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7장. 출렁이는 판도. -04 >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별명과도 같은 별호로 더 많이 불리기에 이제는 이름보다 별호가 더 익숙한 흑수개가 얼굴을 굳혔다.
말투만 봐도 자신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였다.
심지어 자리조차 권하지 않고 먼저 앉아버리는 벽우진의 모습에 흑수개는 자신의 임무가 역시나 쉽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먼저 약속도 잡지 않고 갑자기 찾아온 점에 대해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입에 발린 사과는 됐소이다. 어차피 하고 싶은 말만 하려고 찾아왔을 텐데.”
“으음!”
흑수개가 침음을 흘렸다.
예상했던 대로 벽우진의 태도가 너무나 쌀쌀맞아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곤륜파가 느꼈을 감정을 생각하면 문전박대를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피차 바쁠 테니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알지 모르겠는데 내가 요즘 많이 바쁜 상태라서 말이오.”
“장문인께서 느끼지는 서운한 감정에 대해서는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잘못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요.”
“이제 와서야 느끼는 것이지 않소. 한 손이라도 아쉬우니까. 예전에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다가.
“그게 사정이 있었습니다. 다들 큰 피해를 입기도 했고, 사천당가는 봉문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흑수개가 어색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칼 같이 쳐내려는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도 만만치 않았다.
“본파는 멸문을 입었지. 심지어 청민이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이 하나 없고. 뭐, 이해는 하오. 아무래도 자기 식구부터 챙길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나라도 그랬을 테고.”
“그, 그렇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음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
“그건, 그러니까···.”
흑수개의 얼굴에서 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더불어 그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악취 역시 더욱 짙어졌다.
땀이 나오자 체취와 섞이며 기기묘묘한 악취를 생성했던 것이다.
그 냄새에 벽우진이 콧잔등을 살짝 찡그리며 후각을 차단했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하던 내 대답은 같소이다. 아마 분타주 역시 알고 있겠지만.”
“장문인! 한 번만,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다시 시작할 기회를요.”
“그 동안 시간은 충분했다고 생각하오만. 그리고 썩 보기 좋은 광경도 아니고.”
벽우진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쉬울 때가 되어서야 손을 내미는 게 그로서는 너무나 역겨워서였다.
속이 너무 훤히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 잠시만 제 말씀을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반 각도 안 걸립니다.”
“굳이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알고 있겠지만 현재 본파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은 상황이라. 사천당가와 달리 본파는 피해를 아직 복구하지 못한 상태이기도 하고.”
“잠시면 됩니다, 아주 잠시면요.”
에둘러 말하는 축객령에 흑수개가 간절하게 매달렸다.
이렇게 제대로 된 말도 못하고 쫓겨나게 되면 방주에게 불호령이 떨어질 게 분명해서였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에도 곤륜파의, 정확하게는 벽우진과 호법들의 도움이 필수였다.
지금의 상황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말이다.
“무슨 말을 할 지 다 아오. 결국에는 도와달라는 거 아니오?”
“본방은 물론이고 소림사와 제갈세가도 약속을 했습니다. 만약 이번에 장문인께서 도움을 주신다면, 다시 한 번 중원무림을 구원해 주신다면 곤륜파의 재건에 갖은 지원을 다하겠다고요. 여기 방장님과 제갈가주님의 직인이 찍힌 서신도 가져왔습니다!”
흑수개가 납작 엎드리며 두 손으로 서신을 내밀었다.
그런데 품속 깊게 안고 있었는데 서신에서 흘러나오는 고린내가 장난이 아니었다.
벽우진의 눈매가 자기도 모르게 찌푸려질 정도로 말이다.
“말뿐인 약조 아니오? 본파가 다시 한 번 멸문지화를 입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싹 닦을 테고.”
“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확신할 수 있소? 분타주 정도의 직급으로?”
“······.”
흑수개의 얼굴이 더욱 검게 변했다.
무림은 무인들의 세계이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인 만큼 황궁 못지않게 협잡질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지금이야 급한 상황이니 백지전표를 내밀 듯 이렇게 약속을 하지만 곤륜파가 다시 한 번 멸문지화를 입으면 모른 척 할 게 분명했다.
오히려 화산파나 종남파를 지원해줄 가능성이 더 컸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으니까.’
곤륜파 역시 한때는 구파일방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문파지만 이제는 너무 오래된 얘기였다.
하물며 적지 않은 교분을 맺고 있던 공동파와 점창파 역시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자 반쯤 포기한 이들이 아니던가.
곤륜파는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북해빙궁과 오독문의 야욕에 수많은 무인들이, 후기지수들이 애꿎게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제발 힘을 빌려주십시오.”
흑수개가 두 손으로 서신을 든 채로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거의 조아렸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머리는 물론이고 허리조차 깊게 굽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벽우진의 표정은 더욱더 싸늘해졌다.
사천당가를 찾은 제갈명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말을 흑수개가 하고 있어서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허술한데. 아니면 본파가 그 정도로 만만하게 보였던 건가?”
“예?”
벽우진의 말투가 달라졌다.
그 변화에 흑수개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제갈명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잖아, 그 쪽이.”
“그게 무슨···.”
“마치 짜고 치는 것처럼. 얕잡아 봤다면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자존심이 상하는데.”
“절대,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만 명문대파인 만큼 다시 한 번 아량을 베풀어 주시면 안 될까 싶어 말씀드린 것입니다. 곤륜파는 의와 협을 아는 문파이지 않습니까.”
흑수개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벽우진은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어려 보인다고, 세상 경험이 적다고 자신을 너무 무시하는 게 눈에 보여서였다.
“명문대파도 이제는 과거의 말이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문파가 본파 아니었던가. 중원무림은 아예 잊어버렸고.”
“그렇지 않습니다!”
흑수개의 외침이 방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벽우진의 표정은 더욱더 굳어질 따름이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던 것이다.
“어쨌든 답은 거절이야. 본파는 그럴 여력이 없다.”
“장문인과 호법들이 나서준다면 분명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가? 여력이 없다고. 그리고 장난질을 눈 감아 준 걸로 감지덕지하지는 못할망정. 설마 사마세가가 뒷공작을 한 것을 모를 줄 알았더냐?”
부르르르!
태산 같은 벽우진의 기도에 흑수개가 몸을 떨었다.
묵직한 기세에 절로 압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공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반응했다.
물론 창졸간에 사라졌지만 벽우진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면 개방도 더 이상 예전의 개방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아니면 너에게는 통제가 되었거나.”
“그럴 리가···.”
흑수개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이미 복잡해질 대로 복잡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곤륜파를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가라. 괜히 본파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꾸물꾸물 거리면 내가 직접 손을 쓸 것이다.”
“···다음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장문인.”
단호한 축객령에 흑수개가 뜯지도 않은 서신을 다시 품속에 넣으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기가 팍 죽은 모습으로 접객당을 나섰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도 벽우진에게는 연기로 보였다.
“염치없는 것들.”
벽우진이 중얼거렸다.
물론 그 말은 멀어지던 흑수개의 귓전에 정확히 파고들었다.
하나 흑수개는 감히 그 말에 딴죽을 걸지 못했다.
곤륜파와 벽우진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
‘후우. 예상은 했지만 더 심하구나.’
곤륜파를 외면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흑수개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사과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었고.
벽우진의 말마따나 그는 고작 청해성의 서녕 분타주일 뿐이었다.
‘일단은 보고부터 해야지.’
방주의 역정이 걱정되었지만 그로서는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렇기에 흑수개는 홀가분하게 곤륜파를 떠났다.
“실패했단 말이지.”
“예.”
사방이 꽉 막힌, 창문조차 없는 완전 폐쇄된 방 안에서 사마륭이 느릿하게 차를 들이키며 물었다.
그러자 앞에 부복해 있던 장년인이 짧게 대답했다.
“단칼에 거절했다라. 그렇게 자신의 무위에 자신이 있나? 북해빙궁과의 격돌은 피할 수가 없을 텐데?”
사마륭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껏 북해빙궁이 보여준 태도는 명확했다.
휘하로 들어오던지, 아니면 멸문하던지.
그 중에 저항했다가 복속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면 사천당가를 믿고 있는 건가?”
제갈세가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제갈명이 직접 사천당가를 찾아갔다는 소식은 그 역시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독제독이라고 오독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사천당가가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소원해진 관계 개선을 위해서라도 사천당가와 끈을 만들어 두는 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사천당가 역시 힘을 합치자는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지도상으로는 가깝다고 하나, 그렇다고 또 아주 인접해 있는 건 아닌데 말이지. 게다가 전력을 대부분 회복한 사천당가와 달리 곤륜파는 이제 막 재건을 시작한 단계고.”
사마륭의 시선이 탁자 위의 지도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청해성과 사천성, 감숙성과 운남성으로 말이다.
이 중 사마륭은 특히 청해성과 감숙성을 주시했다.
“곤륜파와 공동파가 연합해서 북해빙궁의 뒤를 노리고, 사천당가와 점창파가 합심해서 오독문을 상대하는 게 가장 좋은 그림인데 말이지.”
사마륭이 입맛을 다셨다.
잔뜩 성이 나 있지만 힘이 부족한 공동파와 점창파는 곤륜파와 사천당가가 힘을 보태면 얼씨구나 하면서 북해빙궁과 오독문에게 달려들 터였다.
두 곳에게 있어 북해빙궁과 오독문은 사문을 멸문시킨 불구대천의 원수였으니까.
그런데 그 그림은 말 그대로 그림으로 끝나고 말았다.
“뒤에서 흔들어줘야 앞으로의 전투가 편해지는데 말이지.”
제갈세가가 무당파를 도와 오독문을 상대하고 있듯이 사마세가는 소림사를 중심으로 규합된 명문정파들과 함께 북해빙궁과 싸우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머리가 복잡했다.
쓸 만한 패라고 생각했던 두 곳이 좀처럼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서였다.
“도대체 뭘 바라는 거지? 그 정도면 감지덕지 아닌가? 물론 기분은 나쁘겠지만 연합전선을 꾸리는 게 앞으로를 생각하면 나쁠 게 없는데? 고집을 꺾으면 그 이상의 실리를 챙길 수 있는데 말이지.”
사마륭이 인상을 썼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벽우진의 저의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더구나 그는 제갈세가주와 마찬가지로 북해빙궁과 오독문만 보고 있지 않았다.
그 너머까지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답답했다.
“분명 천년마교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텐데. 그냥 아무 생각 없는 독불장군인 건가?”
곤륜파의 장문인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에는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다.
그렇기에 사마륭은 섣불리 확단할 수가 없었다.
“답답하군.”
벽우진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가 과한 배짱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마륭은 곤륜파를 이 전쟁에 끌어들이고 싶었다.
피해를 최소화 해야만 이 다음을 준비할 수 있어서였다.
‘제갈가주는 아예 두 곳을 제외해서 그곳을 상대하게 하려는 모양인데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쓸 수 있는 패는 모조리 사용해야지.’
곤륜파의 역량은 그저 변수를 내는 게 전부였다.
그가 보기에는 저지선을 맡을 정도의 전력이 아니었기에 이참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싶었다.
더불어 곤륜파의 저력도 파악하고 말이다.
‘친해질 수 없다면 미리 쳐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니까.’
< 제 17장. 출렁이는 판도.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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