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4장. 북한남독(北寒南毒). -05 >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천년마교가 발호할 당시 가장 먼저 곤륜파를 노렸던 상황과 묘하게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안 그래도 나 역시 그 생각이 들었다. 안타까운 마음도 있지만, 꼴좋다는 생각도 들었거든.”
“난 솔직히 안타까운 마음은 안 드는데. 우리가 당한 게 너무 크니까. 어쨌든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어?”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 거 같아?”
“똑같겠지.”
당민호의 반문에 벽우진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듣지 않아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지 충분히 유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적절하지는 않지만 역사는 반복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으니까.
“맞아. 공동파가 도주하고 점창파가 무너졌지만 중원의 백도문파들은 지원에 지지부진한 상태야. 오히려 탁상공론이 판을 치고 있는 상황이지.”
“과거에도 그랬으니까. 그 성향이 어디 가겠어? 다만 당한 쪽만 불쌍하지.”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공동파와 점창파의 생존자들이 어떤 심정일지 충분히 이해가 가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벽우진은 가여워하지 않았다.
58년 전 공동파나 점창파 역시 다른 문파들과 똑같았으니까.
“맞아. 당한 쪽이 병신이지. 애초에 다른 이에게 기댈 생각을 하면 안 돼. 결국에 자신을 지키는 건 자신뿐이니까.”
“명언이지. 그래서 짝짜꿍한 북해빙궁이랑 오독문은 그대로 남진, 북진 중이야?”
“응. 명문정파들만 주로 노리고 있어. 아무래도 현재 중원의 패권을 잡고 있는 건 백도이니까. 마도와 사도는 힘이 미약하고.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지겠지.”
“골머리 좀 썩겠군.”
남의 집에 불이 난 것처럼 벽우진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공동파가 무너지고 점창파가 녹아내린 건 그와 크게 상관없었다.
예전이야 걱정하고 지원을 고민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골머리뿐이겠어. 아주 머리가 복잡하겠지. 일단 공동파와 점창파를 잃었으니까.”
“사분오열되는 게 뭐 한두 번도 아니고.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그때서야 나서겠지. 적당히 힘이 빠질 때를 기다리면서 말이야.”
“그렇겠지.”
곤륜파와 마찬가지로 사천당가 역시 버리는 패로 사용된 적이 있기에 당민호도 딱히 중원무림을 동정하지는 않았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천년마교가 발호했다면 당연히 응전을 하겠지만 북해빙궁과 오독문은 세외무림의 문파였다.
그렇다고 자신들을 공격한 것도 아니었기에 굳이 나설 이유는 없었다.
‘오대세가끼리의 유대관계가 예전 같은 것도 아니고.’
당민호의 두 눈이 침중해졌다.
뒤끝이라면 사천당가 역시 어느 곳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벽우진이 갇혀 있어 실질적으로 겪은 게 없는 것과 달리 그는 정마대전의 처음과 끝,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직접 봐온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는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속이 아주, 매우 시원한 상태였다.
“되게 고소해 하는 거 같은데?”
“너는 안 그러냐?”
“솔직히 말하면 아주 꼬시지. 크크큭!”
벽우진이 천덕스럽게 웃었다.
아예 대놓고 박장대소했던 것이다.
하지만 살짝 품위는 없어보일지언정 지켜보는 당민호도 속이 시원했다.
“사실 나도 그래. 아무래도 당한 게 있으니까. 그걸 잊지 못하기도 했고.”
“게다가 이제 시작일 뿐이잖아? 아마 바로 사천당가에 사람을 보낼 거 같은데. 특히나 오독문 때문에서라도.”
“안 그래도 제갈세가에서 바람같이 달려왔다. 전서응을 먼저 보내고 뒤이어 사람까지 왔다. 제갈세가의 부가주라고 할 수 있는 가주의 친동생이 직접 말이지.”
“그럴 만 하지. 중원에 터를 잡고 있는 명문정파 중에 독에 해박한 곳은 몇 없으니까. 그 중에 사천당가를 제외하면 다 고만고만하잖아?”
당민호의 얼굴에 자부심이 서렸다.
남만의 오독문이 독으로 유명하다지만 사천당가는 그 전부터, 아니 과거부터 전 무림에 독으로 명성을 떨친 가문이었다.
그런 만큼 감히 오독문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독과 암기로 한정하면 우리 가문이 최고이기는 하지.”
“그건 나도 인정.”
“너뿐만 아니라 세인들, 무인들 모두가 인정한다.”
“그런데 오독문은 아닌 모양인데? 당가랑 맞붙을 자신이 있으니까 이빨을 드러낸 거 아니겠어? 자기들의 가장 큰 적이 사천당가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까.”
벽우진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바보도 아닌데 오독문이 이길 자신도 없이 중원의 문파들을 공격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야 누구라도 가질 수 있지. 하지만 문제는 그 결과가 자신들이 생각한 대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거지.”
“오, 패기 봐라.”
“패기가 아니라 자신감이다. 그만한 역량도 있고.”
“인정.”
“하지만 굳이 먼저 나서서 달려들 필요는 없지.”
당민호가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제갈세가가, 중원의 명문정파들이 도와달라고 쪼르르 달려온다고 사천당가가 꼭 나설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천당가가 힘들 때 자신들도 피해가 상당하다고 외면했던 것들이 말이다.
“나도 동감. 지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겠다는데 굳이 참여할 필요는 없지. 나한테 이빨을 드러낸 거라면 모를까.”
벽우진이 히죽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당민호에게는 섬뜩하게 다가왔다.
마치 이빨을 드러내면 보이는 족족 머리를 똑똑 따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본가에 가야 할 것 같다. 만약이긴 하지만 오독문이 공격해 올 수도 있으니까. 오독문 입장에서는 본가가 가장 꺼림칙할 테고.”
“필교도 데려갈 거야?”
“아니. 소윤이랑 아이들만 데리고 갈 거다. 공사는 계속 해야지.”
“역시 이런 일은 철두철미하다니까.”
벽우진이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당필교를 데려간다고 하면 붙잡을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잘 부탁한다. 너희 아이들만큼 잘 지켜줘.”
“그건 걱정 마라. 우리 아이들처럼 지켜주마. 근데 워낙에 우리가 쪼그만 해서 북해빙궁이나 오독문이 신경 쓸 것 같지가 않네.”
“아직은 전력이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곧 알려질 것 같은데. 네가 얌전히 있는 성격도 아니고.”
“언젠가는 알려지겠지. 어쨌든 알았어. 조심히 집에 가고. 오늘 바로 갈 거지?”
“점심 먹고. 필교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설명은 해주어야 하니까.”
갑작스러운 북해빙궁과 오독문의 발호에 사천당가 역시 분주해졌다.
봉문하고 있었던 때라면 모를까 하필이면 막 봉분을 푼 상태였기에 제갈세가를 시작으로 찾아오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점창파와 공동파가 기습을 당한 만큼 사천당가도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없기에 당민호는 계획했던 일정보다 빨리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배웅은 멀리 못 간다. 나도 바쁜 몸이라.”
“기대도 안 했다. 그럼 일 보고. 이따 보자.”
“그래.”
당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말과 알려줄 소식을 다 전해주었기에 알아서 물러나 주는 것이었다.
잠시 후 당민호가 집무실을 나갔으나 벽우진은 붓을 잡지 않았다.
“전쟁이라. 천년마교가 힘을 회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 시기에 뛰쳐나왔단 말이지. 그 말은 자신이 있다는 소리인데 천년마교가 나서지 전에 중원을 양분할 자신이.”
턱을 쓰다듬으며 벽우진이 눈매를 좁혔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렇게 밖에는 추측이 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만약 두 곳이 밀약을 맺은 게 아니라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고.
“확실히 아직 갈 길이 멀어.”
거의 없다시피 한 정보력에 벽우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한 번 곤륜파의 현재 수준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당민호가 손자들을 이끌고 본가로 향하고 있을 무렵 사천당가의 가주인 당문경은 제갈세가의 2인자이자 부가주와 맞먹는 직위를 가지고 있는 제갈명을 마주하고 있었다.
또르륵.
명차 중 하나인 철관음의 깊고 그윽한 향기가 방 안을 은은하게 채워갔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훌륭한 차향과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지난 일로 당가가 얼마나 서운을 느꼈을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본가 역시 잘 알고 있고요. 하지만 염치불구하고 이렇게 부탁할 정도로 상황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당 가주님.”
“그럼 제가 할 말도 알고 계시겠군요.”
“충분히 배신감을 느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지원을 안 보내려고 한 게 아닙니다. 서두른다고 했으나 이미 마교의 마인들이 사천성을 넘어 호북성에 진입한 상태였기에 자연스레 충돌한 것뿐입니다.”
“그렇습니까.”
시종일관 간절한 어조로 말하는 제갈명의 모습에도 당문경의 표정변화는 없었다.
그저 낮게 대답하며 차를 홀짝이기만 했다.
한데 그럴수록 제갈명은 애가 탔다.
오독문을 막기 위해서는 사천당가의 지원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만약 바라시는 게 있으시다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너무 늦게 말을 꺼내셨습니다.”
“···당 가주님.”
고개까지 숙였음에도 당문경의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무겁고 서늘한 눈빛에 제갈명은 침을 삼켰다.
태도를 보아하니 오늘도 당문경을 설득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사천당가의 도움이 없이는 피해가 너무 커진다. 지금 진압하지 못하면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게야.’
제갈명이 입술을 깨물었다.
오독문 하나였다면, 혹은 북해빙궁 한 곳만 중원을 침공했다면 굳이 사천당가를 찾아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중원무림의 힘이라면 아무리 북해빙궁과 오독문의 저력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천하의 그 천년마교조차도 어찌됐든 막아낸 중원무림이 아니던가.
하지만 문제는 정황상 북해빙궁과 오독문이 손을 잡았고, 이들을 밀어내더라도 천년마교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반드시 사천당가의 힘이 필요한데···.’
제갈명은 물론이고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현 역시 북해빙궁과 오독문보다는 그 뒤에 올지도 모를 천년마교를 걱정하고 있었다.
중원무림의 힘이 약해진 때를 천년마교가 가만히 놔둘 리 없었기 때문이다.
북해빙궁의 빙혼강시(氷魂僵屍)나 오독문의 독강시(毒僵屍)가 위협적이라고는 하지만 중원 전체의 힘으로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점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천당가의 지원이 필수였다.
‘···쉽지 않구먼.’
제갈명이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모습에도 당문경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앞에 앉아 있는 제갈명이 왜 이리 절실하게 도움을 요청하는지 모르지 않으나, 사천당가는 은혜도 원한도 잊지 않는 가문이었다.
진짜 사천당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렇게 말로만 지껄이는 게 아니라 진정어린 사과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리 할 리가 없지. 했으면 진즉에 했을 테니까.’
사실 당문경도 어떻게 보면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다른 문파나 가문보다 자신의 가문이 훨씬 더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성의나 서신 정도는 보내야했다.
그 정도의 인연은 있었으니까.
아무리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나 그 정도 여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당 가주님. 지금 이 순간 죽어가고 있을 후기지수들과 무인들을 생각해 주십시오. 저희가 실수를 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독문의 손에 죽어가는 이들 중에는 그저 사문을 지키고자, 사형제를 지키고자 의기와 협심을 가지고 검과 주먹을 든 이들이 있습니다. 부디 그들을 생각해 주십시오.”
쿠웅!
< 제 14장. 북한남독(北寒南毒). -05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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