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5장. 너, 내 제자 할래? -02 >
그때 제갈현의 뇌리에 하나의 문파가 떠올랐다.
정마대전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몰락의 길을 걸어 결국 멸문지화를 입은 과거의 대문파가 말이다.
그 문파가 다시금 기지개를 펴고 있다는 소식을 가문의 정보 조직을 통해 들었었고, 개방에 알아봐 달라고 부탁까지 했었다.
때문에 제갈현은 조금의 인연도 없었지만 현재 곤륜파에 대해 제법 상세하게 알고 있는 상태였다.
“의문의 고수가 나타나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중이라고 했었지.”
청민이라는 도사 한 명뿐이던 곤륜파가 지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젊은 고수 한 명과 열 명의 호법을 데리고 있었다.
제자들 역시 차곡차곡 늘리는 중이었고.
하지만 제갈현이 가장 놀란 이유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장문인과 열 명의 호법들이었다.
나타난 것과 동시에 청해성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했기 때문이다.
“곤륜. 곤륜이라.”
제갈현이 묘한 표정으로 곤륜파를 중얼거렸다.
고수가 아쉬운 그의 입장에서 곤륜파는 충분히 변수를 일으킬 수 있는 곳이었다.
더구나 천검문과의 악연 역시 그는 알고 있었고, 대략적으로나마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지도 유추할 수 있었다.
청하상단이 건재하다는 건 결국 곤륜파가 이겼다는 뜻이었으니까.
“문제는 사천당가와 마찬가지로 부탁할 면목이 없다는 것 정도랄까.”
동생인 제갈명이 사천당가의 장원 안으로 들어간 것만 하더라도 사실 대단한 결과였다.
제갈현과 제갈명은 사실 문전박대를 당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보여준 사천당가의 성향을 생각하면 그래도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나름 배려해준 게 분명했다.
“성격이 괴팍하다는 말도 있고.”
부드러운 청민과는 완전 상반되는 성격이라는 보고를 받았기에 제갈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괄괄한 성격상 당문경과 달리 아예 상대조차 안 해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당해도 할 말이 없기도 하고.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최대한 이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하나.”
제갈현의 심유한 눈동자가 책상 위에 놓인 지도로 향했다.
그런 그의 시선은 청해성과 사천성을 넘어 신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최선이라면야.”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제갈현의 시선이 산서성으로 향했다.
현재 북해빙궁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는 곳이 바로 산서성이었기 때문이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같이 큰 세력이 터를 잡고 있지 않는 곳이다 보니 피해가 더욱 컸기에 제갈현이 무거운 눈빛으로 산서성의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일단의 무리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서 곤륜산을 오르고 있었다.
대략 오십여 명의 인원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모두가 다 남자들이었다.
게다가 연령대도 다양했다.
사십대부터 십대 초반의 소년들까지 있었던 것이다.
“여기가 곤륜산이구나.”
“난 청해성 출신인데 곤륜산은 처음 와봐.”
“근데 사실일까?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사실이.”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제자들도 받고 있다던데?”
“그럼 뭐해. 이미 쫄딱 망한 문파인데.”
허리에 검이나 도, 혹은 창이나 손도끼를 찬 장정들이 떠들썩하게 대화는 나누었다.
그 중 몇몇은 곤륜파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불쾌한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어이, 장우. 예전에도 말했지만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떠나도 돼. 붙잡지 않으니까. 하지만 남기로 마음먹었으면 분위기는 좀 흐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죄, 죄송합니다.”
“만약 장문인께서 들으셨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자네도 장문인의 성격에 대해서 들었을 텐데.”
“···상당히 괴팍하다고 들었습니다.”
장우라 불린 남자가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들리는 소문이 하나만 사실이라도 두들겨 맞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아서였다.
“다들 말조심 해. 예의를 지키란 말이야.”
“예!”
전대 국주에 이어 새롭게 비호표국의 국주가 된 유한열의 말에 표사들은 물론이고 혹시 몰라 모조리 데려온 쟁자수들도 힘차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 중 몇 명은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애초에 표사를 목표로 들어온 아이들이었기에 곤륜파의 무공을 배운다고 하자 잔뜩 기대한 것이었다.
비록 지금은 몰락한 문파라고 하나 무공이 소실되지 않았다면 과거 천하를 울렸던 절학을 운 좋게 배울지도 몰랐다.
‘어중간한 무공이 아닌 진짜 무공을 배울 수 있어.’
쟁자수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하지만 아직도 표사가 되지 못한 도일수는 반짝이는 눈으로 웅장한 산세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 곤륜산을 올려다봤다.
강호를 호령하는 고수가 꿈인 그였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냉정했다.
별다른 재능이 없는지 나름 이름 있는 문파나 세가의 제자가 되기 위해 온갖 발품을 팔았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처참했다.
단 한 곳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나이를 먹을 대로 먹고 시기를 놓친 도일수가 생각한 것은 표국이었다.
비록 뛰어난 무공을 배울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가르쳐주는 무공이 있으니 그것을 최대한 익히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혹시라도 은거고수와 인연을 맺을 지도 몰랐기에 도일수는 한 가닥 기대를 놓지 않고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물론 결과적으로 발을 들였던 비호표국이 일거리를 따내지 못해 빚이 쌓여 망하고 말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새로운 기회가 그를 찾아왔다.
곤륜파라는 이름의 기회가 말이다.
‘본산제자는 힘들겠지만 속가제자라도 반드시 되어야 해!’
도일수가 눈을 번뜩였다.
본산제자들이 익히는 무공보다는 비록 수준이 떨어진다고 하나 속가제자들이 익히는 무공도 능히 절정에 오를 수 있는 상승무공이었다.
그리고 도일수는 지금 상황에서 절정무공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현재 비호표국에서 알려준 기본공을 수십 년 익혀봤자 일류지경에 발끝도 대지 못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근데 진짜 가르쳐줄까? 우리야 기본공을 익힌 지 몇 년 되지 않았으니 포기하고 새로 쌓아도 되지만 표사님들이나 표두님들은 상황이 다르잖아. 적게는 십 수 년, 많게는 이삼십 년 동안 무공을 수련했는데 그걸 포기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게다가 곤륜파의 무공이 소실되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고.”
“그러니까.”
도일수의 뒤로 이제는 제법 짬이 찬 쟁자수들의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하지만 뭐라고 할 수 없는 게 그 부분은 도일수 역시 걱정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기지개를 펴며 다시 비상할 준비를 하는 곤륜파이지만 만약 무공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면?
그렇다면 배우는 걸 다시 생각해 봐야 했다.
만약 소실된 무공을 배웠다가 주화입마에 빠지면 자신만 손해였으니까.
“국주님.”
“왜 그러나, 정 표두.”
“정말 괜찮은 거겠죠?”
“적어도 빚은 없지 않나. 소문이 사실이라면 우리로서는 정말 필요했던 든든한 뒷배가 생긴 거고.”
“만약 성격이 진짜 지랄 같으면요?”
이제는 둘 밖에 남지 않은 표두 중 한 명인 정휴가 얼굴을 굳히며 작게 말했다.
표사들과 쟁자수 아이들에게는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지만 사실 그 역시 염려가 되는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비위를 맞춰드릴 수밖에. 어찌됐든 이제 비호표국의 주인이시지 않나.”
“차라리 청하상단의 산하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실소유주가 달라지지는 않아.”
유한열의 말에 정휴가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나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찌됐든지 간에 망해가는 비호표국을 구제해준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왜들 그렇게 다들 죽상이야?”
“어?”
“산에 오르는 게 힘들어서 그런 건 아닐 테고. 역시 마음고생이 심해서인가?”
“누, 누구십니까?”
선두에서 걸어가던 유한열이 갑자기 나타난 청년 도사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겉보기에는 나이가 한참이나 어려보이지만 곤륜파의 장문인이 약관 남짓한 외모라는 걸 알고 있기에 혹시 몰라 조심했던 것이다.
“누구일 거 같나? 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이.”
“어···.”
“호, 혹시 장문인이십니까?”
머뭇거리는 유한열을 대신해 정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본능적인 직감이 소문의 괴팍한 장문인이라고 말하고 있어서였다.
“맞아. 참고로 보이는 것보다 내 나이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자세히는 몰라도 자네들보다는 많아. 그러니까 언짢아하지 말고.”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가까스로 신색을 회복한 유한열과 달리 정휴는 여전히 바짝 얼은 모습으로 크게 소리쳤다.
누가 보면 군벌에서 훈련 받는 신입 병사라고 착각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괜히 불필요한 과정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꿀꺽!
왠지 모르게 네 글자가 두 사람의 뇌리에 콕콕 박혔다.
불필요한 과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둘 다 본능적으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둘 다 뒷짐을 지고 있는 벽우진의 손을 힐끔거렸다.
“일단 따라들 와. 설명은 안에서 해줄 테니까. 겸사겸사 곤륜파도 구경하고. 사람만 좀 적을 뿐이지 있을 건 다 있으니까.”
“예.”
벽우진이 손수 안내해주겠다는 듯이 몸을 돌리자 유한열을 위시로 비호표국의 사람들이 하나둘 곤륜파의 산문을 넘었다.
그리고는 하나같이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금이야 몰락한 문파지만 과거에는 구대문파에 속해 있을 정도로 대문파였던 곳이 곤륜파였다.
그때 당시에는 감히 그들이 이렇게 쉽게 안으로 들어올 정도로 문턱이 낮지 않았었기에 그들은 신기한 눈으로 주위를 구경했다.
곤륜파의 안내 겸 소개를 서예지에게 맡긴 벽우진은 유한열을 비롯해도 둘뿐인 표두들과 따로 자리를 가졌다.
아무래도 인원이 적지 않다 보니 우선은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세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또르륵.
세 사람을 이끌고서 옥청궁으로 들어온 벽우진이 직접 준비한 차를 세 명에게 따라주었다.
그러자 셋 모두 잔뜩 긴장한 얼굴로 차를 받았다.
“술을 기대했다면 실망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시간이 시간인지라. 그리고 중요한 얘기를 하는데 술 마시면서 할 수는 없잖아?”
“맞습니다.”
“저희는 차도 좋아합니다.”
“그래?”
벽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휴와 마종석을 번갈아 쳐다봤다.
선비와도 같은 분위기의 유한열은 술과 딱히 어울려 보이지 않았지만 표두들인 두 사람은 달랐기 때문이다.
마치 파락호를 연상시키는 외모도 외모지만 둘 다 우락부락한 덩치를 가지고 있기에 술과는 뗄래야 뗄 수 없어 보여서였다.
“물론 술도 좋아하지만요.”
“솔직하게 말해도 돼.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두, 둘 다 좋아합니다.”
산적 두령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외모를 가진 마종석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벽우진 앞에서 자꾸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딱히 강렬한 기파를 뿌리거나 기도가 대단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주눅이 들었다.
‘백면귀를 때려잡았다고 해서 그런 건가?’
천검문과의 일전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백면귀와 황면귀를 때려잡은 일화는 유명했다.
특히 백귀채를 몰살시킨 사건은 청해성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근데 자기소개는 하지 않을 건가? 내 이름이야 모르지 않을 테고.”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번에 국주로 임명받은 유한열입니다.”
“유 국주야 따로 보고를 받아서 알고 있지.”
“처음 뵙겠습니다. 정휴입니다.”
“마종석입니다. 장문인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벽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휴와 마종석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하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 모습에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두 눈만큼은 날카롭게 둘의 육체를 훑었다.
“반가워. 앞으로 잘해 보자고. 내 세 사람에게 거는 기대가 크니까. 물론 불만사항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잖아? 앞으로 키워가는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거야.”
< 제 15장. 너, 내 제자 할래?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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