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8장. 곤륜산에는 패선(覇仙)이 산다. -03 >
노성과 함께 빙화파산존이 움켜쥐었던 손을 펼쳤다.
그리고는 그대로 손날을 안쪽으로 당겼다.
벽우진의 목을 따려는 듯이 팔을 쭉 뻗은 상태 그대로 손날을 휘둘렀던 것이다.
스으윽.
그런데 그 간결하면서도 신속한 공격을 벽우진은 너무나 쉽게 피해냈다.
여전히 뒷짐을 진 채로 몸만 뒤로 젖혀 빙화파산존의 손을 가볍게 회피했던 것이다.
“말했을 텐데. 놈놈 거리지 말라고.”
흠칫!
뒤로 몸을 젖힌 채로 입을 여는 벽우진의 모습에 빙화파산존이 순간 움찔거렸다.
왠지 모를 오한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 생각을 털어냈다.
지금은 벽우진을 쓰러뜨리는 게 먼저였다.
‘일단 맞추기만 하면···!’
빙화파산존이 눈을 번뜩였다.
괜히 그의 별호가 빙화파산존이 아니었다.
일단 적중시키기만 하면 극한의 냉기로 상대방을 얼려버렸기에 그는 일단 두 손이 벽우진에 몸에 닿게 만드는 것만 신경 썼다.
휘이익!
하지만 벽우진은 마치 미꾸라지처럼 그의 공세를 미끄러지듯이 피해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미세하게 피해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빙화파산존이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격돌 한 번 없었지만 움직임만 봐도 벽우진이 만만치 않은 무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서였다.
‘어째서 둔해지지 않는 거지?’
그러나 가장 큰 놀람은 따로 있었다.
북해빙궁 소속의 무인들은 전부 다 빙공을 익히고 있었다.
사시사철 얼어 있는 동토에서 흘러나오는 한기를 자연스럽게 흡수해서 빙공을 수련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북해빙궁의 무인들은 기본적으로 극한의 냉기를 내뿜었다.
중원의 무인들이 빙혼강시에 맥을 못 추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근처에만 가면 흘러나오는 냉기로 인해 몸이 경직되어 둔해지니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벽우진의 몸놀림에서는 그런 기색을 볼 수가 없었다.
“십존이라 불린다기에, 나름 실력 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거 영 아닌데?”
“크하압!”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말에 빙화파산존이 더욱더 빠르게 공세를 펼쳤다.
거구의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민첩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의 사혈만을 정확히 노리는 공격 중에 제대로 적중되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좀 맞아라!”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회피하는 벽우진을 향해 빙화파산존이 다시 한 번 노성을 터트리며 공력을 가일층 끌어올렸다.
그러나 점점 더 빨리지는 공세에 맞춰 벽우진의 움직임 역시 점점 더 표홀해졌다.
“우와···.”
“지금 펼치시는 거 천기신보 맞지?”
“신행미종보 아냐?”
신묘한 움직임으로 빙화파산존을 농락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잔뜩 긴장해서 두 눈에 핏발이 잔뜩 서 있던 제자들이 감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신들도 배운 절기이지만 벽우진이 펼치니 확실히 격이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벽우진이 왜 그렇게 자신만만해 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십존이라 불리는 거물을 벽우진은 말 그대로 농락하고 있어서였다.
“크아아아! 죽여 버리겠다!”
결국 참다못한 빙화파산존이 괴성을 지르는 모습에 제자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빙화파산존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너무나 살벌해서였다.
동시에 진정한 고수가 지닌 힘이 얼마나 대단하며 위협적인지 온몸으로 깨달았다.
“이거 덜떨어진 놈이었네?”
이죽대는 얼굴로 회피만 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결국 빙화파산존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더불어 그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살기와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새하얀 냉기가 사방을 일시에 덮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운이 흩뿌려졌던 것이다.
쑤아아앙!
그와 동시에 무지막지한 기운이 서린 백색의 권강이 벽우진에게 쇄도했다.
벽우진을 그대로 집어삼킬 법한 크기의 권강이 벼락처럼 뿜어졌던 것이다.
“흠.”
그 모습에 벽우진도 더 이상 뒷짐을 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전력을 다하는 빙화파산존의 무위는 결코 경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어서였다.
콰아아앙!
게다가 벽우진은 피할 수도 없었다.
호법들이야 괜찮았지만 제자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왼손만 들어 올렸다.
“걸렸구나!”
처음으로 들린 폭발음에 빙화파산존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일단 한 번 부딪치면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기 때문이다.
음한기공이나 양강기공이 괜히 무서운 게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다른 특성이 있고, 그 특성을 무시하기가 힘들었기에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뭘 걸려?”
“어?”
“설마 하니 고작 이 정도 냉기로 날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너무 오만한데.”
“······!”
빙화파산존의 동공이 흔들렸다.
분명 제대로 충돌했음에도 불구하고 벽우진의 왼손이 너무나 멀쩡해서였다.
최소한 서리라도 맺혀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인데 벽우진의 손에는 물기 하나 맺혀 있지 않았다.
“손님에 대한 배려는 이쯤하면 되겠지? 그래도 먼 곳에서 왔는데 곧바로 죽으면 억울하니까.”
콰우우우!
빙화파산존이 전력을 끌어올렸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뇌리에 경종이 울려서였다.
더불어 벽우진을 무시하던 생각 역시 싹 다 사라졌다.
이제야 벽우진이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제대로 직시한 것이다.
‘이번 공격으로 끝내야 해!’
길게 가면 자신이 불리하다는 생각에 빙화파산존은 자신의 비전절기를 준비했다.
구명절초라고 할 수 있는 최후의 무공이었지만, 보는 눈들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아니라면 벽우진을 끝장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였다.
그렇기에 빙화파산존은 평생을 수련한, 지금껏 몇 번 펼치지 않았던 무공을 펼치려 했다.
덥석!
다만 문제는 벽우진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점이었다.
“어?”
사방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극한의 냉기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듯이 벽우진의 손이 그의 뒷목을 잡았다.
접근과 동시에 왼손을 뻗어 한참이나 큰 그의 뒷덜미를 벼락같이 낚아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빙화파산존이 본 것은 갈색 빛이 도는 땅바닥이었다.
콰앙!
벽우진이 뒷덜미를 잡은 순간 그대로 땅에 냅다 찍어버렸던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두 배 가까이 차이 나는 거구의 빙화파산존을 말이다.
“쿠엑!”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들어온 기습과도 같은 일격에 빙화파산존이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런 소리를 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두 눈은 물론이고 콧구멍과 입 속으로 들어오는 텁텁한 곤륜산의 흙 맛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어르신!”
그 광경에 당연히 빙화파산존이 이길 거라 예상했던 감숙성의 무인들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광경에 하나같이 다들 기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부름에도 빙화파산존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던 것이다.
퍼퍼퍽!
그런데 머리의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벽우진의 폭력이 시작되었다.
말 그대로 두 발로 빙화파산존을 지르밟았던 것이다.
엎어져 있는 빙화파산존의 등짝이며 팔다리며 가리지 않고 이어지는 발길질에 곤륜파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어느새 합류해서 1200명가량 되는 감숙성의 무인들도 입을 쩍 벌렸다.
오직 호법들만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무덤덤한 눈빛을 뿌리고 있었다.
“끄아아악!”
이어지는 폭력에 빙화파산존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물론 빙화파산존도 순순히 당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자세가 불리하다고 하나 그가 걸어온 사선들도 만만치 않았다.
때문에 어떻게든 벽우진의 권역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그 무엇 하나 성공하지 못했다.
부르르르!
무려 한 식경 가까이 이어진 잔인한 폭력에 빙화파산존이 축 늘어졌다.
모든 것을 얼려버리며 산산조각 내는 북해의 잔혹한 고수가 복날에 두들겨 맞은 개 마냥 대(大)자로 퍼진 모습에 호법들을 제외한 모두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빙화파산존이라고 하기에 기대했는데, 영 부실하네?”
“그러기에 나한테 넘기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장문인의 격을 생각해서라도.”
“언제부터 제 품격을 신경 써 주셨다고요.”
“크흠!”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진구가 헛기침을 했다.
벽우진의 면박에 달리 할 말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연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보는 순간 빙화파산존이 나쁘지 않은 상대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였다.
“그리고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꿀꺽!
정신을 잃은 빙화파산존의 머리에 발을 올리며 벽우진이 싸늘한 눈빛으로 몰려온 무인들을 주시했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무인들이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눈빛에 딱히 살기라고 할 기운이 담겨 있지 않음에도 왠지 모르게 몸이 바짝 얼었던 것이다.
동시에 많은 이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고 보니 손님이 아직 남아 있었구려.”
파앙! 팡!
벽우진의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 않기에 진구가 히죽 웃었다.
반면에 설백을 비롯한 호법들은 시종일관 무덤덤한 눈빛이었다.
개인의 수행을 중시하는 도인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살생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5년 동안 곤륜파를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했기에 호법들은 오늘 만큼은 살계를 열 생각이었다.
“주, 죽여!”
“숫자는 우리가 더 많다!”
“이참에 청해성도 정복하는 거다!”
“우아아아!”
빙화파산존을 너무나 가볍게 쓰러뜨린 벽우진의 무위에 잔뜩 얼어 있던 무인들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분명 벽우진의 무위는 대단했지만 그래봤자 혼자였다.
또한 구릉 위의 인원들을 모두 합쳐 봐야 스무 명도 채 안 되었기에 빙화파산존을 따라 온 무인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흠.”
하지만 천이백여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달려드는데도 벽우진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개미떼를 연상케 할 정도로 엄청난 숫자였지만 아까 전 말했던 대로 어중이떠중이들만 모여 있을 뿐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절정고수도, 최절정고수도 제법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이쪽에는 진구가 있었다.
“막내야.”
“으랏차!”
가장 연장자인 설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구가 뛰쳐나갔다.
언덕에서 크게 뛰어내리며 저돌적으로 달려 나갔던 것이다.
그 모습에 설백을 비롯한 호법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인인지 도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서였다.
“우리도 가지.”
“예.”
“오랜만에 몸 좀 풀겠군요.”
연단가인 비현을 제외한 일곱 명이 설백을 보좌하듯 좌우로 길게 흩어졌다.
전선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이유의 중심에는 제자들이 있었다.
무공에 막 입문한 제자들을 전투에 참여시킬 마음이 없기에 다들 똑같은 마음으로 각오를 다졌다.
‘혹시 모르니까 말이지.’
벽우진이 남아 있다고 하나 숫자가 워낙에 많았다.
그렇기에 설백은 물론이고 다른 호법들 역시 가급적이면 진격해오는 적들을 단 한 명도 통과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늙은이들이!”
“관 짝에나 들어가!”
하나같이 백발이 성성한 호법들의 모습에 감숙성의 무인들이 도발하듯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의 최후는 전부가 똑같았다.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목이 잘리든 몸통이 터져나가든 죽어서야 호법들의 지근거리에 도착했던 것이다.
“무, 무슨!”
“자자, 잠깐만!”
호기롭게 달려들던 절정고수들이 별다른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썰려버리거나 폭사하는 광경에 뒤따르던 무인들이 멈칫거렸다.
분명 자신들의 숫자가 몇 십 배나 많았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은 이들은 없었다.
누구도 부나방이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멈춘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미 검을 뽑은 이상, 결과는 하나뿐이지.”
“죽던가, 죽이던가. 그게 무인의 숙명 아니더냐.”
< 제 18장. 곤륜산에는 패선(覇仙)이 산다.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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