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53화 (53/325)

< 제 16장. 꺼져, 이 새끼들아. -02 >

“여기까지인가···.”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열 명의 추적자들보다도 위풍당당하게 선두에 서 있는 두 구의 빙혼강시에 일행들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한 구만 해도 상대할 수가 없는데 하나가 더 늘어있자 희망이 아예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사형.

근데 그때 백상수의 귓전으로 한줄기 전음이 들려왔다.

두 번째 항렬이자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동생인 종혁진이 그에게 전음을 보내왔던 것이다.

-방법?

-여기서 뿔뿔이 흩어지면 됩니다. 정확하게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곤륜파를 향해서요.

-···진량이를 버리자는 말이냐?

백상수의 표정이 삼엄해졌다.

무슨 말인지 그는 단박에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표정이 더없이 무거워졌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한 명 때문에 모두가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진량이도 그걸 바라진 않을 겁니다. 이미 할 수 있는 하기도 했고요. 다른 아이들을 생각하세요, 사형.

백상수가 두 눈을 감았다.

찰나가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생명의 무게가 똑같다면 그는 한 쪽을 선택해야만 했다.

“이거이거, 대가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데?”

“그보다 왜 여기까지 온 거야? 설마 곤륜파에 가려고? 근데 배신 때려놓고 이제 와서 도와달라고 찾아가는 것도 웃기지 않아? 아, 혹시 비슷한 일을 겪었으니 동병상련이라도 느껴서 동정심에 도와줄 거라 생각하는 건가?”

“큭큭큭!”

북해빙궁의 무인들이 키득거렸다.

만약 추측이 맞다면 골 때려도 이렇게 골 때리는 일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만약 곤륜파 무인들과 조우한다고 해도 북해빙궁 소속의 무인들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괜히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니까 말이지.’

상황보고를 할 때 직속상관이 직접 하달한 지시가 있기에 조장인 그는 기광을 번뜩이며 주변을 훑었다.

곤륜파가 근래 들어 기지개를 펴고 있다는 소식을 북해빙궁 역시 알고 있었기에 안 그래도 예의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황에 크게 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래도 변수가 될 수도 있었기에 미리 파악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 새끼들 완전 몰염치한 새끼들일세. 안 그렇습니까, 조장?”

“뭐,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원래 명문정파라는 족속들이 겉 다르고 속 다른 놈들이잖아. 충분히 그리 생각할 수 있지. 자신이 한 짓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이야.”

“······.”

대놓고 자신들을 멸시하는 북해빙궁의 말에도 백상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입술을 깨물고서 결정을 내렸다.

힘겨운 선택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살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한 명을 살리고자 사형제들을 모조리 사지에 밀어 넣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빙혼강시라도 없었다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활로를 만들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그의 상태로는 빙혼강시 한 구도 제대로 상대할 수 없었다.

“흩···!”

“개판이구만.”

“확실히 세상이 많이 변하긴 한 것 같소이다. 사형이라는 놈이 저렇게 무책임한 선택을 내릴 줄이야.”

“현실적으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합니다. 다만 살아남아도 윗사람 대접은 받기 힘들겠지요.”

“누구냐!”

타악!

허공에서 갑자기 떨어져 내리는 두 개의 인영에 공동파의 속가제자들은 물론이고 북해빙궁의 무인들 역시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하지만 정작 내려선 두 인영은 너무나 여유로운 태도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둘 다 뒷짐을 진 채로 말이다.

“복색이 특이하구려.”

“북해빙궁 같은데. 음한기공을 익힌 것으로 보아.”

“곤륜파의 제자인가?”

조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빠르게 훑어봤다.

그러면서 그는 내심 두 사람의 무위를 가늠해보았다.

풍기는 기도와 자세, 그리고 호흡으로 자신보다 윗줄인지 아닌지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곤륜산에서 곤륜파라고 물어보다니. 확실히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흘렀어.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가 듣게 될 줄이야.”

“대, 대협!”

은연중에 인정하는 벽우진의 말에 백상수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곤륜파의 제자가 등장하자 한달음에 다가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일부러 이곳으로 왔군.”

“그게, 그러니까···.”

“한때 같은 구대문파였으니 당연히 도와줄 거라 생각했던 건가?”

“······.”

백상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적나라한 말이었지만 틀린 소리가 아니었기에 부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속가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본파에 공동파가 했던 짓은 까맣게 잊었나봐? 아니, 나만 기억하는 건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물론 선대의 잘못을 후대에 묻는 것은 잘못된 일이긴 하지. 선대가 저지른 일을 후대가 굳이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말은 반대로 본파 역시 공동파를 도와줄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꿀꺽!

분노는커녕 흥분도 하지 않는 지극히 냉정한 표정과 말투에 백상수는 물론이고 종혁진과 사제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젊은 도사는 그들에게 명확히 선을 그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의문이 들었다.

자신들 또래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같은 백도의 무인으로서 어려운 상황에 빠진 사람을 도와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같은 백도의 무인일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교분까지 나누었던 사이를 단칼에 끊어버린 쪽은 공동파였지. 그런데 우리라고 똑같이 그러라는 법은 없지 않나? 더구나 영악하게도 그 명분을 이용하러 여기까지 온 녀석들에게는 더더욱.”

급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나섰던 종혁진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반박할 여지가 없는 말에 입이 있어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 조금만 아량을 베풀어···.”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누구들 덕분에 사문이 쫄딱 망한 상태라. 그래도 한때 동료이자 전우였던 곳의 제자들이니 매몰차게 손을 쓰지는 않겠어. 그러니 꺼져.”

벽우진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 말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해맑은 미소였다.

그래서인지 백상수는 물론이고 북해빙궁의 무인들 역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푸하하핫!”

“이거 골 때리는 녀석일세!”

“큭큭! 저 병신들은 썩은 동아줄을 믿고 여기까지 온 거야?”

이윽고 북해빙궁 무인들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동시에 공동파의 속가제자들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분명 좋은 말을 듣지는 못할 거라 예상하기는 했다.

그래도 중원도맥의 발상지이자 명문도문인 만큼 조금의 도움은 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건 너무나 큰 착각이었다.

“네놈들은 닥치고.”

“뭐라?”

“그러니 둘 다 꺼져. 괜히 내 구역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내 일 년에 몇 번 부리지 않는 아량을 오늘 베풀어 사지육신 온전하게 보내줄 테니까.”

“클클클!”

품위라고는 쥐똥만큼도 없는 벽우진의 말에 의외로 조용히 서 있던 진구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벽우진의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웃는 건 진구 한 명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벽우진을 노려봤다.

“그만 꺼져. 싸우려면 곤륜산 내려가서 해.”

“대, 대협!”

조금의 여지도 두지 않겠다는 싸늘한 벽우진의 말에 백상수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다급하게 벽우진을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벽우진의 태도는 냉랭했다.

번복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차가운 눈으로 백상수를 쳐다봤던 것이다.

“여기서 그냥 하직할래?”

“······.”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태도에 백상수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괄시 받은 적이 없지만, 곤륜파의 제자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천년마교를 누구보다 앞장서서 상대했던 곤륜파를 매정하게 외면했던 게 바로 그의 사문이었으니까.

“죽이지 않는 걸 고맙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역시 사람의 이기심이란.”

거기에 진구까지 합세하자 백상수와 속가제자들의 고개는 점점 아래로 숙여졌다.

그런데 그때 북해빙궁 쪽에서 끼어들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좋은 말로 할 때 내려가. 장난감 믿고 까불지 말고.”

“장난감?”

조장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빙혼강시를 쳐다보는 무심한 눈빛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곤륜파의 제자라지만 마치 이 지역이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양, 마치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꼬락서니가 심히 거슬렸다.

“내가 말하지 않았소. 이리 될 게 뻔하다고.”

“예상을 하긴 했지만. 근데 진 호법은 너무 즐거워하는 거 아닙니까?”

“크흠! 흠!”

언제 박장대소를 터트렸냐는 듯이 살기를 내뿜으며 이곳을 노려보는 북해빙궁의 모습에 슬쩍 미소를 머금었던 진구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엄한 눈빛으로 조장을 노려봤다.

감히 그에게 살기를 흩뿌리는 게 너무나 가소로워서였다.

“호법이라. 그쪽이 혹시 태산권인가? 청해성에서 나름 명성이 있던데.”

“참 세상이 많이 변하기는 했소이다. 저런 허접한 녀석들이 반말을 찍찍 해대는 것을 보면.”

“제가 보기에는 이렇게 나오길 기다린 것처럼 보입니다만.”

“원래 무림이라는 세계는 힘을 쓰면 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건이 벌어지기 마련이외다.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오. 그것을 끊기 위해서는 오직 두 가지뿐이라고 생각하오. 죽던가, 죽이던가.”

“허!”

조장이 헛웃음을 흘렸다.

말하는 본새를 보아하니 자신들을 얕잡아 봐도 그렇게 얕잡아 볼 수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조원들도 마찬가지인 듯 하나같이 서늘한 살기를 내뿜었다.

반면에 공동파의 속가제자들은 요상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뭐, 일정 부분은 동의합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가만히 있고 싶어도 주변에서 가만히 놔두지를 않으니까요.”

“가만히 있지도 않잖습니까.”

진구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사건을 일으키면 일으켰지 절대 가만히 있는 쪽이 아니어서였다.

“원래 인생사라는 게 사건과 사건의 연속입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선택이며 모든 게 인과율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까요.”

“죽여라!”

시종일관 자신들을 무시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조장이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어차피 지시 받은 내용도 있겠다, 굳이 대화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쿠우우웅!

그리고 그 지시에 두 구의 빙혼강시가 땅을 박찼다.

후미에 있던 술법사가 빙혼강시에게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윽고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는 표정의 빙혼강시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벽우진과 진구를 향해 쇄도했다.

“강시라.”

“몸놀림은 제법 빠르군요.”

순식간에 접근한 빙혼강시의 양손이 두 사람의 어깨를 노렸다.

양쪽 어깨를 잡아서 그대로 찢어버리겠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악력도 악력이지만 빙혼강시의 무서운 점은 따로 있었다.

후우우웅!

바로 전신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냉기였다.

북해에서 쌓이고 쌓인 극한의 냉기가 빙혼강시의 육신에 머물고 그게 다시 자연스럽게 사방으로 흘러나왔다.

때문에 빙혼강시의 근처에만 가면 무인들이 경직되고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문제는 빙혼강시들이 모이면 그 냉기가 중첩된다는 사실이었다.

터어어엉!

“제법 단단하네?”

다만 변수는 빙혼강시의 상대가 진구와 벽우진이라는 점이었다.

< 제 16장. 꺼져, 이 새끼들아.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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