 힘들지. 예전에는 훨씬 더 대단했으니까.”

지금도 많이 찾아오기는 하지만 과거 정마대전이 일어나기 전과 비교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다만 긍정적인 점은 점차 나아진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곤륜파의 위상 역시 나날이 올라가는 중이었고.

“점점 나아진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일단 청해성 내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그건 죽기 싫어서 그런 거고. 아직도 대부분은 눈치만 보고 있잖아. 정파라 할 수 있는 문파들만 찾아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언제든지 북해빙궁으로 갈아탈 수 있는 것들이야. 이미 갈아탄 녀석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하오문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확실히 능력은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들 입으로 쓸모 있다고 말했으니까 이 정도는 해줘야지.”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오문의 역량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청하상단에도 찾아가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과거의 위상을 되찾을 때가 되기도 했지.”

“비호표국에 표물을 의뢰하는 이들도 엄청나답니다.”

“그렇게 가르쳤는데 당연히 제 몫을 해줘야지. 우리는 뭐 땅 파서 장사하나?”

청민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틀린 말은 또 아니었다.

애초에 비호표국을 인수하고 훈련까지 시킨 것은 다 상부상조하기 위해서였다.

“감숙성의 상인들도 상당수 문의를 해온답니다. 아무래도 북해빙궁과의 전쟁으로 인해 감숙성 전역의 분위기가 흉흉하니까요.”

“아직은 무리야. 비호표국은 그 정도 역량이 안 돼.”

“그래도 규모가 빠르게 크고 있으니 곧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청해성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비호표국뿐만 아니라 청하상단도요.”

“결국에는 중원으로 가야지. 큰물에 가야 큰돈을 벌 수 있으니까.”

벽우진이 의자에 눌러 붙듯이 늘어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고 언제까지 청해성에서만 놀 생각은 없었다.

다만 지금은 내실을 다질 때라고 생각했다.

“흠흠! 요즘 권문세가나 무문들의 수장들이 딸들을 너무 데리고 오는 것 같습니다.”

“너무 속보이긴 하지?”

“좀 자제를 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저희는 도문인데요.”

“부러워하는 건 아니고?”

< 제 19장. 잠룡(潛龍)인가, 와룡(臥龍)인가.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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