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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55화 (55/325)

< 제 17장. 출렁이는 판도. -01 >

주변의 천막들과는 확연히 다른 크고 화려한 천막 안으로 냉막한 인상의 중년인이 들어왔다.

그러자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던 백발의 여인이 고개만 돌려 중년인을 쳐다봤다.

“반드시 보고해야 할 게 있어 늦은 시간이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말해.”

고저가 전혀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여인이 입을 열었다.

감정이라고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특이한 목소리였지만 정작 중년인은 그 부분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공동파의 잔존 세력을 쫓던 추격조가 곤륜파의 제자들과 마주쳤습니다. 짐작하기로는 장문인과 호법들 중 한 명이었는데 실력이 상당했다고 합니다.”

“······.”

여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숨을 고르는 중년인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빙혼강시를 마치 장난감 다루듯이 했다고 합니다.”

“멸문했다고 들었는데, 용케 고수가 남아있었나 보군.”

“최근에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험하다?”

“위험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예 무시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변수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지한 중년인의 말에도 여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했다.

다만 눈빛이 아주 조금이지만 시시각각 변했다.

“보고 받기로는 구파일방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하던데?”

“소원해진 사이입니다. 정확하게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곤륜파와 사천당가를 버렸습니다. 그나마 사천당가의 경우 재기에 성공했는지 봉문을 풀고 다시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갈세가의 원조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굳이 들쑤실 이유가 없지 않나? 얌전히 잘 있는데.”

“추격조 중 한 명이 오다가 죽었는데 마지막 서신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중년인이 방금 전에 날아온 서신을 여인에게 건넸다.

이윽고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진 서신을 여인이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경고라.”

“속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확실하게 정리하는 게 가장 깔끔하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까요. 물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저는 아주 작은 가능성도 확실하게 지워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이득에 의해 움직이는 게 문파의 수장들이니까요.”

“곤륜파. 곤륜파라.”

“명령만 내려주시면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중년인이 다부진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여인은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병력에 여유가 있나?”

“차도살인지계를 써도 될 것 같습니다.”

“남의 손을 이용한다? 어디?”

“녹림십팔채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휘하로 들어온 감숙성의 문파들도 있고요. 아니면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청해성을 노려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중년인의 말에 여인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굳이 전선을 확대시킬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청해성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고.

“불가. 쓸데없는 짓이야.”

“하오나 만약 소수인원으로 뒤를 노린다면 상당히 피곤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감숙성이 있잖아. 9할 가까이 점령했는데 제아무리 소수정예라도 비밀리에 감숙성을 관통하는 건 불가능해.”

“개방이 있습니다.”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개방은 구파일방 중 한 곳이자 중원무림의 눈과 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보력으로 따지면 중원제일이라는 자리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마도나 사도가 득세할 때에도 개방은 늘 중원 곳곳에 있었다.

“거지새끼들이 도와준다면 일말의 가능성은 있겠지. 그렇지만 사이가 좋지 않다며? 그리고 만약 관계가 개선되더라도 상관없어. 그 전에 결판을 내면 되니까.”

“지당하신 말씀이긴 합니다만···.”

“자신 없느냐, 파천도존(破天刀尊).”

말끝을 흐리는 중년인을 향해 여인이 무미건조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중년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오늘 밤 신경 써야 할 곳은 곤륜산이 아니다. 이곳 화산이지. 그리고 오늘 밤 화산검제를 끝장낼 것이다.”

“그리 만들겠습니다.”

화산제일인이자 지금까지 꿋꿋하게 화산을 지켜온 거인이 바로 화산검제였다.

적어도 검만으로는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는 무인이 바로 그였고.

하지만 파천도존은 그 위명도 오늘로서 끝을 맺을 거라고 자신했다.

“탈백강시(奪魄僵屍)들은?”

“충분한 숫자가 완성되었습니다. 지금 즉시 사용이 가능합니다.”

“좋아. 준비시켜. 우리도 물량공세를 펼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

“아마 혼비백산할 것입니다. 어제의 동료가, 혹은 면식이 있는 이들이 다른 존재가 되어 나타났으니까요.”

파천도존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동안 북해빙궁이 비옥하고 풍족한 중원의 영토를 노린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과거에 수도 없이 중원을 침범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지금 본 것처럼 실패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를 것이었다.

‘비록 독식은 힘들겠지만, 오히려 절반이 나을 수도 있다. 너무 큼직한 음식은 한꺼번에 소화하기가 힘드니까.’

파천도존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얼어붙은 동토에서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대자연과 싸우는 그 무의미한 삶을 그는 후대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따뜻하고 풍요로운 대지에서 후대가 살아가길 원했기에 그는 물론이고 동료들도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쉽게 얻을 수 없다면 싸워서라도 빼앗기 위해서 말이다.

“오늘 밤 잠은 자하각에서 잘 것이다.”

“존명.”

여인이 일어나며 천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파천도존이 묵묵히 뒤따랐다.

잠시 후 개미 떼를 연상케 하는 수백, 수백의 검은 인영이 일제히 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하하하.

가부좌를 틀고 있는 벽우진의 주위로 청, 홍, 백, 흑, 황색으로 된 오색의 안개가 천천히 휘돌았다.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서 조화롭게 벽우진을 감싸며 천천히 회전했던 것이다.

동시에 벽우진의 콧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했다.

평범한 무인과는 완전히 다른, 신비로운 광경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후우우우.”

긴 날숨과 함께 벽우진이 운기조식을 마무리 지었다.

사실 피로를 쫓는 것 말고는 딱히 효과를 보는 게 없었지만 그럼에도 벽우진은 매일 운기조식을 하는 걸 빼먹지 않았다.

이제는 습관이 되기도 했고, 나름 명상을 하면서 하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북해빙궁이라. 이렇게 빨리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북해빙궁과 오독문이 중원을 침공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벽우진은 사실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짐작을 하기는 했었다.

천년마교만큼은 아니지만 북해빙궁과 오독문 역시 세외에서는 난다 긴다 하는 곳들이었기 때문이다.

각각 세외 북쪽과 남쪽의 패자들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부딪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곤륜파가 가만히 있겠다고 해도 북해빙궁이나 오독문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래도 가급적이면 지네들끼리 치고 박고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벽우진의 그린 그림 속에 북해빙궁과 오독문은 없었다.

두 곳이 침공하는 것보다 힘을 회복한 천년마교의 발호가 먼저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의 상황도 나쁘진 않았다.

곤륜파를 버렸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니 솔직히 고소했던 것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그나저나 조금 서둘러야겠는 걸.”

운기조식을 마친 벽우진이 처소의 창문을 열며 중얼거렸다.

천년마교가 언제 발호할지 모르기에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북해빙궁과 오독문으로 인해 그 속도를 좀 더 올려야 할 것 같아서였다.

오독문이야 남쪽에서 치고 올라오니 당장 부딪칠 일은 없었으나 문제는 북해빙궁이었다.

이미 한 번 충돌을 했기에 대대적으로 쳐들어 올 가능성도 있었다.

“지금 당장은 화산파와 종남파, 하북팽가에 집중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모르지.”

곤륜파가 구파일방, 오대세가와 많이 소원해졌다고 하나 그래도 명문정파였다.

게다가 경고까지 보냈으니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칼을 갈고 있을 게 분명했다.

때문에 벽우진은 조금 이르지만 한 명씩 시작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고래로 결국 강호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 세상이었으니까.

“의외로 애들이 잘 따라와 주고 있고.”

비호표국을 훈련시키는데 성과는 제자들이 더 많이 가져가고 있었다.

성장세가 말 그대로 눈부셨던 것이다.

더구나 생각했던 것보다 더한 근성을 보여주는 모습에 벽우진은 내심 흡족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하나 패배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수도 없이 패배하고 깨지면서도 표사들에게 도전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배우고 훔치려는 듯한 모습에 벽우진은 그저 웃음만 나왔다.

“특히 일수가 대단하지.”

원래부터 부지런했던 도일수는 본격적으로 곤륜파의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자 더욱더 처절하게 수련했다.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 그 외 생리현상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오로지 무공수련에 쏟아부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실력이 확 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주 조금씩이지만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미래가 아주 밝아. 다만 그 미래는 수많은 위기를 이겨내고 헤쳐내야 얻을 수 있겠지만.”

똑똑똑.

최근에 제자로 들인 도일수를 떠올리며 벽우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일수입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예?”

“들어와라.”

뜻 모를 말에 당황하던 도일수가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는 문을 열고 처소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공손히 고개부터 숙였다.

하늘같은 사부에게 인사부터 했던 것이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나야, 늘 건강하지.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더냐?”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오문의 양선이라 전하면 사부님께서 아실 거라 했습니다.”

“호오.”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찾아온 시기가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개방과 비견되는 정보력을 지닌 게 하오문이었기 때문이다.

“아시는 분이신지요?”

“얼굴은 알지. 한 번 만나봤으니까. 몇 명이서 왔더냐?”

“세 명입니다.”

“접객당으로 데려오너라.”

벽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일찍부터 곤륜산을 찾아왔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알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육신을 해치며 수련하는 건 수련이 아니다. 혹사지.”

“명심하겠습니다.”

도일수가 경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십 년 인생 동안 이렇게 자신을 신경 써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고맙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형제자매가 없는 그에게 사형제들도 생겼기에 도일수는 힘들고 피곤해도 하루하루가 너무나 행복했다.

“가자.”

“예.”

벽우진은 왠지 모르게 감격해 하는 도일수와 함께 처소를 나섰다.

접객당에 도착한 양선은 눈동자만 움직여 방안을 살폈다.

지난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였다.

게다가 그녀가 살피는 건 방안만이 아니었다.

‘많은 게 변했어.’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곤륜파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었다.

부족했던 사람들이 빠르게 채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곤륜파가 사천당가의 도움을 받아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상당한 자재들이 곤륜파로 들어가고 있다는 걸 그녀는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비무환이라고, 미리 준비해서 나쁠 것은 없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아무도 없는 텅 빈 접객당에 홀로 앉아서 양선은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단순히 친분을 다지고자 찾아온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제 17장. 출렁이는 판도.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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