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9장. 잠룡(潛龍)인가, 와룡(臥龍)인가. -01 >
북숭소림(北崇少林)이라 불리는 소림사의 방장실(方丈室)에서 한 노승이 고적하게 찻잔을 기울였다.
차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다도를 즐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방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대사님, 사마륭입니다.”
“들어오시게.”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두 눈을 감고서 차를 음미하던 노승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두 눈을 뜨고는 문 쪽을 응시했다.
“보고드릴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앉으시게나.”
늘 똑같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법우 대사의 말에 사마륭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승복과 이마에 있는 계인만 아니라면 여느 마을의 촌부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인상이었지만 사마륭은 그렇기에 법우 대사를 경계했다.
자고로 드러난 이보다 드러나지 않은 이가 훨씬 더 위험했기 때문이다.
‘소림을 더욱 번창시키지는 못했어도, 유지는 확실하게 시킨 인물이 바로 법우 대사이니까.’
정마대전은 정말 많은 곳들을 무너뜨렸고, 거의 그에 준하는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그건 중원무림의 정신적 지주라 불리던 소림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데 그렇게 큰 피해를 입은 소림을 가장 빨리 복구 시킨 인물이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 법우 대사였다.
“늦은 시간에 사마가주가 직접 빈승을 찾아온 것을 보면, 꽤나 심각한 내용이 담긴 소식인가 보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오? 혹 종남산이 넘어간 것이오?”
법우 대사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현재 가장 심각한 전선이 바로 종남파가 고군분투하는 종남산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종남산이 밀리면 소림사가 있는 숭산까지는 금방이었다.
더구나 산서성이 거의 넘어가다시피 한 상황이지 않던가.
“다행히 그곳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면?”
“혹 얼마 전에 제가 보고 드린 내용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십존 중 한 명이 청해성으로 가고 있다고요.”
“아, 기억나는구려. 감숙성에서 귀속시킨 무문들의 무인들을 이끌고 곤륜파로 간다고 하지 않았소.”
“맞습니다. 그리고 결과가 나왔습니다.”
“어찌 나왔소?”
법우 대사가 짐짓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그의 얼굴 한 구석에서는 살짝 안쓰러워하는 감정이 서렸다.
막 다시 일어서려하는 곤륜파에게 이번의 공격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어서였다.
소림사를 비롯한 중원무림에게도 썩 좋지 않은 일이었고.
“곤륜파로 향한 무인은 북해빙궁에서 빙화파산존이라 불리는 고수인데, 놀랍게도 장문인에게 개 맞듯이 뚜드려 맞았다고 합니다.”
“허어.”
법우 대사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십존의 일인을 맨손으로 때려 잡았다고 하자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알아본 바에 의하면 십존이라고 해서 다 같은 수준은 아니라고 합니다. 화산검제를 쓰러뜨린 옥면검존의 경우 십존 중에서도 수좌에 꼽히는 인물이라 하고요. 반면에 빙화파산존은 중하위권이 아닐까 파악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대단한 일을 해냈습니다. 곤륜파의 장문인이요.”
“그래도 십존이지 않소. 다른 무인도 아니고. 게다가 감숙성에서 이끌고 간 무인들의 숫자가 상당하고 들었소만.”
“곤륜산에 도착할 당시 천이백여 명 정도였다고 들었습니다. 나머지 삼백 명 안팎은 낙오했다고 하고요.”
“그럼 스무 명이 채 안 되는 숫자로 그 많은 인원들을 패퇴시킨 것이오?”
“그렇습니다.”
보고하는 사마륭조차 솔직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리 하수들이라고 하더라도 숫자가 일정 이상 모이면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괜히 인해전술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아무리 고수라고 하나 인간인 이상 내력과 체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곤륜파는 그 영역을 뛰어넘었다.
“역시 명문은 명문이구려. 그런 저력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저도 솔직히 놀랐습니다. 아마 십 중 아홉은 곤륜파의 패배를 예상했을 테니까요. 아니면 사천당가의 도움이 있던가.”
“사천당가는 움직이지 않다고 하지 않았소.”
“만천독황은 곤륜산까지 움직인 전력이 있으니 혼자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만천독황은 움직이지 않았고, 곤륜파는 단독으로 북해빙궁의 습격을 막아냈지요.”
사마륭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곤륜파가 그들이 내민 손을 잡았다면 호재도 이런 호재가 없었을 텐데 문제는 곤륜파가 그들과의 합류를 거절하고 독자 노선을 선택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얻는 게 아예 없지만은 않지만.’
사마륭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변했다.
비록 반쪽에 불과한 성공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북해빙궁의 신경을 조금이나마 분산시켰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건 강북 무림에게 있어 결코 나쁘지 않았다.
‘손을 잡지 않는다면 최대한 이용할 수밖에.’
정마대전 당시 무림맹을 출범시키며 전 중원의 힘을 합쳤지만 그건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이었다.
천년마교처럼 수직적인 관계가 무림맹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무림맹주는 수장이라기보다는 대표자에 가까운 직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지금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과 가문, 혹은 문파의 안위였다.
“곤륜파의 장문인이 걸물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정말인 것 같소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행히 큰 피해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하오. 그 적은 인원으로.”
“청해성과 감숙성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사천성도요.”
사마륭이 은근슬쩍 선을 그었다.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억지로라도 도움을 이끌어내야 하는 게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이었다.
강북이 소림사를 중심으로 뭉쳐서 북해빙궁을 상대하듯이 강남무림은 무당파를 중심으로 오독문을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곤륜파와 사천당가가 힘을 보태주면 정말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을 텐데 말이오. 아미타불.”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그렇다고 우리의 생각을 곤륜파에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요.”
“흐으음.”
법우 대사가 침음을 흘렸다.
불현듯 제갈가주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더불어 제갈현과 사마륭이 자기도 모르게 비교가 되었다.
‘제갈가주는 무조건 포섭을 해야 한다고 했었지. 어쩌면 이 결과를 먼저 내다본 것인지도 모르겠어.’
사마륭 역시 뛰어난 지자였다.
제갈세가가 없었다면 그 자리를 대신할 가문이 사마세가이기도 했고.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완벽히 대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성향도 완벽히 정도를 따른다고 보기 어려웠고.
“그래도 청해성이 넘어가지 않았다는 점은 긍정적입니다. 감숙성의 병력 역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요. 지금이야 잠자코 있지만 곤륜파 장문인의 성격이 종잡을 수 없다고 하니 막말로 감숙성으로 진격할 수도 있고요.”
“그렇게까지 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소만.”
“사실 가만히만 있어도 저희에게는 이득입니다. 십존의 일인이 당한 만큼 북해빙궁의 입장에서는 곤륜파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요.”
“곤륜파를 이용하려는 것 같아 조금 껄끄럽구려.”
법우 대사가 얼굴 가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마대전 당시에도 도와주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딱히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였다.
오히려 도움만 계속 받고 있는 것 같아 법우 대사는 내심 미안했다.
물론 도와주기에는 그때 당시의 소림사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역시 변명이라는 점이었다.
도와주려고 진짜 마음을 먹었다면 어떻게라도 도와줄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때의 외면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을지 모르지.’
곤륜파가 단칼에 거절한 것도 법우 대사는 이해할 수 있었다.
역지사지라고 반대 입장이었어도 서운하고 섭섭했을 테니까.
그렇기에 개방의 분타주가 설설 기었던 것이고.
개방 역시 자신들의 잘못을 알기에 납작 엎드리는데 망설이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멀리 온 건가.’
법우 대사가 두 눈을 감았다.
곤륜파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아쉬우니까 손을 내밀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서였다.
하지만 핑계이기는 하지만 소림사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곤륜파는 재기가 불가능한 상태였었다.
도와주려고 해도 곤륜파의 신공절학이 없다면 그건 더 이상 곤륜파라고 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벽우진이 등장하면서 한순간에 모든 게 달라졌다.
“지금은 북해빙궁과 오독문을 밀어내는 게 우선입니다. 곤륜파와의 관계는 그 이후에 차근차근 진행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예 적대관계인 것은 아니니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개선시키면 될 것 같습니다.”
“그게 최선인 것 같긴 하오만 너무 늦는 건 아닐지 모르겠구려.”
“우선은 종남산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종남파가 무너지면 섬서성이 넘어가게 되고 그러면 하남성까지는 순식간입니다. 전선이 너무 불리해집니다. 산동성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하북팽가가 무너진 이상 산동성의 무문들이 버텨내기에는 무리입니다.”
“······.”
법우 대사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곤륜파의 문제는 잠시 미뤄두고 당면한 현실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십존 역시 한 명이 당했다고 하나 나머지 아홉이 건재하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빙궁주는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분명 내려와 있는 게 분명할 텐데요.”
“곧 드러날 것이라 생각하오. 그분들이 직접적으로 움직이고 계시니.”
“문제는 오독문 때문에 반으로 나누어졌다는 것인데···.”
“그래서 말인데. 그는 어찌 되었소?”
“조율 중입니다. 그런데 쉽지 않습니다.”
사마륭의 얼굴이 굳어졌다.
의외로 진전이 없어서였다.
“혹시라도 북해빙궁이나 오독문 쪽에 넘어가는 일은 없어야 하오.”
“물론입니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곧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대로 단결만 된다면 이 시국을 어렵지 않게 타개할 수 있을 터인데···.”
법우 대사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분명 백도무림의 힘은 거대했지만 문제는 그 힘을 하나로 집결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법우 대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 노력해 보겠습니다.”
“부탁하오.”
사마륭이 고개를 숙였다.
크게는 중원무림을 위해서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의 가문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사마륭의 머리는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차가운 비수가 어느새 그들의 목전까지 다가와 있음을 말이다.
적들의 피로 물들다시피 한 곤륜산을 정리하는데 벽우진은 적지 않은 시간을 소요했다.
워낙에 숫자가 많으니 매장하는 일도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단순히 묻기만 하지는 않았다.
시신들이 품고 있는 병기들이나 무공비급, 금전 같은 것들을 꼼꼼히 챙겼다.
고급 인력을 움직인 만큼 적어도 이 정도는 챙겨야 수지가 맞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재 곤륜파는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금액이 훨씬 많았다.
다달이 적자인 상황이었기에 한 푼이라도 챙길 수 있을 때 챙겨야 했다.
“그마저도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단 말이지.”
“예, 사부님.”
“병장기도 고철에 불과하고.”
“네.”
곤륜파의 살림을 도맡아하는 서예지가 송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현재 곤륜파의 재정상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이번에 주운 무공비급이라도 팔아야 하나.”
“찾아보면 구매하겠다는 곳이 있을지 모릅니다. 물론 비밀리에 팔아야 하겠지만요.”
“판매처를 구하는 거야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근데 그래도 될까요?”
서예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명색이 명문정파인데 이렇게 해도 되나 싶어서였다.
< 제 19장. 잠룡(潛龍)인가, 와룡(臥龍)인가.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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