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5장. 너, 내 제자 할래? -04 >
“도세에서 한이 느껴지는구나.”
“헙!”
“아, 놀랐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도일수가 기겁하며 몸을 돌렸다.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비록 정식 표사는 아니지만 쟁자수들도 기본적으로 싸울 줄은 알았다.
난전이 벌어지면 표사와 마찬가지로 표물을 지켜야 하는 게 쟁자수들이었기 때문이다.
“대, 대협은···!”
“대협까지는 아니고. 난 그런 거창한 호칭은 달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대협이라고는 부르지 마.”
“넵!”
“그보다 혼자만 수련하고 있네? 다른 이들은?”
“아직 안에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벽우진의 등장에 도일수가 우물쭈물 거리며 대답했다.
차마 아직 자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였다.
그리고 현재 시간이 이른 시각이기도 했고.
“신세 좋네. 아니, 게으른 건가.”
“어, 다들 어제 고생을 좀 했으니까요.”
“넌?”
“전 이게 일상이거든요. 매일 수련하는 게요.”
벽우진이 도일수의 몸을 찬찬히 살폈다.
딱 보니 쟁자수로 오랫동안 일을 했는지 전체적으로 근육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신체균형 역시 나쁘지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질이 평범했고, 나이도 너무 많았다.
“실력이 크게 늘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한눈에 봐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몸이 아니었다.
선천적인 재능은 없으나 끊임없는 노력 끝에 만들어졌다 걸 벽우진은 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특히 수도 없이 벗겨진 양손의 손바닥은 그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까지 수련을 해야 할 필요가 있나?”
“포기하는 순간 제 인생은 여기서 더 나아지지 않으니까요. 제 꿈이 성공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거거든요. 그걸 이루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무인이 되어 명성을 떨치는 것이고요.”
“쉽지 않다는 걸 알 텐데.”
벽우진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돌려 말했다.
지금껏 해온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기에 차마 현실을 말해줄 수가 없어서였다.
차라리 악인들을 천참만륙 내면 내었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이에게 상처를 주기는 싫었다.
도일수가 느꼈을 절망감과 좌절감을 그로서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기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달라지지 않을까요? 지금 당장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양손을 모두 단련한 건가?”
“예. 쟁자수가 잡부에 가깝지만 표물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할 때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것저것 많이 익혔습니다. 어렸을 적에 명문대파를 찾아다니면서 운 좋게 어깨 너머로 훔쳐 배운 것도 있고요.”
도일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분명 지금까지 겪어온 삶이 결코 녹록치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일수는 웃었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벽우진의 가슴을 묘하게 울렸다.
‘근성이라.’
벽우진은 사실 지나가다 인기척을 느끼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산책 겸 곤륜산을 돌아다니다가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 혼자 수련을 하는 듯하자 궁금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물론 애초에 비호표국의 표사들과 쟁자수들을 주의 깊게 볼 생각은 있었다.
운 좋게 드러나지 않은 원석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고수라고 늘 안목이 뛰어난 건 아니었다.
경지가 높은 것과 안목의 연관관계가 절대적이지만은 않았으니까.
오히려 벽우진은 편협한 기준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가 익힌 무공에 맞는 제자를 찾는다고 말이다.
‘그것도 틀린 방법은 아니지만.’
벽우진의 시선이 다시 도일수에게로 향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눈동자에는 삶의 굴곡이 여실히 담겨 있었다.
또한 그가 얼마나 절박해 하면서도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는지도.
“이름이 뭐지?”
“도일수라고 합니다.”
“너, 내 제자 할래?”
“예? 제, 제가요?”
도일수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 벽우진의 입에서 나와서였다.
그렇기에 도일수는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반문했다.
“그래. 너. 본산제자가 싫으면 속가제자로 들어와도 좋아. 선택은 네가 하는 거다.”
“지, 진짜로요?”
“그럼 가짜로 말하겠어? 내가 시답잖은 농담을 즐겨하지만 남의 인생 가지고 장난을 치지는 않아. 다른 일도 아니고 한 사람의 인생이 걸려 있는 선택인데.”
꿀꺽!
진심이 담긴 벽우진의 말에 도일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내심 바라던 일이 바로 곤륜파의 문하로 들어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에 도일수는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었다.
“외람될지 모르나 한 가지 여쭈어 봐도 되겠는지요?”
“얼마든지.”
“왜 저에게 이런 제안을 해주시는 겁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제법 많은 무문들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도일수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절실히 바랐던 이들에게 거절을 당하는 것만큼 큰 상처도 없지만 이제는 오래된 과거의 일이었다.
그렇기에 도일수는 더 이상 아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덤덤하게 말했다.
벽우진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랬겠지. 근골도 평범해, 나이도 많아. 그렇다고 뽑아먹을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닌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고아이니 문하로 받아들이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맞습니다.”
냉정하지만 지극히 맞는 소리에 도일수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에게 특출난 재능이 있었다면,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면 수많은 무문들을 전전하다 비호표국에 몸을 담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래서 궁금해졌어. 노력만 하는 녀석이 곤륜파의 무공을 얻으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가. 사실 본파도 예전에는 오로지 무재만 보고 제자를 뽑았었거든. 최소한의 기준이 있는데 나름 그 문턱이 구대문파의 기준답게 좀 높다고나 할까.”
“다른 곳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맞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그저 그런 무난한 아이보다 잠재력이 뛰어난 녀석을 제자로 들이는 게 방파들 입장에서도 나으니까. 그런데 나는 너도 눈치챘겠지만 조금 별종이거든.”
“하하하···.”
도일수가 멋쩍게 웃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확실히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그것도 한 문파의 수장이 보잘 것 없는 그에게 제자가 되겠느냐고 물어볼까.
지금까지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기대는 많이 했었지만. 꿈도 많이 꿨었고.’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재능을 이 세상에 한 명 정도는 알아봐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적이 있었다.
자신만의 재능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냉정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세상 역시 알고 있었다.
주르륵.
‘그랬었는데···.’
인정하기 싫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수긍하고 있었다.
아니, 체념하고 있었다.
재능이 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빨리 성장하는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얼마나 빨리 띄는지 20년을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말은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도일수는 내심 알고 있었다.
자신은 진짜 재능이 없다는 것을.
다만 이 길마저도 포기하면 그의 인생에서 기댈 게 전혀 없기에 끝끝내 놓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니 증명해 봐. 범재가 신공절학을 만났을 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이왕이면 한계를 돌파해서 훨훨 날아보라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근데 알지? 해이해지는 순간 네가 쌓아온 모든 것들이 모래성처럼 부서진다는 것을. 하나 쌓기도 어려운 너이지만 무너지는 건 더 쉽다는 걸 말이야.”
“각골명심하겠습니다!”
“누가 나이 많은 녀석 아니랄까봐.”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어째 단어 선택이 애늙은이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벽우진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과연 도일수가 곤륜파의 무공을 얻고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가 말이다.
‘모두가 주저앉더라도 얘만은 주저앉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벽우진이 묘한 눈빛으로 연신 허리를 숙이는 도일수를 쳐다봤다.
내뱉은 말과 달리 그는 절대 즉흥적으로 결정한 게 아니었다.
애초부터 쟁자수들 중에 자질이 괜찮은 아이가 있으면 속가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있었고, 그 중에 유독 도일수가 들어왔을 뿐이었다.
‘부지런한 것도 아주 마음에 들었고 말이지.’
모두가 힘들어서 쉬고 있을 때 유일하게 도일수만이 아침 수련을 빼먹지 않았다.
그 차이는 의외로 작으면서도 컸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차이는 더욱 커질 터였고.
“따라 와. 애들이랑 정식으로 인사해야지.”
“어, 표사님들이나 표두님들에게 말을 전해야···.”
“내가 윗사람이야. 어제 이야기가 끝난 부분이기도 하고. 그러니 토 달지 말고 따라 와.”
“옙!”
도일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실 말이 도사이지 이곳에서의 왕은 벽우진이었다.
호법들의 명성이 제법 대단하다고 하나 이곳에서 벽우진의 위상은 그 이상이었다.
몇 명 보지 못했지만 선풍도골과도 같은 풍모를 가진 호법들 중 누구도 벽우진을 가볍게 대해지 못했기에, 정확하게는 대호방의 부방주를 때려잡았다던 진구조차도 벽우진 앞에서는 설설 기었기에 도일수는 힘차게 대답하고는 벽우진의 뒤를 따랐다.
정식 인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벽우진은 제자들에게 도일수를 짧게 소개했다.
이번에 새로 받아들였다는 말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웃긴 건 그 말에 누구 하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야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터줏대감이자 첫째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서예지조차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다였다.
쉬이익! 쉬익!
그 후로는 벽우진과의 일대일 대련이 이어졌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도일수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마치 곤륜파의 무공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벽우진은 제자들에게 가르친 무공을 똑같이 펼치며 상대해주었던 것이다.
검법이든 도법이든 아니면 권장각이든 벽우진은 그 어떤 무공도 막힘없이 펼쳐 보이며 실전 같은 대련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었다.
그 모습이 도일수는 너무나 놀라웠다.
‘수, 수준이 달라.’
각자의 수준에 딱 맞춰서 눈높이 교육을 하는 모습에 도일수는 경악했다.
펼치는 무공 하나하나의 성취도가 어중간한 게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우리 사부님!”
“난 항상 볼 때마나 감탄사가 나온다니까. 진짜 대단하신 것 같아.”
“우리 사부님이니까.”
동갑내기인 양이추와 심대현이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매일 같이 보는 광경이지만 그렇다고 감동이 옅어지지는 않아서였다.
“우리가 빨리 강해져서 사부님의 짐을 덜어드려야 하는데.”
“더 열심히 해야지.”
“그러니까. 새로운 분도 오셨고.”
심대현의 시선이 오늘 새롭게 제자가 된 도일수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정작 도일수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입을 쩍 벌린 채로 양일우와 벽우진의 대련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부터는 비호표국 사람들과 같이 수련한다고 하니까.”
“곤륜파의 제자로서 못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
“당연하지.”
심대현과 양이추가 결의를 다졌다.
비록 무공에 입문한 시간은 짧지만 그렇다고 속절없이 당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 도호를 내려주시지 않는 걸까?”
“나도 사실 그게 궁금하기는 했어. 우리는 다 본산제자를 택했잖아? 사저야 속가제자라고는 하지만 무기명제자라 할 수 있고.”
< 제 15장. 너, 내 제자 할래?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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