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4장. 북한남독(北寒南毒). -04 >
서서히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보며 상쾌하게 청소를 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심소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잠이 아직 덜 깼는지 목이 상당히 잠겨 있었다.
“형이랑 같이 하려고. 혼자 하기에는 너무 넓잖아.”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리고 혼자하면 심심하잖아. 헤헤! 나도 운동도 할 겸. 너무 편하니까 사실 아직 적응이 안 돼.”
“무공수련 때문에 더 힘들 텐데?”
심대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육체적인 노동을 생각하면 객잔보다 지금이 훨씬 힘든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누가 시켜서 하는 거였잖아. 근데 무공수련은 날 위한 거니까. 그리고 재미있기도 하고. 난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내가 무공을 배우고 있다니. 그것도 대 곤륜파의 무공을 말이야!”
이제 잠이 좀 깼는지 심소천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소리쳤다.
그러다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자신들이야 깨어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그래.”
“그치?”
“응. 그리고 지금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조금 을씨년스럽지만 앞으로는 많이 달라질 거야.”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야지. 사부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맞아.”
심대현이 다부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것이야말로 벽우진에게 보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어머? 너희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바닥 좀 쓸려고. 아침 운동도 좀 하고.”
“너무 일찍 일어난 거 아냐? 청소는 아침 먹고 해도 되는데.”
“미리 해두는 거지. 습관이 되기도 했고.”
이른 아침임에도 가지러한 옷차림으로 밖에 나온 심대혜를 보며 심대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사람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소혜도 나왔어?”
“응. 내 기척에 깼나 봐.”
“나도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어요!”
냉큼 언니 옆에 나란히 서는 막내의 모습에 심대현은 물론이고 심소천도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리기도 했지만 형제들 중에 가장 아침잠이 많은 아이가 심소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무 일러. 좀 더 자. 그래야 키도 더 크지.”
“괜찮아요. 잠은 충분히 잤는걸요. 어제 일찍 자기도 했고. 그리고 애들 밥 줘야 해요!”
심소혜가 다부진 얼굴로 소리쳤다.
마치 굶고 있는 아이들을 자신이 챙겨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밥을 줘야 하기는 한데···.”
“애들은 제가 맡아서 밥 줄게요!”
“다들 일찍 일어났네?”
“어?”
사 남매가 이른 아침부터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아직은 어둑한 산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걸어 나왔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사 남매 중 놀라는 이는 없었다.
곤륜파 내부이기도 했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아서였다.
“꼭두새벽에 산에는 왜 간 거야?”
“이 시기에 좋은 녀석들이 많이 돌아다니거든. 호법님들께 드릴 약주를 만들 겸 다녀왔지.”
“뱀 잡은 거예요?”
“응. 근데 보여줄 수는 없어. 소혜한테는 아직 위험해.”
“이추 오빠도 잡는데···.”
꼼지락거리는 망태기를 보며 심소혜가 볼을 부풀렸다.
두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 양이추도 뱀을 잡는데 자신은 안 된다고 하자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추는 어려서부터 뱀이랑 친했으니까. 하지만 소혜는 아니잖아.”
“저도 잘 할 수 있어요!”
“나중에 좀 더 익숙해지면 그때 같이 하자. 오빠가 뱀 잡는 거 가르쳐줄게.”
“히잉. 알았어요, 오빠. 아니, 사형.”
심소혜가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콩 때렸다.
이제는 사형제간이 되었음에도 아직 사형이라는 말이 익숙하지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호칭도 천천히 익숙해지면 돼. 사부님이나 호법님들 앞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지만.”
“근데 난 이렇게까지 자유로워도 되나 싶기도 해.”
“뭐, 어때. 들어온 시기가 비슷한데. 그렇다고 달로 항렬을 끊을 수는 없잖아?”
엄밀히 따지면 심대현보다 일찍 제자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양이추는 항렬에 대해서는 크게 예민하게 굴지 않았다.
동갑이기도 했고, 굳이 그렇게 깐깐하게 항렬을 정해야 하나 싶기도 해서였다.
벽우진도 딱히 그 부분에 대해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그것도 그렇지. 나야 편하니까 좋고.”
“내 말이.”
“자자, 수다는 이쯤하고 각자 할 일 하러 가자. 벌써 시간이 꽤 지났어.”
“예!”
박수와 함께 가장 나이가 많은 양일우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수다를 떨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여기 있는 이들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다들 고수들이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근데 사형.”
“왜?”
“도사인데 술 마셔도 되는 거예요? 원래 술은 기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신선들 중에 술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다고 하니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은데? 스님들도 곡차라고 해서 술을 아예 안 드시는 건 아니고. 물론 그런 스님은 상당히 적다고 하지만.”
심소천의 물음에 양일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매일 술에 절어 사는 게 아니라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게다가 무인이라는 존재가 어차피 일반적인 행동양식에서 살짝 벗어나 있기도 하고.
“헤에. 정말요?”
“응. 그리고 뱀술은 약주에 가까워. 그러니 난 괜찮다고 생각해. 아니면 팔아도 되고.”
“아!”
심소천이 탄성을 터트렸다.
거기까지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끼이익.
모두가 각자의 할 일을 찾아 뿔뿔이 흩어질 때 심대혜는 주방으로 향했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사람을 구하는 게 맞지만 아직은 인원이 적기에 심대혜는 자신이 직접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나름 요리에 자신도 있었고 말이다.
“먼저 와 있었네?”
“사저.”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아니에요. 저도 막 왔는걸요.”
서예지의 등장에 심대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인원이 그리 많지 않기에 그녀 혼자서 해도 충분했다.
그런데 서예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주방을 찾아왔다.
“같이 가자니까.”
“저 혼자서도 할 수 있는데요.”
“그래도 혼자하면 심심하잖아. 사매가 오기 전에는 내가 했던 일이기도 했고.”
“이제는 놓으실 때가 되셨죠.”
“아직은 아니거든?”
서예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본격적으로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그녀는 사부인 벽우진이 참 아이들을 잘 뽑았다는 생각을 했다.
무재도 무재지만 하나같이 착하기 짝이 없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들이기도 하고.’
서예지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야무지게 채소를 다듬는 심대혜를 바라봤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나서서 하는 게 그녀로서는 너무나 대견하고 기특했던 것이다.
“진짜 착착 진행되고 있네.”
“예?”
“우리 사문 말이야. 처음에는 사부님이랑 청민 사숙 밖에 없었거든. 곤륜파의 명맥을 제대로 이었는지를 따지면 사부님 밖에 안 계셨고.”
“저도 들었어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곤륜파가 재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고요.”
심대혜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자신들이야 당연히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라고 다짐하며 열심히 수련하고 있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 시선들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물며 중원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갔던 문파를 다시 그 정도로 일으켜야 하니까.
“그건 우리 사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들이 하는 생각이고. 만약 곤륜파가 힘이 없었다면 청하상단이 지금까지 유지되지는 않았을 거야. 나 역시 이렇게 편하게 살고 있지는 못했을 테고.”
“그런가요?”
“응. 곤륜파는 사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해. 아직 세력이 뒤받쳐주지 못해서 그렇지.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자, 얼른 준비하자.”
서예지가 능숙하게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 탕을 끓이기 시작했다.
나이대가 적지 않은 이들이 많은 만큼 국물은 필수였다.
똑똑똑.
“들어와.”
오늘도 어김없이 집무실에 앉아 무언가를 작성하던 벽우진이 문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당민호가 당당하게 집무실의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한데 그의 표정이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벽우진 못지않게 여유로운 태도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당민호가 지금은 상당히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뭘 그렇게 매일 쓰고 있는 거야?”
“곤륜파에 무공이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한 권으로 다 정리가 안 되는 무공도 있고. 당가도 상중하 권으로 나눠져 있을 텐데?”
“그렇긴 하지.”
“게다가 난 주석까지 달고 있다고. 이게 보통 쉬운 건 줄 알아?”
“생각보다 열심히 하네.”
당민호가 살짝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문인으로 앉아 있는 것도 믿기지 않지만 저렇게 오랫동안 책임감을 가지고 업무를 본다는 게 신기해서였다.
누가 봐도 농땡이를 피우는 모습이 어울리는 게 벽우진이었으니까.
“생각보다? 싸우자는 거냐?”
“그럴 리가. 내가 찾아온 건 좀 충격적인 사건이 터져서 알려주려고 온 거다.”
“충격적인? 무슨 일인데? 소림사라도 망했어?”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공동파가 망했다.”
벽우진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소림사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히 충격적인 소식인 건 분명해서였다.
게다가 공동파가 있는 공동산은 청해성과 맞붙어 있는 감숙성에 있었다.
“진짜? 농담 아니고?”
“이런 농담을 하려고 내가 이 이른 시간에 널 찾아오지는 않지.”
“그렇긴 하지. 손녀 무공 봐주기도 시간이 없는데.”
“···요즘에는 내 무공수련에 더 시간을 할애한다. 어쨌든 공동파가 야밤에 기습공격을 당해 현재 장문인이 죽고 몇 명의 장로들과 함께 제자들이 도주 중이다.”
벽우진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말하는 모습을 보니 진짜인 것 같아서였다.
더불어 머리에 의문이 들었다.
공동파가 비록 구파일방에서 말석에 해당되는 문파라고 하나 그렇다고 만만한 곳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격한 곳은?”
“북해빙궁. 그것도 강시를 이용했어.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해.”
“설마 다른 곳도 공격한 거냐?”
“북해빙궁은 공동파만 노린 게 아니야. 나름 힘 좀 쓴다는 군소방파들도 같이 공격했어. 하지만 여기까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지. 문제는 남쪽이야. 남만의 오독문이 마치 북해빙궁과 약속한 것처럼 북상했어. 공격한 곳은 똑같이 구파일방 중 한 곳인 점창파고. 근데 피해가 심각해. 독 때문인지 점창파의 9할이 녹아내렸어.”
“일부러 노렸군.”
벽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우연히 겹쳐서 같은 시기에 움직였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분명 두 곳 간의 밀약이 있었을 테고,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일부러 구파일방을 노렸을 가능성이 컸다.
두 곳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힘으로써 자신들의 힘을 확실하게 알릴 수 있을 테니까.
더불어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구파일방의 힘도 축소시킬 수 있고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래. 시기도 생각보다 절묘하고.”
“선수를 친 느낌인데. 천년마교가 움직이기 전에.”
“나도 같은 생각이다.”
사실 백도의 힘은 이미 과거 정마대전 직전에 거의 근접해 있는 상태였다.
시간이 제법 흐른 만큼 복구가 웬만큼 되었던 것이다.
다만 이번에 두 문파가 큰 피해를 입은 건 생각지도 못한 기습을 당한 게 컸다.
강시를 이용한 것도 예상 밖이었고.
“근데 상황이 웃기네. 마치 과거 우리와 사천당가랑 똑같은데?”
< 제 14장. 북한남독(北寒南毒).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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