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8장. 곤륜산에는 패선(覇仙)이 산다. -01 >
곤륜파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해갔다.
새롭게 입문한 제자들로 인해 을씨년스러웠던 분위기가 말끔히 사라졌던 것이다.
더불어 매일 같이 뜨거운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물론 비호표국의 경우 기합이라기보다는 신음 쪽에 가까웠다.
진구가 워낙에 지독하게 굴리니 쟁자수들은 물론이고 표사들도 다 앓아누웠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실력 역시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힘들어도 절정무공을 배웠기에 악착같이 버티기도 했고 말이다.
“흐으음.”
때문에 벽우진은 비호표국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의외로 진구가 무공교두에 소질이 있어서였다.
물론 훈련을 받는 사람들이야 죽어나가겠지만 그래도 실제로 죽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근심이 많아 보이십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요. 대련을 많이 했다고 하나, 실전은 엄연히 다르지 않습니까.”
웬일로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낸 설백을 향해 벽우진이 조금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양선에게서 들은 소식이 있기에 얼굴에 근심걱정이 서려 있었던 것이다.
“장문인께서도 걱정이라는 것을 하시는군요. 허허허.”
“저도 사람이니까요. 아직은 사람이고 싶기도 하고요.”
설백이 빙그레 웃었다.
다른 이는 몰라도 오직 그만은 벽우진이 말한 의미를 알고 있어서였다.
동시에 다시 한 번 벽우진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벽우진의 나이 때 고작해야 길을 찾았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숫자가 많다고 하나, 별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희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다들 정이 많이 들어서 말이지요.”
설백의 인자한 눈빛이 둘씩 짝지어 대련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설백은 유독 도일수를 유심히 쳐다봤다.
“다른 걱정은 안 합니다. 다만 실전의 무게를 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시겠지만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미리 겪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보기보다 심지와 의지가 굳센 아이들입니다.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전면에 나설 일도 없을 테고요.”
“그래도 워낙에 많은 이들이 이동 중이라. 제일 위험한 칼이 눈 먼 칼이지 않습니까.”
벽우진은 사실 전쟁이 두렵지 않았다.
질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이제 막 무공에 입문한 제자들이었다.
약하게 키우지도 않았고, 다들 그릇을 완성한 상태였지만 그래봤자 실전 경험 하나 없는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오히려 이번을 기회로 더 큰 성장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인이라면 한 번쯤 꼭 겪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흐음.”
“저희들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주시길.”
설백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벽우진에게는 너무나 믿음직스럽게 다가왔다.
다른 이도 아니고 설백이 직접 뱉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저도 있습니다, 사형.”
“청민아.”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벽우진의 곁으로 청민이 다가왔다.
한데 그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완숙한 반박귀진의 경지인 듯 기도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노도사로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고 너무 자만하지는 말고. 아이들보다 낫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방심하다가 훅 간다.”
“명심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너무 혼자 짊어지지 않으셨으면 해서요.”
“어쩔 수 없어. 내가 선택한 길이니. 그리고 아직 넌 그런 표정 짓기에는 이르다. 한참 멀었어, 인마.”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배우고 있는 중이고요.”
“더 분발해.”
칭찬을 해줄 수도 있지만 벽우진은 그렇지 않았다.
곤륜파의 상황이 그렇게 여유롭지만은 않아서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빠르네요. 전 여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십존의 무위가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해서겠지. 화산검제와 벽력도왕이 일대일로 싸워서 패배했으니까.”
“어쩌면 그 중 한 명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무시해서 따까리들만 보낼 수도 있고. 다만 문제는 그 정도만으로도 위협적이라는 거지.”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양선이 보내준 서신에는 예상치 못한 숫자가 적혀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가 죽을 벽우진이 아니었다.
“필교도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 집 앞마당인 만큼 유리한 쪽은 우리야. 게다가 우리는 알고 있기도 하고. 그러니 준비는 나에게 맡기고 청민이 넌 애들이나 잘 다독여. 각오를 했다고 하지만 막상 닥치면 달라질 수 있으니.”
“예.”
벽우진의 시선이 동쪽으로 향했다.
휘이익!
하나의 그림자가 빠르게 숲속을 갈랐다.
그런데 뒷짐을 지고 날아가는 인영의 뒤로 수십, 수백 개의 사람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했다.
우거진 수풀로 인해 잠시 가려졌다가 나타났던 것이다.
“쯧쯧!”
한데 뒤따라오는 이들을 향해 선두에서 달려가던 백발의 장년인이 혀를 찼다.
고작 이 정도 속도에 헉헉거리는 게 그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약해빠졌어.”
사문의 무인들하고는 너무나 비교되는 경공에 장년인이 고개를 저었다.
실망스러워도 그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이 정도 수준 밖에 안 되니 저항은 아예 생각도 하지 못했을 터였다.
“크흠!”
하나 그렇다고 온전히 이해한 건 또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낙오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어서였다.
처음 집결시킬 때만 해도 이천 명에 근접했던 숫자가 지금은 15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에는 더더욱 줄어 있을 터였다.
“천 명이 넘을지 모르겠군.”
오십보백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좀 나은 녀석들이 있기는 했다.
가까스로 그와 일정거리를 두고서 따라오는 이들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소수에 불과했다.
“뭐,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근성도 없고, 눈치만 살피던 기회주의자들을 집결시켜 데려온 것이었기에 장년인은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머릿수를 채우려고 데려온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년인은 낙오자가 늘어나건 말건 계속해서 나아갔다.
“곤륜파의 새 장문인이라. 실력이 어느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 몸이 직접 움직였는데 허약한 놈이 있으면 그것만큼 허무한 일도 없으니.”
장년인은 자신을 이리 보낸 파천도존을 떠올렸다.
십존의 위치는 동등하지만 그렇다고 무경이 똑같지만은 않았다.
열 명 중에서도 무공의 고하는 비교적 뚜렷했다.
그 중 궁주님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옥면검존(玉面劍尊)과 파천도존은 열 명 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실력으로 따지자면 일, 이 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나이도 많은 축에 들어갔기에 아무리 같은 십존이라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궁주님께서도 궁금해 하셨다고 하니.”
장년인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만약 궁주님께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파천도존의 권유에도 그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역시 파천도존의 생각에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지금이야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하나 한때는 구파일방이라는 이름하에 깊게 엮여있던 곳이 곤륜파였다.
그런 만큼 겉으로는 데면데면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연막작전을 펼치는 중일 지도 몰랐다.
“이래나 저래나 거슬리는 건 사실이니까. 그럼 밀어버려야지.”
몇 십 년 동안 천하를 위진 시켜 왔던 화산검제와 벽력도왕이 죽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주인공은 북해빙궁이 될 터였다.
“장강 이남 지역은 잠시 맡겨두는 것뿐이니까.”
수백 년 동안 쌓아온 북해빙궁의 힘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단독으로도 중원무림 전체와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도 오독문과 손을 잡은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천년마교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오독문 역시 그 부분을 염려했기에 북해빙궁과 손잡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두 곳 다 오랜 세월을 준비했지만 천년마교를 단독으로 상대하기에는 똑같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동맹을 맺을 생각은 없었다.
“오독문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말이지.”
장년인이 묘한 눈빛을 뿌리며 중얼거렸다.
결국 하늘 위에 떠 있는 태양은 하나뿐이었다.
또한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함께 지낼 수도 없었고.
“음?”
뒷짐을 진 채로 여유롭게 경신술을 펼치던 장년인이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언덕 위에 하나의 인영이 나타나서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뒤로 노도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마중을 나온 건가.”
“헉헉! 혹시 적입니까? 어르신?”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얼굴 가득 비지땀을 흘리며 가까스로 뒤따라오던 중년인이 소매로 이마를 훔쳤다.
그러면서 장년인을 힐끔거렸다.
강할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정말 상상 이상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어서였다.
다들 달리는 것만으로도 죽을상을 하고 있는데 장년인은 하루 종일 달렸음에도 마치 막 경신술을 펼친 것처럼 멀쩡했다.
‘역시 납작 엎드리기를 잘했어.’
염소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인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도 나름 감숙성에서는 무명이 있는 무인이었지만 장년인하고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아니, 처음으로 대면한 순간 그는 알았다.
자신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기회를 잘 살려야 해. 저 분의 눈에 들어야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시류를 읽을 줄 아는 자가 진정으로 현명한 자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북해빙궁이 곤륜파를 공격하기 위해 무인들을 소집한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나섰다.
지금 잘 보여야 앞으로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서였다.
‘게다가 곤륜파도 예전의 곤륜파가 아니고 말이지.’
예전이었다면, 멸문하기 전의 곤륜파였다면 그는 절대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부와 명예도 좋지만 그 모든 건 살아 있을 때나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시체가 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기에 아무리 북해빙궁이 닦달을 하더라도 나서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곤륜파는 달랐다.
‘장문인과 호법들이 한 가닥 한다고 하지만 그래봤자 열한 명일뿐이지.’
중년인이 조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강해도 인해전술에는, 물량공세에는 어쩔 수 없었다.
뒷골목 왈패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다구리에는 장사 없는 법이었다.
‘앞으로는 북해빙궁과 오독문의 시대다. 그야말로 판도가 달라지는 거지!’
중년인의 두 눈에 탐욕이 짙게 서렸다.
앞에 있는 장년인의 심복으로서 감숙성을 호령할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격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장년인은 그런 그의 시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곤륜파더냐?”
“아니라고 하면 그냥 지나가게?”
“그럴 수는 없지. 근데 어떻게 알았지? 따로 정보조직을 운용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장년인, 북해빙궁에서는 빙화파산존(氷化破山尊)이라 불리는 그가 솥뚜껑만 한 주먹을 늘어뜨리며 형형한 안광을 뿌렸다.
그런 그의 시선은 정확히 벽우진에게 닿았다.
“여력은 없어도 도와주는 사람들은 제법 있지. 꽤나 능력 있는 이들이 말이지. 근데 고작 이 정도로 되겠어? 숫자만 많지, 어중이떠중이만 데려온 거 같은데.”
“저 자식이!”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어중이떠중이라는 말에 속속들이 합류하던 무인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숨기려 고함을 질렀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은 그런 그들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빙화파산존만 주시했다.
“근데 혼자 온 모양이야?”
“나 혼자면 충분하다 못해 과분하지. 현재의 곤륜파를 생각하면.”
벽우진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 반응에 빙화파산존 역시 웃었다.
의미는 사뭇 달랐지만 말이다.
< 제 18장. 곤륜산에는 패선(覇仙)이 산다.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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