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7장. 출렁이는 판도. -02 >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사실 자연스럽게 다시 관계를 진척시키기에는 공동파의 속가제자들이 찾아왔을 때가 기회였는데 말이야.’
원한은 중요했다.
사람인 이상 원한을 잊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한 문파의 수장은 달라야 했다.
원한을 갚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그림을 보고 방향을 잡아야 하는 게 벽우진이었다.
그러나 벽우진의 선택은 보통의 사람들과 달랐다.
또한 사천당가 역시 마찬가지였고.
‘분명 모종의 협약이 있을 거야. 곤륜파의 장문인과 사천당가의 태상가주의 사이가 아주 각별했었다고 하니까. 독황이 직접 곤륜파를 찾아오기도 했고.’
전대 고수이기에 많은 이들이 만천독황 당민호를 잊고 있었다.
아니, 별호와 무명은 알아도 그의 모습을 아는 이는 이제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옳았다.
봉문을 해서 대외활동을 하지 않기도 했고,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모습 역시 많이 바뀌어서였다.
하지만 하오문은 그런 당민호를 알아보았다.
‘똑같이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전대의 고수인 만천독황 당민호는 전대의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삼제오왕칠성에 버금 가는 무인인 것이다.
물론 세월이 흐른 만큼 노쇠하였지만 무인이라기보다는 독인인 만큼 그 실력이 어디로 가지는 않았을 터였다.
오히려 더욱 농익었으면 모를까.
‘그래서 의문이 든단 말이지. 도대체 장문인의 무위는 어느 정도일까.’
양선이 가장 궁금해 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분명 강하다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강함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뿐만 아니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역시 궁금해 했다.
‘일단은 독황과 엇비슷한 수준으로 잡는 게 가장 현실적이지만 정확하지는 않지. 그리고 우리 같은 정보를 다루는 이들에게 애매한 것만큼 안 좋은 것도 없고.’
양선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녀가 생각하기로 벽우진의 무위는 청해성에서 제일 강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중원 전체로 보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배짱을 부리는 건지 실제로 만천독황 이상 가는 무위를 지닌 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빙혼강시 두 구로 가늠한다는 것 자체는 말이 되지 않고.’
게다가 곤륜파에는 벽우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진구를 비롯한 호법들 역시 존재했다.
특히 진구 같은 경우는 대호방의 부방주를 어린애 다루듯이 상대한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고.
‘좀 더 확실한 표본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잔머리가 좋은 건지 영악한 건지 벽우진은 지금껏 본신의 무위를 단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드러내도 너무나 은밀히 드러냈다.
한 번은 청하상단의 호위대를 통해서 알아보려고 했으나 그녀가 알아낸 것은 지극히 기본적인 게 다였다.
안목이 고만고만한 이들이 본 것이니만큼 알 수 있는 것도 한정적이었던 것이다.
달칵.
그녀의 머리가 점점 더 복잡해져갈 때 인기척이 들렸다.
너무나 당당하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내가 너무 늦은 모양이군.”
“아닙니다. 아침 일찍 찾아온 저희가 어떻게 보면 예의에 어긋났지요.”
“그럼에도 왔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겠지?”
“예.”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벽우진의 성격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기에 양선은 돌려서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앉지.”
“네.”
“둘은 알아서 하고.”
“서 있겠습니다.”
호위무사처럼 양선의 한걸음 뒤에 나란히 서 있는 두 명에게 벽우진은 굳이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
저번에도 서 있었기에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대신 벽우진은 자연스럽게 삼매진화의 수법으로 차를 데워서는 양선에게 따라주었다.
“지난번에 주셨던 차와 다른 차네요.”
“요즘 돈을 좀 벌고 있거든. 살림살이가 꽤 나아졌지.”
“호호호.”
품위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양선은 이런 말투가 어색하지 않았다.
다른 이가 이렇게 말했다면 참으로 없어 보였을 텐데 벽우진이 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느낌이었다.
“피차 바쁜 사람들이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으면 하는데.”
“장문인께 알려드려야 하는 소식이 한 가지 있어서요. 촌각을 다투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충격적인 사건이라.”
“소림사가 공격이라도 받았나?”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화산검제가 죽었습니다. 지난밤에 화산이 불타올랐고요.”
후르릅.
양선이 사뭇 경직된 얼굴로 말했으나 벽우진은 딱히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마치 건너 마을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태연하게 차만 들이켰다.
“그래? 안 되었군.”
“···종남파의 무인들도 합류해 있었지만 중과부적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새로운 강시를 대대적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빙혼강시만큼 위력적이지는 않지만 숫자가 어마어마하다보니 결국 버티고 버티다 못해 밀린 모양입니다.”
“새로운 강시?”
“예. 북해빙궁 측에서는 탈백강시라고 부른답니다. 그런데 그 강시로 사용된 이들이 중원의 무인들이었습니다.”
양선이 그리 말하며 벽우진의 표정을 살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였다.
“죽인 시체들을 사용했나보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건 오독문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확실히 밀약을 맺기는 한 모양이야.”
“본문은 9할 이상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리 약속된 게 아니면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가 없으니까요. 아마 남북으로 나눠먹기로 협약이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닐 수도 있고. 진짜 희박한 확률이기는 하지만 우연히 겹친 걸 수도 있으니까. 단정 짓는 건 아직 이르지.”
벽우진이 그리 말하며 다시 차를 홀짝였다.
하지만 말한 벽우진도 진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협력관계더라도 나중에는 달라질 수 있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뒷간에 가기 전과 나올 때가 다르니까 말이다.
‘둘 중 하나가 먼저 무너질 수도 있고 말이지.’
지금이야 양동작전처럼 위아래에서 몰아치는 공격에 중원무림이 당황했다고 하나 천년마교의 침공도 저지했던 저력이 있는 게 명문대파였다.
그런 만큼 지금은 당황해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전세가 달라질 가능성이 컸다.
정마대전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한 피해를 입기도 했고.
‘북해빙궁이랑 오독문 역시 정복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고 말이지.’
상처뿐인 승리를 얻어 봤자 천년마교에 어부지리를 주는 꼴 밖에는 되지 않았다.
때문에 대대적으로 강시들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자신들의 전력을 최대한 보존해 두어야 천년마교와 한판 대결을 펼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서둘러야 하는데 말이지.’
벽우진이 입맛을 다셨다.
사실 그는 혼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직 다수와 싸우는 경험이 부족하다고 하나, 그 정도쯤은 싸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채울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곤륜파의 제자들이었다.
“장문인?”
“아아, 미안. 잠깐 생각할 것이 있어서.”
“혹시 공동파에 관한 것인가요?”
“아니. 걔네들을 왜 내가 신경 써? 알아서 잘들 지내겠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양선이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하지만 벽우진은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알아서 잘들 살고 있겠지. 적어도 추적조는 사라졌으니까.”
“진짜 관심이 없으시군요.”
“가져서 뭐해? 우리 애들 챙기기도 바쁜데. 근데 화산검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벽우진의 심유한 눈빛이 양선에게 닿았다.
화산검제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충격일지 모르나 벽우진에게는 아니었다.
일면식도 없을뿐더러 딱히 인연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굳이 여기까지 와서 말해줄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전서구나 인편으로 보내도 충분한 정도였으니까.
“아닙니다. 겸사겸사 알려드릴 겸 해서 제가 찾아뵌 것입니다. 부탁드릴 것과 여쭈어 볼 것이 하나 있어서요.”
“두 가지나 있다라. 화산파의 소식은 그 대가라는 건가?”
“그런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양선이 단호하게 손사래를 쳤다.
절대 거래의 의미로 소식을 전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리는 지르지 말고.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잖아.”
“결단코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아아, 그래. 알았어. 그렇다고 해둘게.”
벽우진이 진정하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는 본론으로 넘어가자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화산파는 그저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알았다니까. 그러니 부탁할 것부터든, 아니면 물어볼 것부터는 말해 봐.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거라면 말해줄 테니까.”
“그럼 부탁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빙혼강시의 사체를 저희에게 팔아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빙혼강시를? 왜?”
벽우진이 얼굴 가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빙혼강시를 구매해 가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조사를 해보려고요.”
“강시공에 대해서?”
“그것도 있고, 혹시나 약점이 있을까 해서요. 지금이야 중원의 명문정파들과 싸우고 있지만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오독문 역시 마찬가지고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자세는 반드시 필요하지. 세상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늘 짐작이나 추측했던 대로 흘러가는 법도 없고.”
“맞습니다.”
양선이 조심스럽게 벽우진의 표정을 살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곤륜파에 있는 빙혼강시의 상태는 비록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구할 여지는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반드시 빙혼강시의 사체를 가져가고 싶었다.
“가격만 잘 쳐준다면 못 팔 것도 없지. 어차피 우리야 묻어두거나 태우는 것밖에는 하지 않으니까. 근데 조금 의아하기는 하네. 조사를 한다고 해서 제조방법을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그래도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참고로 이건 제 생각이 아닌 문주님의 결정입니다.”
“좋아. 너희에게 넘겨주지. 다음은? 물어볼 거라는 게 뭐야?”
벽우진이 시원스럽게 결정했다.
딱히 고민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오히려 뒤처리를 해주는 느낌이라 벽우진으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태세를 유지하실 생각이신지요?”
“내 생각이 궁금한 모양이구나.”
“예에.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궁금할 수도 있지. 냉철하게, 이익을 생각한다면 확실히 공동파나 점창파와 손을 잡는 게 현명하니까. 같이 버림받은 처지이기도 하고.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고. 한 번 버렸던 이들이 두 번이라고 버리지 못할까? 그리고 죽어간 이들이 과연 그것을 바랄까? 도인이라고 해서 사람이 아닌 건 아냐.”
“···죄송합니다.”
양선이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지극히 계산적으로 생각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양선은 감히 벽우진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선을 잘 지켜야 해, 양 분타주. 우리가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말이야. 알고 있겠지만 양 분타주의 조력이 본파에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꼭 필요한 건 아니거든.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딱딱하게 있지는 말고. 아직까지는 좋은 관계잖아? 앞으로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테고.”
“물론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공동파의 속가제자들이 곤륜산으로 온 게 어쩌면 우연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제 17장. 출렁이는 판도.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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