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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62화 (62/325)

< 제 18장. 곤륜산에는 패선(覇仙)이 산다. -04 >

진격을 멈춘다고 해서 싸움이 끝나지는 않았다.

시작은 빙화파산존과 감숙성의 무인들이 했지만 끝내는 건 곤륜파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호법들은 자신들의 무위를 보고 머뭇거리는 감숙성의 무인들에게 망설임없이 살수를 뿌렸다.

어중간한 마음으로 봐주거나 아량을 베풀었다간 나중에 비수가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씁쓸하기는 하지만 살초를 멈추지는 않았던 것이다.

“끄아아악!”

“사, 살려주시오! 제, 제발!”

“눈이 삐어 고인을 못 알아 봤습니다. 제발 아량을 베풀어···!”

꽈아아앙!

여기저기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소리들이 들려왔지만 호법들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야 간이고 쓸개고 다 줄 것처럼 말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뒷간에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호법들은 더욱 독하게 손을 썼다.

후환은 아예 생기지 않게 만드는 게 최선이었다.

“저 애송이들을 노려!”

“녀석들을 사로잡아!”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십인십색이라는 말처럼 몇몇 무인들은 사파인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비겁한 수를 쓰려고 했다.

누가 봐도 어려 보이고 갓 입문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제자들을 인질로 사용하고자 달려들었던 것이다.

무력으로 호법들이나 벽우진을 상대할 자신이 없으니 제자들을 이용해 자신의 몸을 건사할 생각으로 수십 명이 몸을 날렸다.

“어딜!”

“흐으읍!”

호법들이 구축한 전선의 틈을 향해 무인들이 몸을 들이 밀었다.

아무래도 인원이 아홉뿐인 만큼 헐거울 수밖에 없는 전선의 틈 사이로 파고들어 제자들에게 접근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몸을 날린 무인 중에 성공한 이들은 손에 꼽았다.

속셈이 뻔히 보이는 움직임을 호법들이 좌시할 리가 없어서였다.

“성공했다!”

“잡아!”

하지만 아무리 호법들이 막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모두 다 막아내는 건 역부족이었다.

호법들 사이사이의 틈이 넓기도 했고, 적들의 수가 많았기에 몇 명이 운 좋게 전선을 통과했던 것이다.

꾸욱!

그 모습에 서예지를 비롯한 제자들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뒤에 멀찍이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다들 각오는 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들도 싸워야 할지 모른다고 말이다.

때문에 살기 가득한 무인들의 쇄도에도 긴장하는 이들은 없었다.

‘싸워야 해!’

‘나도 곤륜의 제자야! 이곳을 지켜야 하는!’

무공에 입문한 순간부터 언젠가는 생사결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제자들 역시 알고 있었다.

또한 그만한 각오를 하고서 무공을 익히기도 했고.

하지만 살갗에 느껴지는 저릿저릿한 살기에 제자들은 반사적으로 굳고 말았다.

단순히 생각으로 각오한 것과 직접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익!”

“움직여아···!”

살기로 번들거리는 안광을 번뜩이며 쇄도하는 무인들의 모습에 제자들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건 서예지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는 그녀였지만, 나이도 두 번째로 많았지만 이렇게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서예지의 안색도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너희들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그저 너희들은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기만 하면 된다. 전쟁이 이렇게 참혹하고 처절하며 끔찍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무인으로서의 숙명이 어떤 것인지도.”

쩌어억!

부드러운 음성이 제자들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선두에서 살기를 줄기줄기 흩뿌리며 달려들던 장한이 심장에서 피를 쏟아내며 고꾸라졌다.

“사숙!”

“아직은 너희들이 나설 때가 아니다. 그러니 지켜보기만 하거라. 우리가 사문을 어떻게 지키는지.”

전면에 나선 호법들과 달리 청민은 지금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벽우진이 따로 그를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에는 청민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저 늙은이만 잡으면···!”

“흩어져!”

가장 앞에서 달려가던 장정이 죽었지만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기습과도 같은 공격에 죽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들은 그저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

우우우웅!

아래로 편하게 늘어뜨린 청명의 검이 울었다.

거의 평생 동안 그와 함께 했던 애검이 검명을 토해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마치 곤륜산의 푸른 하늘빛을 닮은 검기가 천천히 검신을 감쌌다.

“어어어?!”

그런데 이어진 광경에 제자들을 가로 막고 있는 청민에게 달려들던 무인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검신을 감싼 푸른빛의 검기가 점점 거대해지더니 일순 3장(대략 9미터) 가까이 커졌다.

그 검기를 청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들던 무인들에게 휘둘렀다.

쯔가가각!

무심한 얼굴로 휘두른 일검에 십여 명이 양분되었다.

들고 있던 대감도, 유엽도, 거치도, 철창 등등 청민의 검기는 병장기와 육신을 가리지 않고 갈라버렸다.

쩌어엉!

그나마 절정에 오른 몇몇 이들만이 가까스로 청민의 일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상태가 좋지는 못했다.

단순히 검기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안에 담긴 힘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쿨럭!”

막아내기는 했지만 내상마저 피할 수는 없었는지 살아남은 이들 대다수가 바닥에 주저앉아 새빨간 피를 토했다.

단 한 번의 충격에 오장육부가 뒤틀린 것이다.

개중에 몇몇은 아예 전신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제, 제길···!”

서걱.

단 일격으로 달려들던 이들 대부분을 저지시킨 청민이 무표정한 얼굴로 재차 검을 휘둘렀다.

확실하게 목숨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물론 강자라 할 수 있는 절정고수들은 선연한 빛의 강기를 일으키며 반항했지만 청민은 더 이상 예전의 청민이 아니었다.

벽우진뿐만 아니라 호법들에게서 실전을 방불케 하는 경험을 쌓았기에, 거기다 환골까지 이루었기에 가볍게 강기들을 박살내며 달려든 모든 이들을 처치했다.

“저 쪽은 끝났고.”

청민이 무사히 장내를 정리한 것을 확인한 벽우진이 다시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여전히 피가 난무하는 격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개떼 사이로 파고든 맹수처럼 호법들이 무시무시한 신위를 선보이며 말 그대로 적들을 도륙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호법들 중에 도복에 피를 묻힌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단하신 분들이라니까.”

특히 물 만난 고기 마냥 싱글벙글한 얼굴로 날뛰는 진구의 모습에 벽우진은 피식 웃었다.

정말 도인인지 마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저러면서 왜 그렇게 산속에서의 수행에 목을 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가 봐도 진구에게는 속세가 어울렸는데 말이다.

웅웅웅!

곤륜파의 장문인으로서 더 이상 구경만 할 수 없기에 벽우진은 뒷짐을 지고 있는 오른손으로 지풍을 날려 빙화파산존의 마혈과 아혈을 점혈하고는 왼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번쩍 정도는 아니고 누가 봐도 건성으로 대충 들고서 진기를 집중시켰다.

그러자 공명음과 함께 적들의 허공에 새파란 강기로 이루어진 손바닥이 떠올랐다.

청민이 뿌린 검기와 너무나 흡사한 빛깔의 장인(掌印)이었다.

“어?”

“피, 피해!”

“미친! 도대체 누가 저 정도의 강기를···!”

무려 3장은 훌쩍 넘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장인이 떠오르자 밑에 있던 무인들이 대경실색 했다.

그림자만 해도 엄청났기에 다들 경악했던 것이다.

하지만 놀람은 잠시뿐 그들은 이미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림없다.”

그런 그들을 향해 벽우진이 나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동시에 왼손을 까딱였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지만 장인을 조종하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너무나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퍼퍼펑! 퍼펑!

거대한 크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속도에 적들이 말 그대로 쓸려나갔다.

푸른빛을 머금은 장인이 전후좌우 할 것 없이 휩쓸고 다니자 웬만한 무인들은 피하지도 못하고 육신이 터져 나갔던 것이다.

“허허허···.”

그 광경에 설백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런 공격은 오직 벽우진만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나 다른 호법들도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내공소모가 극심하기에 저렇게 오랫동안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후, 괴물.”

“어허! 장문인께 괴물이라니.”

“형님은 저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으십니까?”

“든든하고 좋은데 뭘. 그리고 장문인의 강함이 알려져야 하루빨리 곤륜파가 번창하지 않겠느냐? 그럼 우리의 일도 줄어들 테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진구가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오늘의 전투는 분명히 중원 전체로 알려질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곧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는 걸 뜻했고.

한데 과거의 성세를 회복한 곤륜파를 상상하자 진구는 살짝 섭섭해졌다.

“젊어서 그런가. 금세 세속에 물들었구나.”

“저도 팔십이 넘었는데요.”

“그럼 뭐 해. 우리들 중에는 막내인데.”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허륭의 말에 진구가 실소를 흘렸다.

이 나이 먹고 막내 취급을 받는 다는 사실에 웃음이 새어나왔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가 있을까요?”

“누구 말이냐? 장문인?”

“예.”

“글쎄다. 형님도 제대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니 엄청난 경지인 것만은 분명하겠지.”

“왜 하필 저런 사람에게···.”

진구가 자기도 모르게 본심을 꺼냈다.

그러다가 뒤늦게 실수를 파악하고는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허륭이나 다른 호법들이 다 들은 후였다.

“말조심해라. 만약 그 말을 장문인께서 들었다면···.”

“으으으!”

진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벽우진은 곤륜산의 종주였다.

게다가 생긴 것 그대로 폭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다행히 못 들으신 것 같다만.”

“전 도망친 녀석들을 쫓아가 싸그리 정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런 일은 막내가 해야지.”

“맡겨주십쇼!”

눈치 빠른 이들은 승기가 기울기 무섭게 덤벼들기보다는 도주를 선택했다.

애초에 곤륜파와 적대관계가 아닐뿐더러 따로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전황이 불리하다고 느낀 순간 냅다 몸을 돌렸던 것이다.

그게 처음에는 한두 명이었으나 나중에는 수십, 수백 명이 되었다.

“근데 진짜 어중이떠중이들만 모아서 데려왔네.”

“어차피 인원만 맞추려고 끌어 모은 것 아니겠습니까. 숫자의 힘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근데 상대가 나빴어. 하필이면 이곳을 찾아오다니.”

적들의 대부분이 이류무사와 삼류무사들이었다.

숫자만 많을 뿐 고수라고 할 수 있는 일류무사와 절정고수는 정말 소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빙화파산존이 제압당하기 무섭게 도망친 이들이 속출한 것이기도 했고.

“모르는 게 죄지요. 알면 이렇게 왔겠습니까.”

“우리를 무시한 것도 좀 있겠고 말이지.”

“그럴 수밖에요.”

호법들이 여유롭게 잔당들을 정리했다.

항복하는 이들을 죽여야 한다는 게 조금 께름칙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후환을 남겨두면 자신도 문제지만 아이들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어떻게 보면 교육이기도 했다.

강호에서 무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는 교육 말이다.

‘포기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온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말이지.’

설백의 시선이 창백하게 변한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비록 안색은 좋지 않을지언정 서예지와 도일수를 비롯한 아이들은 그나 다른 호법들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눈을 부릅뜨고 그와 시체들을 직시했다.

“정리하자.”

“예!”

“토해도 괜찮으니까 억지로 참지는 말고.”

어느새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공터에 벽우진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염려하는 그의 말과 달리 누구 하나 토악질을 하지 않았다.

대신 묵묵히 땅을 파고 시체들을 묻으며 주변을 정리했다.

< 제 18장. 곤륜산에는 패선(覇仙)이 산다.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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