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49화 (49/325)

< 제 15장. 너, 내 제자 할래? -03 >

유한열이 갓 절정에 오른 상태이고, 정휴와 마종석이 절정을 앞둔 초일류의 경지였다.

셋 모두 표국주와 표두에는 어울리지 않은 수준이었지만 벽우진은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망해버린 표국에 고급 인력이 남아 있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정도라도 돼서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희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 마음 끝까지 잊지 말고. 그럼 본론으로 넘어갈까.”

“예.”

“앞으로 두 달 동안 자네들은 여기에서 가르침을 받을 거야. 물론 곤륜파의 무공을 익힐 필요는 없어. 이미 익히고 있는 무공들이 있을 테니. 강요하지는 않겠다는 말이지. 같이 온 표사들도 마찬가지고. 쟁자수들의 경우 본인이 원한다면 속가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있어.”

“표사들이 익히고 있던 무공들을 포기한다고 하면요?”

유한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들이야 나이가 있으니 갈아엎고 다시 익히는 게 불가능하지만 아직 이십대인 젊은 표사들은 달랐다.

이류무공을 계속 익히느니 차라리 포기하고 새로 시작하는 게 낫겠다.

물론 전제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관이 없기는 한데, 나라고 막 아무나 제자를 받아들이는 건 아니라서. 이번 일 역시 비호표국이 실력을 갖춰야 실적을 올릴 수 있기에 추진한 것뿐이니까. 즉, 가르침을 내려주기는 하되 사제지간을 맺는 건 아니라는 소리지. 엄밀히 따지자면 투자라고나 할까. 물론 그냥 퍼주는 것도 아니고. 일단 계획대로 훈련을 받으면 적어도 3년 동안은 비호표국에서 일을 해야 해. 즉 그만두는 건 계약서를 작성한 후 3년 후에나 가능하다는 소리지.”

“괜찮은 사항 같습니다.”

애써 1인분 몫을 하도록 키워놓았는데 그만둔다고 말하고 더 큰 표국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그렇기에 유한열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난 도인이지만 장문인이지. 그런 만큼 손해 보는 건 싫어. 이용을 당하는 것보다는 이용하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동의합니다. 그런데 장문인.”

“묻고 싶은 게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말해. 괜히 속앓이 하지 말고. 안 그래도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여쭙기 송구하지만 너무나 중요한 사항이라 염치불구하고 한 가지 여쭈고 싶은 게 있습니다.”

유한열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연신 벽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곤륜파의 장문인인 벽우진에게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질문일 게 분명해서였다.

그렇기에 유한열은 심장이 쫄깃한 심정이었다.

“뭘 물어보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그냥 편하게 물어보라니까? 내가 막 화내면서 주먹질이라도 할 것 같아? 나 그렇게 막돼먹은 사람 아니다. 나도 평범한 인간이야.”

“흠흠! 저뿐만 아니라 표사들과 쟁자수들도 한 가지 걱정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아무래도 정마대전 당시 곤륜파가 큰 피해를 입은 만큼 무공이 소실되지는 않았을까 하고요.”

“에이. 그거 물어보려고 그렇게 조심한 거야? 난 또 되게 심각한 걸 물어보는 줄 알았네.”

“소실된 게 아닌가요?”

“당연히. 원래는 오히려 발전을 했으면 모를까 소실된 것은 없어. 도리어 완벽하게 원형을 되찾았다면 모를까. 그것에 대한 증명은 내일 청민에게서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자네들도 알다시피 내가 등장하기 전까지 곤륜의 맥을 이어온 것은 청민이니까.”

“그렇습니까.”

“그 외에 다른 궁금한 사항들은?”

가장 큰 산을 넘어서일까.

유한열을 비롯해서 두 사람은 미리 정리해 두었던 것들을 하나둘 풀었다.

특히 운영과 실무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대부분이 걱정이었다.

가뜩이나 망한 표국에 그나마 있던 실력 좋은 표사들과 표두들이 대거 다른 곳으로 적을 옮긴 상태였기에 셋 다 얼굴이 어두웠다.

“일보 전진을 위해 이보 후퇴하는 건 좋지만, 소득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일단 표행을 나갈 수 있는 인원도 너무 적고요. 이번에 데려온 쟁자수들을 키워서 삼급표사로 진급시키고 새로 신입 쟁자수들을 뽑는다고 해도 전력이 단번에 확 올라가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돈 걱정은 하지 말고. 괜히 청하상단이 있는 게 아니니까. 나도 재산이 적지 않고. 그리고 국주까지 표행을 나갈 수 있는 인원이 지금 서른 남짓이잖아? 이 정도면 인원이 너무 적은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소수정예로 큼직한 표행만 나가면 되니까.”

“소수정예로 표행을 나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만···.”

유한열이 말끝을 흐렸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소수정예로 큰 건의 표행을 나가기 위해서는 표물을 맡기는 의뢰자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보통 큰손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망해버린 비호표국에 표물을 맡길 리 만무했다.

일단 신뢰도 자체가 바닥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우려하는지 알아. 하지만 그 표행에 호법들이 함께 한다면 말이 달라지지.”

“아!”

유한열이 탄성을 터트렸다.

청해성 곳곳에 자리 잡은 산적들을 퇴치한 곤륜파의 호법이 표행에 함께 한다면 얘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혼자서 산채들을 박살내는 고수들인 호법들이 합류한다면 표물을 맡기려는 의뢰자들이 제법 몰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임시방편일 뿐이지. 중요한 것은 실력을 늘리는 일이야. 그래서 단기로나마 훈련계획을 짠 것이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따로 무공을 배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얻는 게 제법 많을 거야. 고수와의 대련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물론 얼마만큼 얻어 가느냐는 각자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겠지?”

벽우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말하는 의도는 분명했다.

그러나 그 말에 겁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했던 대로 정말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곤륜파의 무공이 고스란히 남아있단 말이지.’

더불어 소실되지 않았다는 말에 정휴와 마종석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비록 속가제자들에게 가르쳐주는 무공일지라도 그 수준이 지금 익히고 있는 무공보다 나을 게 분명해서였다.

더구나 현재 익히고 있는 무공은 한계가 너무나 명확했다.

‘연도 맺을 수 있고 말이지.’

더디기는 했지만 곤륜파는 분명히 성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인원이 적을 뿐이지 고수들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부방주가 태산권에게 두들겨 맞았음에도 대호방이 얌전한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있었고.

게다가 어찌됐든 비호표국의 실소유주가 벽우진인 만큼 좋은 인연을 맺어두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참 장문인. 감숙성의 소식은 들으셨는지요?”

“북해빙궁과 오독문에 관한 것이라면 알고 있다.”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습니까?”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더라고. 아니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든지.”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개인적으로 후자 쪽에 가깝지 않나 생각해서였다.

누가 봐도 곤륜파는 이제 막 재건을 시작한 단계니까.

물론 호법들이 곤륜파의 건재함을 알리기는 했지만 그 수준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나름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고.’

중원에 속해 있지만 변두리라는 말이 어울리는 지역이 바로 청해성이었다.

수많은 고수들이 즐비하고 밀집되어 있는 하남성과 호북성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천하제일고수는 늘 중원에서 나오기도 했었고.

“만약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서 도움을 청하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이제는 칠파일방과 사대세가라고 봐야지. 공동과 점창파는 멸문지화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오대세가 끼리의 유대관계도 예전 같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걸 묻는 건 혹시라도 내가 비호표국의 인원을 차출할까봐 걱정 되서 그런 거겠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제 몫도 못하는 애들을 앞세울 정도로 난 그렇게 무도한 사람이 아니다. 내 성격이 평범하지는 않아도 도리에 어긋난 짓은 하지 않아. 그 정도로 막나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주제넘은 질문을 해서 죄송합니다.”

유한열이 고개를 숙였다.

그로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했지만 벽우진 입장에서는 심기가 불편했을 수도 있어서였다.

“주제넘기는. 수장이라면 꼭 짚고 넘어가야지. 그게 비록 실소유주에게 물어야 한다고 해도 말이지. 오히려 난 아랫사람들을 아끼는 거 같아서 마음에 드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든 싸워도 내가 싸우지 애들한테 시키는 일은 없을 거야.”

유한열은 물론이고 정휴와 마종석의 얼굴도 밝아졌다.

이제 막 대면한 사이지만 왠지 모르게 허언을 할 것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아서였다.

오히려 방정맞은 게 연기가 아닐 정도로 벽우진에게서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겼다.

누가 봐도 위험해 보이는 분위기가 말이다.

휘이익! 휘익!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에 도일수는 숙소 뒤쪽에 있는 텅 빈 공터에서 홀로 박도를 들고 휘둘렀다.

다른 쟁자수들이 어제의 산행으로 인해 피곤하다는 핑계로 모두가 널브러져 있을 때 오직 그만이 혼자 나와서 아침 수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비호표국에 있을 때도 도일수는 아침 수련을 거른 적이 없었다.

“훅! 후욱!”

어느 대장간에서든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볼품없는 박도였지만 도일수에게는 하나뿐인 애병이었다.

또한 지금까지 함께 한 친구이기도 했다.

벌써 십 년 넘게 함께 한 병기가 바로 지금 들고 있는 박도였던 것이다.

한참 어린 꼬마 시절부터 함께 한.

“집중이 안 되네.”

기본기라 할 수 있는 수련을 반복하던 도일수가 갑자기 휘두르던 박도를 멈췄다.

그리고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서 한숨을 쉬었다.

어제 만났던 한 명의 여인이 그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서 도무지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청해제일미라고 해야 하나.”

눈을 감든 뜨든 선명하게 떠오르는 서예지의 미모는 어떤 의미로는 절세무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도일수가 살아오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미녀가 존재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다른 여제자도 상당히 예쁘장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서예지와 나란히 서 있자 그 미모가 순식간에 죽었다.

짝! 짝!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지는 미모에 도일수는 물론이고 쟁자수들과 표사들마저도 넋을 잃었다.

압도적인 미모도 미모지만 고고한 분위기가 그녀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정신 차리고 수련하자.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노력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박도를 땅에 거꾸로 박은 후 도일수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강하게 때렸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때려서 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윽고 도일수는 박도를 들고서 비호표국이 기본적으로 가르쳐주는 참격도결을 수련했다.

그러나 말이 참격도결이지 실상은 삼재검법을 도법에 맞게 조금 개량한 것에 불과했다.

“차하압!”

하지만 도일수에게는 이마저도 감지덕지였다.

제자가 아닌 한 자신의 비전절학을 전수해줄 무인은 강호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일수는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참격도결이라도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포기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실낱같은 가능성에 매달리는 게 더 나았으니까.

뚝. 뚝.

그런 그의 노력을 말해주듯 낡은 박도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굵직한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더불어 그의 얼굴 역시 선선한 산바람이 불어옴에도 불구하고 땀으로 흥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일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수련에만 집중했다.

‘더 노력해야 해. 내 나이가 벌써 스물이야. 여기서 더 뒤쳐질 수는 없어.’

도일수가 이를 악물었다.

벌써 몇 명이나 그를 앞질러 표사가 된 동생들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지닌 재능의 차이로 인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렇게 수없이 추월을 당했음에도 도일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해. 그게 금력이든 무력이든!’

어린 시절 뒷골목을 전전하던 그였기에 세상의 냉혹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셈이 빠르지도, 머리가 영악하지도 않았기에 도일수가 택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그리고 그 길에 도일수는 모든 것을 걸었고.

비록 그 선택의 끝이 그저 그런 삼류무사, 이류무사라고 하더라도 도일 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아직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끝난 게 아니니까!’

도일수의 눈동자에 독기가 줄기줄기 솟구칠 때 하나의 인영이 그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 제 15장. 너, 내 제자 할래?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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