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6장. 꺼져, 이 새끼들아. -01 >
무리 중 가장 연장자인 백상수가 고민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가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사문이 곤륜파를 어찌 대했는지 모르지 않았기에 고민하는 것이었다.
곤륜파가 힘들 당시에는 나 몰라라 했다가 이제와 도와달라고 하는 게 이기적으로 느껴져서였다.
하지만 상황이 그 정도로 절박하기도 했기에 백상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일단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선 곤륜파로 가시죠, 사형.”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도 미운 정도 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같은 정파인 만큼 아예 모른 척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제들과 사매의 말에 백상수가 얼굴을 굳혔다.
누가 뭐래도 우선은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복수도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지 죽으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곤륜파도 엄연히 명문정파인 만큼 자신들을 대놓고 외면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나 최악의 상황도 생각해 봐야 해.”
“어떻게 보면 곤륜파도 저희와 같은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동질감을 느낄 지도 모릅니다.”
“그건 우리 생각이고.”
“시간이 없습니다, 사형. 서둘러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곤륜산으로 향할 것인지, 아니면 남하해서 사천성으로 향할 것인지를요.”
백상수의 시선이 맨 끝에서 겨우겨우 따라오고 있는 막내 사제에게로 향했다.
가까스로 지혈을 한 덕분에 더 이상의 출혈은 없지만 창백한 안색으로 보건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가 쓰러진다면 가뜩이나 느린 이동속도가 대번에 급감할 게 분명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나.’
지쳐서 쓰러진 사제를 버리고 갈 수도 없었기에 백상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가장 가까운 곤륜파로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따뜻하게 반겨줄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곤륜파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개울가에요!”
“제대로 왔어요!”
“최대한 서둘러 목을 축이고 그대로 이동한다.”
졸졸졸 흐르는 물줄기를 확인하며 백상수가 소리쳤다.
다들 적지 않은 출혈이 있는 만큼 수분 보충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바로 개울을 넘는 건 더욱 선명한 흔적을 남길 수 있기에 일단은 역으로 올라가든 아니면 내려가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예!”
“힘들어도 조금만 더 힘을 내. 이번에 따라 잡히면 모두 죽는다.”
백상수의 말에 사형제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악귀와도 같은 빙혼강시가 반사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지치지도 않고 강기가 아니면 손상도 입지 않는 그 괴물은 단 한 구뿐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한 구만으로도 일행을 몰살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철벅철벅!
잠시 동안 목을 축인 그들은 빠르게 개울을 따라 올라갔다.
그러면서 몇몇은 옷을 찢어 물에 떠내려 보냈다.
후각이 예민한 추적자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서였다.
벽우진이 뒷짐을 진 채로 널찍한 연무장을 내려다봤다.
연무장에는 서예지를 위시로 한 제자들뿐만 아니라 비호표국의 표사들과 쟁자수들도 함께 있었는데 다들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대련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벽우진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허이구야.”
“탄식을 내뱉을 시간에 대책을 생각하시죠.”
“저 정도 실력에 무슨 대책을 생각하란 말이오?”
“으음!”
옆에 서 있던 진구의 헛웃음에 벽우진이 침음을 흘렸다.
답이 안 나오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표국주인 유한열이나 두 표두들과 몇몇 표사들의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외가 문제였다.
쟁자수들이야 원래 실력이 부족한 걸 알고 있었지만 표사들은 진짜 심각했다.
“어중이떠중이들만 남아있으니 표국이 운영될 리가 있나. 이급표사나 삼급표사나 다를 게 없네. 일급이라고 해서 일류에 제대로 발을 디딘 것도 아니고.”
진구의 냉혹한 평가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상황이 또 그렇게 암담한 것은 아니었다.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이 표사들이라서 그런지 제자들에게는 그들과의 대련이 큰 공부가 되었다.
표사들이 겪은 경험을 제자들은 대련을 하면서 빠른 속도로 습득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형님들이 엄청 고생하시겠군.”
“진 호법도 파견 가실 겁니다만?”
“나야 뭐, 이미 포기했소이다.”
진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청하상단 때의 일로 자신이 1순위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의외로 속세에서 활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다만 문제는 저런 덜떨어진 녀석들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게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전에 사람부터 만들어야겠지만요.”
“재능도 없는데 게으르기까지 하니. 이건 완전 답이 없는데.”
“노력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십보백보 아니오.”
진구가 혀를 찼다.
물론 노력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노력이 곤륜파의 제자들과 비교하면 조족지혈이었다.
비호표국 내에서나 노력하는 축에 들지 제자들과는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바꿔 봐야죠.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두 달은 너무 짧은데···.”
진구가 두 눈을 좁혔다.
60일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지만 기초부터 다시 가르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더구나 표사들의 경우 안 좋은 습관들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었기에 교정을 한다고 해도 그게 바로 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은 하나뿐이죠.”
“확실히 장문인의 전문이기는 하겠구려.”
“진 호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만.”
벽우진과 진구가 똑같은 눈빛을 흘렸다.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 모습에 조용히 대련을 지켜보고만 있던 청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듣지 않아도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명복을 빌어줘야 하나.’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을 떠올리며 청민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벽우진과 진구에게서 심상치 않은 말들이 나와서였다.
대신 그는 쟁자수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나이가 어리고 아직 제대로 무공에 입문하지 않은 만큼 어떻게 보면 짧은 시간에 가장 큰 성장을 보일 수 있는 게 쟁자수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속가제자들도 아닌데 비천단을 나눠줄 수도 없고.’
서예지를 제외하면 아직 제자들 중에서도 비천단을 하사 받은 이가 없었다.
그런 보물을 속가제자들도 아닌 쟁자수들에게 나눠준다는 건 말이 안 되었기에 청민은 비천단에 대한 생각은 시작과 동시에 털어버렸다.
대신 천호문의 장로들과 천류검대주가 익히고 있던 무공들을 떠올렸다.
‘강호일절이라 부르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나름 상승무공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니.’
청민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절정무공만 하더라도 표사들과 쟁자수들에게는 엄청난 보물이었다.
절정무공은 배우고 싶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밀리에 청하상단의 호위대도 익히고 있기에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하면 이쪽이 훨씬 더 나았다.
쟁자수들 중에는 도일수처럼 곤륜파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몇몇 있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그의 눈이나 벽우진의 눈에 차는 이는 없었다.
“그래도 실력이 많이들 늘었네.”
제자들을 보며 청민이 아주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무공을 제대로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실력들이 일취월장했기 때문이다.
그 중 군계일학은 바로 서예지였다.
환골탈태한 몸이라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주듯 서예지는 비호표국의 몇 없는 일급표사들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연거푸 일대일 대련을 할 정도로 체력적으로도 우세를 보였다.
“정말 잘 컸어. 허허허.”
일취월장하는 실력만큼이나 미모도 나날이 발전하는 서예지의 모습에 청민이 손녀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청범의 손녀인 만큼 어떻게 보면 서예지는 그의 손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특히 표사들과 쟁자수들이 넋을 잃고서 서예지를 쳐다보는 광경에 청민은 흐뭇한 웃음을 흘렸다.
“정말 많이 달라졌어.”
청민이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폐허였던 이곳이 정말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누가 뭐래도 벽우진이었다.
사형이 오면서부터 모든 변화가 일어났다.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반드시 과거의 성세를···.”
밝은 미래를 꿈꾸던 청민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지독한 살기가 줄기줄기 솟구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숨길 기색도 없이 살기를 사방에 흩뿌리는 기세에 청민은 번개 같이 벽우진을 쳐다봤다.
자신이 느낀 걸 벽우진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어서였다.
“많이 컸어, 우리 청민이. 거리가 상당한데 벌써 느낀 걸 보면.”
“누구일까요?”
“글쎄. 대호방이나 백운산장은 아니겠지?”
“쫓기는 기척이 있는 걸 보면 원한관계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진구 역시 느낀 모양인지 한 다리를 걸쳤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요상했다.
지독한 살기가 줄줄이 솟구치고 있음에도 오히려 살짝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방향이 정확히 산문 쪽입니다.”
“일부러 이쪽으로 온다는 건데. 어디 일라나. 일단 마기는 아닌데.”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뭐, 가보면 알겠지. 가시겠습니까?”
“당연히.”
벽우진의 말에 진구가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이런 재미있는 일에 그가 빠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도 가겠습니다.”
“셋이 다 갈 필요 있나. 한 명은 여기를 지켜야지. 혹시라도 애들 다치지 않게 감독도 해야 하고.”
“둘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알겠습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벽우진과 진구였다.
그렇기에 청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만 곤륜파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 벽우진이었다.
호법들을 통틀어서도 말이다.
“가죠.”
“좋소이다.”
벽우진이 이곳을 맡긴다는 의미로 청민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고는 가볍게 땅을 박찼다.
그리고 그 뒤를 진구가 히죽 웃으며 곧바로 따라서 이동했다.
“큰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
벽우진이나 진구만큼은 아니지만 청민 역시 기감이 꽤 많이 확대되고 예민해진 상태였다.
높아진 경지만큼 파악할 수 있는 범위 역시 늘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기감에 느껴지는 기파는 제법 강렬했다.
“뜬금없이 북해빙궁이 나타나지는 않겠지. 공동산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구대문파에 들어가는 게 민망할 정도로 곤륜산은 위치상 중원보다는 신강과 서장에 훨씬 더 가까웠다.
그렇기에 청민은 피식 웃었다.
공동파의 제자들이 곤륜산까지 올 가능성은 전무 하다고 생각해서였다.
“헉헉헉!”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그 말 맞아? 한 식경 전에도 똑같은 말 했잖아!”
“어차피 길이 하나뿐이니···.”
쒜애애액!
공동파의 속가제자들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맹렬한 파공음에 해쓱한 표정을 지었다.
날아오는 게 무엇인지 도주 중에 질리도록 겪어봐서였다.
그렇기에 속가제자들은 파공음이 들리는 순간 각자 방향을 틀었다.
“컥!”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한 명이 적중당하고 말았다.
매서운 기세로 날아온 돌멩이가 정확히 어깻죽지를 강타했던 것이다.
“진량아!”
가뜩이나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뛰지 못하던 사제가 꼬꾸라지듯이 쓰러지자 백상수가 피를 노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충격에 기절한 것인지, 아니면 죽은 것인지 문진량은 쓰러진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쫓는 사람 참 피곤하게 만드네.”
“그러니까. 얌전히 뒈져주면 좀 좋아? 꼭 여기까지 왔어야 했어?”
저벅저벅.
백상수 일행이 잠시 멈췄을 때 숲속에서 일단의 무리가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들을 본 일행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커멓게 변했다.
< 제 16장. 꺼져, 이 새끼들아.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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