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51화 (51/325)

< 제 15장. 너, 내 제자 할래? -05(2권 끝) >

양이추가 짐짓 궁금한 표정으로 작게 소곤거렸다.

제자가 된지 제법 시일이 지났음에도, 본산제자를 택했음에도 벽우진이 딱히 도호를 내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급한 문제가 아니라서 그런 거다. 항렬 문제도 있고.”

땀범벅이 된 양일우와 달리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벽우진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작게 수군거리던 두 사람이 퍼뜩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단순히 궁금해 하는 것뿐인데. 안 그래도 청민이랑 요즘에 하는 말이 그것이기도 하고. 근데 도호보다는 항렬이 먼저라고 생각해서 말이지.”

벽우진의 시선이 같이 있지만 왠지 모르게 살짝 동떨어져 있는 듯한 도일수에게로 향했다.

아무래도 어제 처음 본 사이이다 보니까 함께 있는 게 아무래도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별 차이가 없어서 그냥 편하게 지내기로 했어요. 하지만 사부님께서 원치 않으시면 바로 시정할게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나 그렇게 딱딱한 사람 아니야. 그리고 이왕이면 가족 같은 분위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나도 사실 고아였고, 청민도 마찬가지지. 물론 나중이 되면 파벌도 생기고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도 적지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서로 편하게 지냈으면 싶다. 다만 문제는 일수인데.”

자연스럽게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서는 서예지를 일별하며 벽우진이 도일수를 쳐다봤다.

그러자 죄진 것도 아닌데 도일수가 움찔거렸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니 살짝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나이가 스무 살이라고 하셨죠?”

“예, 예. 사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자들의 서열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이를 밝히진 않았지만 그래도 순서 정도는 빠른 눈치로 알 수 있어서였다.

그렇기에 서예지가 묻기 무섭게 도일수는 곧바로 대답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편하게 말씀하셨으면 좋겠어요. 저희보다 가장 나이가 많으시기도 하고요.”

“하지만 제가 막내이지 않습니까. 하하.”

“저도 예지와 같은 생각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입문한 시기가 그렇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저희들도 나이순으로 편하게 지내기도 하고요.”

서예지에 이어 양일우도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입문 시기가 크게 차이 나지도 않는데 굳이 딱딱하게 신경 써야 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그렇게 해도 되지만 나중에도 나이로 따지면 배분이 많이 꼬일 걸? 청민도 언젠가는 제자를 들일 테니까. 사실 많이 늦은 편이지.”

“일단 올해는 나이로 하고 내년부터는 딱딱 끊어서 정하는 게 어떨까요?”

벽우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배분이라는 게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가족 같은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지만 여기서 인원이 더 많아지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터였다.

‘일수는 그럴 것 같지 않지만.’

지금만 하더라도 눈치를 보는 도일수의 모습에 벽우진은 내심 웃음이 나왔다.

눈치가 상당히 빠르고 독기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순박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물론 사람인 이상 나중에는 변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입문한 순서는 무시할 수 없어. 일우, 이추 형제와 너희들이야 들어온 시기가 별 차이 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일수는 다르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는 들어온 순서대로 정확히 끊어. 그게 제일 깔끔하니까. 일수는 동생들에게 존댓말 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어쩔 수 없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나이보다는 입문한 시기가 먼저죠. 다른 문파들도 다 마찬가지고요. 전 정말 괜찮습니다.”

“그럼 정리 끝.”

“어, 서로 존댓말 하는 건 괜찮죠?”

“그건 알아서.”

서예지가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 모습에 벽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 제재할 생각은 없어서였다.

그렇게 서열 정리가 얼추 끝나자 벽우진은 다시 양이추부터 일대일 대련을 이어갔다.

북해빙궁과 오독문의 침공으로 황급히 본가로 귀환한 당민호는 곧바로 가주인 당문경부터 찾았다.

전서구로 대략적인 내용을 듣기는 했지만 오는 와중에 상황이 수도 없이 달라질 수도 있기에 제대로 설명을 듣기 위해서였다.

“앉으시지요.”

“제갈명은?”

“어제 돌아갔습니다.”

“호오. 의외로 순순히 돌아갔네? 내가 올 때까지는 머물 줄 알았는데.”

한때는 자신의 집무실로 사용했던 가주전에 들어오며 당민호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상석에 앉지는 않았다.

이제 저 자리는 그의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도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상황이 급박했던 모양인지 마지막까지 매달리다가 돌아갔습니다.”

“소식은 대충 들었다. 섬서성과 하북성은 그나마 버티고 있지만 산서성은 쑥대밭이 되었다고.”

“완전히 무너졌다고 보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산서성 아래가 바로 하남성이라는 것이죠.”

당민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 그는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겠군.”

“소림사인 만큼 쉽게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위험한 것은 사실이죠. 정신적 지주인 소림사가 무너진다면 공동파나 점창파 이상의 타격이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쉽게 무너질 소림이 아니지. 무당파도 마찬가지고.”

“일단 북해빙궁은 소림사를 중심으로 집결해서 상대하는 중이고 오독문은 남궁세가와 제갈세가를 중심으로 뭉치고 있습니다.”

“많이 시달렸겠어.”

보지 않아도 제갈명이 얼마나 매달렸을지 당민호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독공을 비하하는 무인들은 많아도 무시하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독공이 무섭기 때문이었다.

또한 약자가 강자를 죽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 중 하나였고.

“하지만 속 시원하기도 했습니다. 고소하다고나 할까요. 귀찮았지만 그 재미 덕분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허허허.”

“게다가 명분이 없기도 하고요. 사실 염치없는 짓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힘들 땐 나 몰라라 했다가 이제 와 똥줄이 타니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요.”

“그만큼 급해서겠지.”

당민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그가 당문경이었어도 똑같이 했을 터였다.

당가는 절대 빚을 잊지 않는 가문이었으니까.

툭.

“이게 그 영단입니까?”

“그래. 비천단보다 더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영단이다. 비천단이 중급이라면 이건 상급이라고 하더구나.”

“호오.”

당민호가 탁자 위에 올린 두 개의 목함을 바라보며 당문경이 눈을 빛냈다.

그리고는 망설이지 않고 목함을 열었다.

“향기 좋지?”

“확실히 영단이라 부를 만 하네요. 향기만 맡아도 몸이 상쾌해지는 느낌입니다. 소환단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보다 윗줄이에요.”

독인은 의원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독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의술 역시 어느 정도는 익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문경은 냄새만 맡았음에도 이 영단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대번에 파악했다.

“비천단만 하더라도 소환단 이상이지. 대환단까지는 아닐 테지만.”

“중요한 건 대환단은 더 이상 제조할 수 없지만 이건 다르다는 거죠. 개인적으로 곤륜파에 있다는 그 연단가를 꼭 모셔오고 싶습니다.”

당문경이 욕심을 감추지 않고서 말했다.

말이 연단가지 사기꾼들이 대부분인 게 현 실정이었다.

그렇기에 당문경은 진짜 할 수만 있다면 곤륜파의 호법이라는 그 연단가를 데려오고 싶었다.

이 정도로 실력 있는 연단가는 진짜 희귀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넌지시 운을 띄워 보았는데 면전에서 단칼에 거절당했다. 자신이 곤륜파에 있는 것도 우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있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원래는 속세에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고 하구나.”

“어떻게 모셔온 걸까요? 아니, 대체 어떻게 찾아낸 걸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분명한 건 그런 기인이사들이 분명히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지. 다만 접점이 없거나 알아보지 못할 뿐이지.”

당민호가 입맛을 다셨다.

일선에서 물러난 그였지만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은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두 개를 가져왔으니 손해는 아니네요. 아이들도 다 환골탈태를 이루었고.”

“엄청난 성과지. 또한 당분간은 숨겨야 할 비밀이기도 하고.”

“그렇죠.”

흉흉한 정세에서 비장의 한 수가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더구나 아직 어린 아이들인 만큼 성장가능성이 무궁무진했기에 당문경은 언제 얼굴을 굳혔냐는 듯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중 하나는 가주가 흡수하고.”

“제가요?”

“그래. 자고로 가주란 든든하게 중심을 잡아주어야 하니까. 난 너무 늙지 않았느냐. 이제는 뒷방 늙은이이기도 하고.”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문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세월이 제법 흘렀다고 하나 독황의 별호를 잊은 사람은 없었다.

고수들이라 불리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말이다.

괜히 제갈세가의 2인자라 불리는 제갈명이 발에 땀나도록 사천당가까지 달려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고수가 한 명인 것보다는 두 명인 게 낫지. 그 고수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하다면 두 말할 필요가 없고. 그리고 지금은 애걸복걸 하지만 북해빙궁과 오독문을 밀어내면 반드시 이번 일에 대해 앙갚음을 할 거야. 물론 명문정파이니 대놓고 그러지는 못하겠지만.”

“그래서 힘이 더욱더 필요하단 말씀이시죠?”

“맞아. 아예 달려들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해. 우리가 안절부절 못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그러도록.”

“음!”

사람은 기본적으로 은혜보다 원한을 더욱더 잊지 못했다.

그렇기에 당문경의 고민은 짧았다.

영단이 단 하나뿐이었다면 좀 더 고심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하나가 더 남기에 당문경은 손을 뻗었다.

똑똑똑.

그런데 그때 시비가 가주전의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더냐?”

“가주님. 정문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아미파에서 왔다고 합니다.”

“누구라고는 밝히지 않고?”

“영화 사태라고 들었습니다.”

이어진 시비의 말에 당문경의 두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왜냐하면 영화라는 불호를 쓰는 아미파의 제자는 당민호와 동시대를 살았던 무인이자 금강신니(金剛神尼)라고 불리는 아미제일고수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제갈명이 그냥 간 게 아닌 것 같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모시 거라.”

“예.”

금강신니라는 말에 당민호 역시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물도 너무 큰 거물이 움직여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정마대전 당시 그녀와 함께 싸운 적이 제법 많아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움직여줄 생각은 없지.’

좋은 인연은 말 그대로 좋은 인연일 뿐이다.

친우인 것도 아니었기에 반갑기는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기에 당민호는 심유한 눈빛으로 창밖을 주시했다.

잠시 후 승복을 입은 두 명의 비구니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타다다닷!

십여 명의 남녀가 다급한 얼굴로 산길을 올랐다.

그런데 그들의 행색이 심상치가 않았다.

격전을 치른 모양인지 다들 입고 있는 무복이 찢어지거나 곳곳에 상처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한눈에 봐도 멀쩡한 사람이 없어 보일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그들은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더욱더 달리는 속도를 올렸다.

“힘내! 일단 폭포나 개울가만 가면 추적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을 거야!”

“물 냄새가 이쪽에서 납니다, 사형!”

“폭포나 계곡을 거친 후 아예 방향을 트는 게 어떨까요?”

하나같이 안색이 창백했지만 누구 하나 발을 놀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진기는 진즉에 바닥이 났고, 육신 역시 당장이라도 쉬고 싶다는 듯이 비명을 질러대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금 멈추면 영원히 쉬게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디로?”

“일단 곤륜산으로 가는 겁니다. 듣자하니 곤륜파가 다시 일어서는 중이랍니다. 고수들도 제법 있다고 하고요.”

“곤륜파?”

“예. 그래도 한때 같은 구대문파에 속해 있지 않았습니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도와주지 않을까요?”

< 제 15장. 너, 내 제자 할래? -05(2권 끝)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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