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9장. 잠룡(潛龍)인가, 와룡(臥龍)인가. -02 >
“뭐 어때? 전리품인데. 그리고 내가 빼앗은 게 아니잖아? 지들이 쳐들어 왔다가 얼떨결에 바친 거지.”
“틀린 말씀은 아니신데···.”
서예지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재정상태를 생각하면 벽우진의 말대로 하는 게 맞았지만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좋지 않은 말들이 나올 게 분명해서였다.
아니, 명예에 누가 될 것이 분명했다.
“명예와 명성이 밥 먹여주는 거 아니다. 물론 있으면 좋지. 하지만 그건 결과적으로 거품 같은 거야. 잠시 동안의 허상 같은 거지. 너도 슬슬 느끼고 있겠지만 강호에서는 힘 있는 게 장땡이다.”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고. 사실 사부님이나 사백, 사숙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전리품을 챙기지 않고 싹 다 묻어버리는 게 맞아. 나 역시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지만 선대가 그렇게 살아왔다고 해서 난 꼭 그 길을 따를 생각은 없어. 그렇다고 후대에 내 소신을 강요할 생각도 없고.”
“아버지께 한 번 물어볼게요.”
“아냐. 판매처를 알아보는 일은 시킬 곳이 있어. 그러니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저 너와 아이들은 수련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서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검문의 일이 있었기에 사실 그녀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자신이 전쟁과 실전에 상당 부분 앞서 있다고 생각했다.
직접 겪어본 것과 듣기만 한 것의 차이는 내심 크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고 오만이었다.
한 발 떨어져 있던 구경꾼과 직접 전선에 선 무인의 차이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그렇기에 서예지는 반문하지 않고 얌전히 벽우진의 말을 들었다.
“천검문의 야습 때와는 느낀 게 다를 거야. 하지만 이번에 겪은 것마저도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 그러니 더욱더 정진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너 다치면 청범이 난리친다.”
“설마요.”
서예지가 곱게 웃었다.
설사 자신이 수련 중에 다친다고 하더라도 조부는 한 마디도 못할 게 분명했다.
때문에 벽우진의 약한 소리에 서예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가능하면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 일찍 죽으면 억울할 것 같아.”
“저도 사부님께서 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저희랑 함께요.”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면 안 되지. 만약 그 정도로 오래 살게 되면 난 곤륜산 깊숙한 곳에서 혼자 살 거야. 아무도 못 찾아오게.”
“저희도 안 보시게요?”
서예지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되면 진짜 서운할 것 같아서였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 나이가 얼만데 그 정도까지 살겠어? 너 시집가고 자식 볼 때까지만 살아도 오래 사는 거야. 내 목표가 그쯤이기도 하고.”
“손주까지는 보셔야죠. 그리고 대호법님의 연세를 생각하면 사부님도 가능하실 것 같은데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등선이 더 빠를 수도 있고.”
“우화등선하셔도 저는 슬플 것 같아요.”
서예지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그 모습에 벽우진은 그냥 피식 웃었다.
고맙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긋지긋하게 오래 사는 건 또 싫었다.
“일단 갇혀 있던 세월만큼은 무조건 채워야지. 억울해서라도 난 그 전에 못 죽는다.”
“호호호.”
진심이 담긴 투덜거림에 서예지가 웃었다.
그러면서 새삼 생각했다.
벽우진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고 끔찍했는데 지금은 너무나 행복했다.
그래서인지 웃음도 늘었고 말이다.
똑똑똑.
새삼 달라진 자신의 환경에 서예지가 행복해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그녀와 달리 벽우진은 옥청궁을 찾은 이가 누군지 아는지 특유의 나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들어와.”
“사저께서도 계셨군요.”
“저도 보고할게 있어서요.”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도일수가 벽우진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서예지에게도 정중히 목례했다.
나이는 어려도 엄연히 그보다 항렬이 높았기에 예의를 다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예. 양 분타주가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원이 좀 많습니다.”
나이는 가장 많지만 자신이 막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기에 늘 궂은일은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도일수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곤륜파의 제자가 될 수 있어서, 진짜 무공을 배울 수 있어서 하루하루가 너무나 행복했다.
그리고 비호표국에서의 생활과 비교하면 지금은 힘든 것도 아니었다.
“인원이 많아? 어느 정도나?”
“열 명입니다.”
“흐음.”
벽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딱 두 번 만났지만 양선은 늘 수신호위인 두 명만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곤륜파를 찾았다.
한데 전투가 막 끝난 시점에 더 많은 인원들을 데리고 오자 의아했다.
“어찌할까요?”
“일단 접객당으로 데려 와. 나도 그리로 갈 테니.”
“알겠습니다.”
도일수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빠르게 옥청궁을 나섰다.
지시대로 하오문의 인원들을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도 사제는 참 착한 것 같아요. 그렇다고 순진한 건 아니지만요.”
“속가제자라 호칭하기가 살짝 애매하지?”
“예.”
“시간이 지나면 적응될 거야. 처음만 살짝 불편할 뿐이지.”
나이로 인해 꼬이기는 했지만 딱히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항렬이 꼬여 어린 사형을 모셔야 하는 경우는 과거에도 비일비재했다.
그나마 지금은 나이만 꼬였지 만약 벽우진에게 사형이 있었다면 더욱 꼬였을 터였다.
스윽.
거기까지 생각한 벽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서예지와 함께 옥청궁을 나섰다.
“곤륜파는 처음이시죠?”
“예전에 잘 나갈 때 말은 많이 들었지. 직접 찾아올 일이 없어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어떠신가요?”
도일수의 안내로 접객당에 들어온 양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오문주가 본 새로운 곤륜파의 첫 인상이 궁금해서였다.
“그냥 무난하네. 사람이 적어서 그런가. 아직은 텅텅 빈 느낌이고.”
“하지만 실속은 확실합니다.”
“그건 그렇지. 단독으로 빙화파산존을 제압했으니.”
노파가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승산이 아예 없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하니 일대일로 십존의 일인인 빙화파산존을 때려잡을 줄은 정말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놀라운 점은 호법들이 보여준 무위였다.
단 아홉 명으로 천이백에 가까운 숫자를 밀어붙였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셨다.
말이 아홉 명이지 단 9명이서 천이백 명을 상대하는 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어중이떠중이들을 끌어 모았다고 하나 숫자의 힘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해냈지.’
소식을 들었을 때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그녀는 엄청나게 놀랐었다.
특히 그 인원을 상대하고도 부상자 한 명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또 한 번 경악했었다.
그 말은 압도적인 차이로 짓밟았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근데 이렇게 나서셔도 되나 모르겠습니다.”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직접 대면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지금껏 그래 왔었고 말이다. 게다가 우리는 곤륜파의 적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긴 합니다만.”
“사내라고 했으니 비겁한 수는 쓰지 않을 테고. 잔머리야 잘 쓰는 것 같다만.”
“다 들립니다.”
“흘흘흘!”
문 밖에서 들려오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도 노파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의 집에서 너무 대놓고 말하시는 거 아니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까지야. 욕도 아니니.”
안으로 들어온 벽우진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상석으로 걸어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설향이라고 하옵니다.”
“혹시 문주시오?”
“부족하지만 제가 하오문을 이끌고 있습니다. 물론 혼자서만 하는 것은 아니지요.”
“벽우진이오.”
지긋한 나이임에도 예를 다하는 설향의 모습에 벽우진 역시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그러자 양선이 뒤이어 벽우진에게 인사를 올렸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방문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다음부터는 꼭 서신을 먼저 보내겠습니다.”
“흐음. 지켜보겠어.”
자신을 흘겨보는 벽우진의 시선에 양선이 더욱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벽우진은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전서구를 보냈어도 바빠서 제대로 못 봤을 확률이 컸기 때문이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오? 내 견문이 짧지만 하오문주를 대면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렵다고 들었소만.”
“선이에게 들은 것도 있고 해서 한 번은 장문인을 꼭 뵙고 싶었습니다.”
“나를 만나고 싶었다라.”
벽우진이 묘한 눈길로 설향을 응시했다.
그런데 그녀는 벽우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옅게 웃으며 벽우진을 마주 바라봤다.
“소첩도 제법 오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 덕에 자연스럽게 사람을 보는 눈이 생겼지요.”
“그래서 날 직접 보고 싶었다?”
“예. 솔직히 궁금했거든요. 현재 강호에서 가장 빠르게 위명을 날리시는 분이 장문인이시니까요.”
“그럴 리가.”
벽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세외까지는 아니지만 중원에서 보면 변방이나 마찬가지인 곳이 청해성이었다.
그런 만큼 위명을 날린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장된 표현이었다.
“아닙니다. 현재 중원에서 가장 거론이 많이 되는 무인이 바로 장문인이십니다. 모두가 장문인을 궁금해 하고 있지요.”
“정확히는 빙화파산존 때문이지 않겠소.”
“그렇습니다.”
양선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봤다.
어째 설향이 벽우진을 너무 편하게 대하는 것 같아서였다.
아무리 비슷한 연배라고 하지만 말이다.
“직접 보니 어떠오?”
“소문이 과소평가된 것 같습니다.”
“흐음?”
벽우진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았는데 확고하게 과소평가되었다고 하자 어째서 그리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제가 보기에 곤륜파는 앞으로 더욱 비상할 것 같습니다. 바로 장문인 때문에요.”
“무슨 근거로 그리 말하는 것이오?”
또르륵.
벽우진이 미리 준비되어 있던 차를 따라주며 피식 웃었다.
그러나 설향의 표정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아시겠지만 저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아니, 익히지 못했습니다.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었거든요. 대신 저는 정말 많은 이들을 만나 봤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삼제오왕칠성들도 있지요. 물론 그들은 저를 알아보지 못했지만요.”
“호오.”
“그래서 느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장문인이 그들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요.”
“신기한 능력이로고.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가늠이 된다니.”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약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다른 안목과 눈치가 필수이지요. 그마저도 없다면 사람답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이해가 가는 말이어서였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설향을 바라봤다.
처음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스윽.
“무엇이오?”
“장문인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미리 약속도 잡지 않고 갑작스럽게 방문했는데 빈손으로 오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감싸져 있는 무언가를 벽우진은 선뜻 받지 않았다.
대신 설향을 지그시 주시했다.
“참고로 돈은 아닙니다. 초면에 돈을 드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서요. 그래서 장문인께, 그리고 곤륜파에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준비했습니다.”
“왠지 받으면 안 될 것 같은 물건 같소만.”
< 제 19장. 잠룡(潛龍)인가, 와룡(臥龍)인가.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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