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57화 (57/325)

< 제 17장. 출렁이는 판도. -03 >

벽우진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하오문의 청해성 책임자씩이나 되는 이가 아무런 증거 없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어서였다.

“우연이 아니다?”

“예. 사마세가에서 수작질을 부린 것 같습니다. 일부러 곤륜산으로 향하도록요.”

“확실히 이상하기는 하지. 굳이 청해성 쪽으로 올 필요는 없으니까. 도망칠 곳이 꼭 청해성만 있는 것은 아닌데.”

“저희가 판단하기로는 곤륜파를 끌어들이려는 속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갈세가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 사마세가였다.

오대세가에는 들지 못했지만 적어도 열 손가락 안에는 들었고, 제갈세가처럼 지략을 중점적으로 활용하는 가문이 사마세가였기에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남의 힘을 이용해 먹는데 도가 큰 곳들이니.”

“물론 공동파의 속가제자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겠지만요. 정확하게는 경황이 없었겠지요.”

“본파는 사마세가, 사천당가는 제갈세가란 말이지. 어쨌든 알려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중요한 소식들을 최대한 빠르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래주면 고맙고. 할 말을 다 했으면 이제 그만 일어나지. 빙혼강시가 궁금할 텐데.”

벽우진이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양선 역시 반응하듯 몸을 일으켰다.

“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우리로서도 처치곤란이기도 했고.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술법사가 가지고 있던 일지도 넘겨주지. 강시공에 대한 내용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될 거야.”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뭐, 앞으로도 잘해보자고.”

벽우진이 씨익 웃으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몰락한 천검문의 뒤를 이어 청해성의 패권을 잡은 대호방의 주인인 허정근은 의동생이자 부방주인 설규를 기다렸다.

아주 중요한 정보를 알아보라고 시켰기에 전전긍긍하며 설규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똑똑똑.

그때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접니다, 방주님.”

“들어와!”

“예.”

이윽고 문이 열리며 설규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서 들어왔다.

급하게 달려온 모양인지 아직 옷에는 흙먼지가 가득했다.

“어떻게 됐어? 좀 알아낸 것은 있어?”

“아무래도 사천당가와 특별한 사이인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아미파의 금강신니가 사천당가를 찾아갔음에도 별다른 소득 없이 아미산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제갈세가에 이어 아미파도 깠단 말이지?”

“아닐 수도 있지만 연막일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게 사천당가의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괜히 독종가문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죠.”

“곤륜파와 사천당가라.”

허정근이 턱을 쓰다듬었다.

북해빙궁과 오독문이 중원을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사실 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그 대단한 구대문파에 속해 있는 공동파와 점창파가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입었다.

물론 생존자들이 제법 있고, 수없이 많은 속가제자들이 남아 있다고 하나 본산을 빼앗긴 건 타격이 컸다.

과거 어마어마한 성세를 구가했던 곤륜파 역시 본산이 불타오르면서 몰락의 길을 걷지 않았던가.

“둘이 연맹을 맺었을 가능성이 크다라.”

“아무래도 같은 처지이지 않습니까. 두 곳 다 중원무림에 버림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곤륜파의 경우 공동파의 제자들을 본산에 들여보내지 않았지.”

“저도 그게 사실 좀 아쉬웠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공동파를 끌어안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곤륜과 공동, 그리고 사천당가와 점창파가 힘을 합치면 파급력이 상당할 테니까요.”

설규가 입맛을 다셨다.

비록 멸문지화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고 하나 그렇다고 명문의 저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곤륜파와 사천당가만 있는 것보다는 공동파와 점창파가 합류하는 게 훨씬 나았다.

거기에 자신들을 비롯해서 청해성의 힘을 하나로 합친다면 북해빙궁이나 오독문도 선뜻 달려들지는 못할 터였다.

“하지만 두 곳 다 거절했지. 그 말은 달리 말하면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뜻 아니겠어?”

“무모한 배짱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죠. 사실 곤륜파에 고수는 제법 있지만 말 그대로 소수정예 아닙니까. 아니, 오히려 지켜야 할 짐들이 많은 상태죠.”

“그래서 내가 답답한 거 아냐. 어느 쪽인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으니. 강한 건 사실이지만 문제는 그 강함이 어느 정도이냐는 거지. 지금 감숙성은 쑥대밭으로 변한 거 알지? 항복한 이들은 살려두지만 반항한 곳들은 모조리 쓸어버렸어. 단 한 곳도 남김없이 모조리.”

“그리고 곤륜파는 공동파의 속가제자들을 쫓아온 북해빙궁의 무인들과 충돌했죠.”

설규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한 번 충돌한 이상 곤륜파와 북해빙궁이 싸울 것은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은 중원을 뒤덮은 전화(戰火)가 곧 청해성까지 온다는 뜻이기도 했다.

“곤륜파만 공격하지는 않겠지?”

“그 전에 결정을 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어후.”

허정근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왜 하필 지금 이 시기인지 짜증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설규의 말마따나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왕이면 빨리 말이다.

“소림을 비롯한 명문정파들이 북해빙궁을 가까스로 밀어내면 좋겠지만, 그건 그야말로 최상의 결과이고 저희는 최악의 상황도 대비해야 합니다.”

“중원무림이 굴복한 때를 말이지.”

“예.”

늘 중원무림이 세외무림의 침공을 막아낸 것은 아니었다.

암흑시기도 분명히 있었다.

다만 끈질긴 저항 끝에 중원을 다시 되찾은 것뿐이지.

그런 만큼 북해빙궁과 오독문이 중원을 정복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이번만큼 어려운 선택은 없을 것 같군.”

“저도 그렇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곤륜파가 전면에 나서서 방패막이가 되어주었으면 합니다만, 현재 상황에서는 힘들죠.”

“사실 충돌한 건 곤륜파인데 말이지.”

“어쩌면 중원무림에서 노린 걸지도 모릅니다. 북해빙궁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요. 아니면 곤륜파를 끌어들이거나. 자신들만 피해를 입을 수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잔머리는 또 기가 막히게 굴리는 것들이니까. 우리도 좀 기막히게 돌려야 할 텐데.”

허정근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딱히 좋은 묘수가 떠오르지가 않아서였다.

하지만 상황이 어느 한쪽을 택하게 강요하고 있었다.

“청해성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죠.”

“그나마 시간이 좀 있다는 것 정도일까. 하지만 곧 제대로 격돌하겠지. 소림사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공멸이 가장 좋은 결과겠지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천년마교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아.”

허정근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처음 청해성의 패권을 쥐면 모든 것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쥐는 게 많을수록 걱정거리도 그만큼 배가 되는 느낌이었다.

“곤륜파에 가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일단 의중을 알아보는 것도 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이리로 오라고 하면 안 되겠지?”

“오긴 오겠지만 일단 패악질부터 부리지 않을까요? 주먹으로 방주님과 저부터 때려잡을 것 같은데요.”

설규가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대호방이 청해성의 패권을 쥐고 있다고 하나 그가 생각하기에는 반쪽자리에 불과한 자리이고 위상이었다.

비록 세력은 대호방이 훨씬 클지 모르나 그 모든 걸 뒤집을 고수가 곤륜파에게는 있었기에 아무리 허정근이라도 조금은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겠지. 하아. 뭐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네.”

“대신 돈은 많이 거둬들이지 않습니까. 곤륜파만 제외하면 딱히 눈치 볼 곳도 없고요.”

“다른 이의 눈치를 보는 1인자를 더 이상 1인자라 할 수 있을까.”

“수많은 곳의 눈치를 보는 것보다는 한 곳만 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허정근 역시 개인적으로 궁금했다.

곤륜파의 장문인이 어떤 생각으로 북해빙궁을 적으로 돌렸는지가 말이다.

아니, 어쩌면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기는 하지만 중원무림과 모종의 약속을 맺은 걸지도 몰랐다.

‘장문인의 성격을 생각하면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정치질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으로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나았다.

그래야 대처할 때 당황하지 않을 테니까.

“아, 그리고 의외로 무모한 도전을 시도하는 것들이 제법 되는 모양입니다. 북해빙궁과 오독문을 이용해 무명을 쌓으려는 이들이 꽤 많다고 합니다.”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하니까. 충분히 모험을 할 만 하지.”

“방주님은 아니시죠?”

“당연히. 난 길고 굵직하게 살고 싶다고. 괜히 도박을 해서 가진 것을 다 날리는 멍청이가 아니야.”

허정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북해빙궁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힌다면 엄청난 무명을 얻을 게 분명했다.

또한 대호방을 지금보다 더욱 키울 수 있을 터이고.

그러나 허정근은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았다.

“정말 다행입니다.”

“일단 곤륜산에 가봐야겠어. 겸사겸사 청해성의 정세도 알려주면서 친분도 다지고. 지난번에는 너무 정신없이 나왔잖아.”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그러니까 준비해. 수행원은 소수로 후딱 다녀오자.”

허정근이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설규가 곧장 일어났다.

어떻게 보면 촌각을 다툴 만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기에 바로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설규가 빠르게 집무실을 나섰다.

거적때기를 입은 중년인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자 몇 년째 감지 못한 머리카락에서 새하얀 이가 후두둑 떨어졌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여기까지 오면서 봤던 광경들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되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어. 비호표국을 인수해서 인원을 늘렸다고 하나 아무리 곤륜파라 하더라도 단기간에 무경을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게다가 인원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아무에게나 본산절기를 알려줄 리도 없을 테고.’

청해성을 담당하는 서녕 분타주인 그가 자신의 허리춤을 감고 있는 세 개의 매듭을 내려다봤다.

평소에는 그에게 자부심을 주는 세 개의 매듭이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제자들을 들였다고 하나 이제 갓 입문한 단계이니 전력으로 보기는 어렵고. 그렇다면 남는 건 장문인과 신원을 알 수 없는 호법들 정도인데···.’

더벅머리로 인해 나이가 몇 살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중년인이 복잡한 얼굴로 다시 한 번 머리를 긁었다.

고작 열한 명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싶어서였다.

하지만 방주에게서 직접 떨어진 명령이었기에 고작 분타주에 불과한 그는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직 신원도 확실하지 않은데 말이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등장한 호법들도 이상했지만 그가 가장 의문인 것은 바로 곤륜파의 장문인이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청민과 서진후의 사형이라고 하는데 그러기에는 나이가 너무 젊어 보였다.

환골탈태를 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무 젊은 모습이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어쩌면 만들어진 사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장문인을 설득해야 한다는 사실이지.’

북해빙궁의 침공으로 중원의 북부 쪽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된 상태였다.

감숙성은 이미 북해빙궁에 귀속된 상태였고, 섬서성은 종남산까지 밀린 상황이었다.

산서성과 하북성 역시 거의 넘어간 상태인 만큼 곤륜파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했다.

달칵.

화산검제가 죽었다는 사실에 새삼 울적해졌던 서녕 분타주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빠르게 접객당 안으로 들어오는 벽우진의 모습을 살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녕 분타주 흑수개(黑手丐)입니다.”

“벽우진이오.”

< 제 17장. 출렁이는 판도.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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