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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60화 (60/325)

< 제 18장. 곤륜산에는 패선(覇仙)이 산다. -02 >

또르륵.

조용한 집무실에 깊은 차향이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손수 재배해서 직접 말린 화차(花茶)에서 그윽한 향기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갖은 정성이 들어간 화차를 받았음에도 양선의 얼굴은 어두웠다.

“막을 수 있을까요, 문주님?”

“사석에서는 편히 말하래도.”

“어떻게 그래요.”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를 향해 양선이 고개를 저었다.

달리 설 대모(大母)라 불리는 그녀와 아무리 특별한 사이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단 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애가 나이를 먹더니 점점 더 꼬장꼬장 해져가네. 어렸을 때는 그렇게 귀엽더니만.”

“저도 이제 서른이 훌쩍 넘었으니까요.”

“시집도 안 가고 밤새 일이나 하니 그렇게 먹었지. 요새 만나는 남자는 없고?”

노파가 마치 진짜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친근하게 물었다.

하지만 양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남자에는 관심이 없어요.”

“쯧쯧! 좋은 시절은 딱 한때이건만. 지금이 지나가면 더 이상 없어.”

“혼례를 올릴 수 없는 몸이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왜 못 해. 사지육신 멀쩡해, 돈도 잘 벌어. 거기에 영리하기까지 한데 왜 혼인을 못 해? 나야 늙은 꼬부랑 할머니라서 어쩔 수 없다지만. 만약 내가 네 나이였다면 나는 한 번이 뭐야. 갈 수 있는 만큼 식을 올렸을 것이야.”

노파가 끌끌 웃으며 말했다.

그녀에 비하면 양선은 정말 한창 때였기 때문이다.

“석녀(石女)를 어느 남자가 거두겠어요.”

“다르게 생각하면 정말 좋은 게 석녀인데 말이지.”

“기녀로서는 타고 난 재능일지 모르나, 전 그 생활에 진절머리가 나요.”

후르릅.

노파가 말없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리 그녀라도 뭐라 할 수가 없어서였다.

때문에 그녀는 묵묵히 화차만 들이켰다.

“지금쯤 만났을 텐데,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네요.”

“네가 생각하기에는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냐?”

“조금, 힘들지 않을까요. 다른 이도 아니고 십존의 일인으로 보이는 이가 직접 나섰으니까요. 물론 십존이라고 해서 다 같은 수준은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껏 드러난 십존의 무위를 생각하면 대호방주라도 오십 초를 채 견디지 못할 것으로 예상돼요.”

“오십 초라.”

노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 역시 양선과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대호방주가 청해성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무인이라고 하나 중원 전체에서 보면 평범한 고수에 불과했다.

반면에 북해빙궁의 십존들은 무지막지한 무위를 선보이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화산검제와 벽력도왕을 처치한 것이었고.

‘정말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지.’

적어도 검술 하나만으로는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는 이가 화산검제였다.

한데 그런 무인이 검에 무너졌다.

십존의 일인인 옥면검존에게 말이다.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녀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설마 하니 똑같은 검객에게 무너질 줄은···.’

그뿐만 아니라 벽력도왕마저도 어렵지 않게 쓰러뜨린 십존의 무위에 그녀는 경악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빙혼강시보다 그녀는 십존이 훨씬 더 무서웠다.

빙혼강시가 아무리 끔찍한 마물이라지만 상대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십존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막막했다.

삼제오왕칠성 중에서도 손꼽히는 무인이라 할 수 있는 화산검제와 벽력도왕이 죽었기에 누구로 상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문주님?”

“아,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뭐라고 했느냐?”

“감숙성에서 넘어온 무인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요. 호법들이 있고, 비호표국의 인원들이 남아 있다고 하나, 그래도 중과부적이에요. 심지어 청하상단은 서녕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상태고요.”

“서신을 보냈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둘 중에 하나겠지.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상대할 자신이 있던지, 아니면 숨겨 놓은 비장의 한 수가 있던지.”

양선의 표정이 달라졌다.

사천당가의 기술자들이 곤륜파 내부에서 비밀스럽게 공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양선은 이내 고개를 작게 저었다.

어떤 공사일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곤륜파에 들어간 자재의 양을 생각해볼 때 결코 작은 공사는 아니었다.

그런 만큼 공사가 끝났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곤륜파가 패배하면 청해성도 순식간에 북해빙궁의 손에 넘어갈 거예요.”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단다.”

“···그렇지요.”

양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력으로는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곳이 하오문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딱 거기까지였다.

무력은 별 볼일 없었다.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에 어떻게든 뛰어난 무공서를 구해서 고수를 양성하려고 했지만 사방에서 들어오는 방해공작으로 인해 매번 실패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떻더냐? 북해빙궁이 이길 것 같아?”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은데, 이상하게 기대가 되요. 곤륜파의 장문인이 무언가를 보여줄 것만 같다고나 할까요.”

“종 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 평했지?”

“제가 보기에는요. 저조차도 가늠이 되지 않는 인물이라고나 할까요.”

“만천독황과도 인연이 있고 말이지.”

당민호를 거론하는 말에 양선이 눈을 빛냈다.

전대의 고수이자 독인의 경지를 넘어 독성에 이른 당민호가 만약 곤륜파에 있다면 상황은 단번에 역전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기색을 읽은 것인지 노파가 고개를 저었다.

“만천독황은 사천당가에 있다. 어제 저녁에 장원에 있는 걸 확인했지. 아무리 그가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반나절 만에 곤륜산에 오는 건 불가능해.”

“으음!”

“그러니 이번의 위기는 곤륜파 혼자서 이겨내야 한다는 소리지. 그것도 핏덩어리들을 데리고서 말이야. 근데 네 말을 들으니 나도 기대가 되는구나. 만약에 곤륜파의 장문인이 십존을 쓰러뜨린다면···.”

“흐름이 바뀔 것입니다. 또한 많은 변화가 일어날 테고요.”

양선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노파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벽우진이 십존을 제압한다면, 아니 쓰러뜨린다면 새로운 바람이 일어날 터였다.

중원무림의 명문정파들은 머리가 복잡해지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도 한 번 만나보고 싶구나. 그토록 기이하다던 장문인을 말이다.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안면을 터 놓아서 나쁠 것은 없지.”

“일단은 결과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미 끝났을 지도 모르겠구나.”

노파가 알 수 없는 얼굴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양선은 차를 마시기보다는 창밖을 응시했다.

멀리 곤륜산이 있는 방향을.

휘이이잉!

한 여름이건만 왠지 모르게 두 사람을 가로지르는 바람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벽우진과 빙화파산존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에 바람이 물든 것이었다.

“확실히 본파가 얕잡아 보이기는 하는 모양이야. 기껏해야 한 명만 보낸 것을 보면.”

“오히려 과분한 처사지. 빙혼강시 두 구를 잡은 것뿐인데 이 몸이 직접 왔으니까.”

“영광이라고 대답해주어야 하나?”

벽우진이 이죽거리듯이 말했다.

그러나 빙화파산존도 만만치 않았다.

벽우진의 도발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 넘겼던 것이다.

“당연히 영광이라고 생각해야지.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몸의 손에 직접 죽게 될 테니까. 적어도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죽는 것보다는 십존의 일인인 내 손에 죽는 게 더 낫지.”

“자신감이 상당해.”

“그건 네놈에게 돌려주고 싶은데. 곤륜산으로 몰려오는 걸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다니. 심지어 애송이들까지 데려오고 말이야.”

빙화파산존의 싸늘한 눈빛이 벽우진의 너머로 향했다.

그곳에는 곤륜파의 문도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누가 봐도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아이들이 말이다.

심지어 여차하면 병기를 뽑아들고서 달려들 것처럼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에 빙화파산존은 실소가 절로 나왔다.

“다 훈련을 위해서다. 간접적으로라도 실전을 겪었으면 했거든. 그리고 생사결하고 전쟁은 또 다르니까. 개미떼처럼 달려드는 전쟁을 언제 또 보겠어? 일종의 조기교육인 셈이랄까.”

“푸하하핫!”

어이가 없어도 너무나 어이가 없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빙화파산존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그뿐만 아니라 감숙성에서 넘어온 사도(邪道)와 정사중간의 방파들에 속해 있는 무인들 역시 두 눈에서 살기를 뿜었다.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자신들을 무시하고 있음을 너무나 명백히 느낄 수 있어서였다.

“그러니 슬슬 시작하자고. 내가 오늘 일정이 좀 빡빡해서 말이지.”

“오만한 게 아니라 정신 나간 놈이었구나.”

“놈놈 거리지 마라. 이래 보여도 네놈보다 나이가 훨씬 많으니까.”

“난 나이로 윗사람을 정하지 않아. 나보다 강하느냐, 약하느냐가 중요하지.”

목젖이 보일 정도로 파안대소를 터트리던 빙화파산존이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두 주먹을 그러쥐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보기에는 천둥벌거숭이 같은데.”

“그럴 리가.”

“뭐, 그럴 수밖에 없기는 하겠지만. 산기슭에 서 있는데 산 전체가 가늠이 되겠어. 어림짐작만 할 수 있겠지.”

타아앗!

세상 여유로운 태도로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벽우진을 향해 빙화파산존이 땅을 박찼다.

시시껄렁하게 지껄이는 저 주둥이부터 일단은 뜯어내고 훈계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운신이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나름 청해성에서는 고수로 인정받는 무인이 벽우진인 만큼 빙화파산존은 긴장의 끈을 아예 놓지는 않았다.

‘그래봤자 별 거 아닐 테지만.’

빙화파산존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 대단하다던 화산검제 역시 십존의 일인인 옥면검존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물론 그의 수준이 옥면검존과 비슷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화산검제와 싸울 때 빙화파산존은 느낄 수 있다.

십할의 승리를 장담하지는 못하더라도 삼제(三帝)의 일인인 화산검제에게 쉽게 지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다.

‘화산검제와 비교하면 쓰레기지. 조족지혈이라는 말도 아까운.’

빠르게 가까워지는 벽우진의 얼굴을 주시하며 빙화파산존이 입매를 비틀었다.

제법 무위가 높아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망해버린 문파의 수장이었다.

더구나 누가 봐도 강자의 기도를 풍겼던 화산검제와 비교하면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품격이 낮은 인물이었기에 빙화파산존은 이번 일격에 벽우진이 처참하게 주저앉을 것을 의심치 않았다.

부우우웅!

극한의 냉기를 머금은, 북해의 만년설보다 더한 한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주먹이 벽우진의 안면을 정확히 노리고서 파고들었다.

단 한 방에 머리통을 날려버리겠다는 무지막지한 일권이었다.

그런데 맹렬한 기세로 뻗어나가던 빙화파산존의 주먹이 빈 허공을 얼렸다.

목표했던 벽우진의 얼굴이 아닌 텅 진 허공을 강타했던 것이다.

“어?”

눈곱만큼도 자신의 일격이 실패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빙화파산존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그는 빠르게 벽우진을 찾았다.

한데 벽우진의 위치를 확인한 빙화파산존이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놀랍게도 벽우진은 그의 주먹을 고개만 옆으로 꺾어 피해냈던 것이다.

“흐아암!”

심지어 여전히 뒷짐을 지고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모습에 빙화파산존의 동공에서 불꽃이 일었다.

“이 놈이!”

< 제 18장. 곤륜산에는 패선(覇仙)이 산다.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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