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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44화 (44/325)

< 제 14장. 북한남독(北寒南毒). -03 >

백수장존의 수신호에 대열을 맞추고서 서 있던 이백여 명 중 등에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던 백 명이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마치 관처럼 보이는 직사각형의 목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사실 나도 네가 나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공동파 녀석들은 자신들이 공격당할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일단 야습이니까. 거기다 전쟁을 겪어본 이들이 몇 명이나 되겠어? 기껏해야 대련이니 비무니 일대일 수련만 했겠지. 몇 명은 검진이나 좀 연습해 봤을 테고.”

“개봉해.”

“존명.”

천라혈존이 시시덕거리는 백수장존의 말을 끊으며 싸늘하게 지시했다.

그러자 전신은 물론이고 얼굴마저 죄다 가린 특이한 복장을 한 이들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이윽고 땅에 박히듯이 세워졌던 목관이 하나둘 들썩였다.

쿠우웅!

일렬로 나란히 세워진 관들이 일제히 흔들리더니 이내 뚜껑이 열렸다.

그런데 뚜껑이 개봉된 순간 무시무시한 한기가 공터를 휘감았다.

목관 안에 있던 냉기가 순식간에 사위를 집어삼켰던 것이다.

“어후, 좋다.”

새벽의 안개처럼 하얗게 내리는 서리에 백수장존이 늙은이처럼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고향보다 더운 중원의 날씨에 조금 짜증이 났었는데 목관에서 냉기가 흘러나오자 더위가 꽤나 가시는 기분이었다.

“쓸어버려.”

저벅저벅.

반면에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던 천라혈존은 이어서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목관 안에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한데 그들의 모습이 조금은 괴이했다.

중원양식과는 다른 의복도 의복이지만 얼굴이 얼음장처럼 창백했던 것이다.

스으으으···.

게다가 전신에서는 북풍한설과도 같은 한기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목관에서 흘러나오는 한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한기가 말이다.

번쩍!

그러던 중 괴인들이 일제히 눈을 떴다.

마치 짠 것처럼 백 명의 인원이 동시에 눈을 뜬 것이다.

한데 그들의 눈자위에는 동공이 없었다.

그저 새하얀 빛만 뿌렸다.

쌔애애액!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지는 백안을 드러낸 이들이 일제히 땅을 박찼다.

아래 보이는 공동파를 향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렸던 것이다.

뎅뎅뎅뎅!

잠시 후 공동파의 외원이 시끄러워졌다.

갑작스러운 야습에 종소리와 온갖 비명소리가 뒤섞였던 것이다.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그러나 혼란은 의외로 길지 않았다.

괜히 구대문파의 한 곳이 아니라는 듯이 일대제자들과 고수들이 발 빠르게 괴인들을 막아섰던 것이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로군.”

“얼마나 버티려나.”

벼랑에 나란히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두 사람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살짝 기대하는 천라혈존과 달리 백수장존은 약간 심드렁한 기색이었다.

공동파라지만, 그것도 정마대전의 피해를 대부분 복구했다고 하나 백수장존은 오늘의 미래가 자신의 예상과 크게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평화에 찌들어 있던 중원과 달리 그들은 하루하루가 생존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살아온 길 자체가 다르지.’

비옥하고 따뜻한 중원과 달리 그들이 살아온 땅은 차갑기 그지없는 빙토(氷土)였다.

차갑고 시린 것을 넘어 꽁꽁 얼어 있는 대지에서 살아남기란 생각보다 너무나 어려웠다.

거대한 자연은 어른이건 아이건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았으니까.

“크아아악!”

“뭐, 뭐야 이건!”

“끄륵!”

그런 백수장존의 예상을 증명하듯 고작 백 명의 인원은 몇 배가 넘는 공동파 무인들을 오히려 밀어 붙었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말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살수를 뿌렸던 것이다.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는 뒤로 물러나라!”

“억지로 상대하지 마!”

“힘이 부족하다 싶으면 검진을 펼쳐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사상자에 뒤늦게 도착한 장로들이 소리쳤다.

그러자 주먹구구식으로 괴인들과 혈투를 벌이던 공동파의 제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괜히 명문이 아니라는 듯이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변화는 딱 거기까지였다.

따아앙! 따앙!

여러 명의 제자들이 진형을 이루며 괴인들을 공격했지만 날카로운 검격도, 강맹한 장력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달려드는 괴인들의 육신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던 것이다.

우우웅!

그리고 그건 검기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선명하게 솟구치는 검기나 도기조차도 괴인들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의복만 갈라질 뿐 정작 치명적인 상처는 입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놈의 육신이···!”

“도대체 뭐하는 녀석들이냐!”

이곳저곳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검기조차 견뎌내는 육신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공동파 제자들의 비명 섞인 노성에도 괴인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살육을 이어가기만 했다.

콰아앙!

그때 지금까지와는 다른 폭발음이 들려왔다.

드디어 진짜 고수라고 할 수 있는, 공동파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강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쩌어억!

그리고 그 결과는 곧바로 이어졌다.

시퍼런 검광과 함께 처음으로 괴인들이 피를 토해냈던 것이다.

한데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시커멓게 죽은 피가 절단된 부위에서 솟구치자 여기저기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한 마디 말도 없기에 이상하다 싶기는 했지만 설마 하니 죽은 자였을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시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마물을···!”

팔이 어깻죽지부터 잘렸음에도 별다른 표정 없이 재차 공격을 이어가는 강시의 모습에 공동파의 제자들이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니 자신들이 싸웠던 존재가 강시일 줄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해서였다.

“술법사를 찾아라! 분명 근처에 강시를 조종하는 술법사가 있을 것이다!”

“강시들은 우리에게 맡기고 부상자들은 뒤로 빠지거라!”

괜히 장로가 아니라는 듯이 형형한 강기들을 뿌리며 몇몇 장로들이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부상자들은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지는 삼대제자들이 썰물처럼 뒤로 물러났다.

이대제자들과 일대제자들은 발 빠르게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하지만 주변 어디에서도 술법자로 보이는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다.

“크흑!”

“제, 젠장!”

“무슨 놈의 강시가···!”

반면에 초반에 강렬한 기세를 뿌렸던 장로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밀리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고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강시들은 머리가 잘리지 않는 한 계속해서 공격해왔다.

하지만 장로들은 사람이었다.

더구나 나이도 많았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은 떨어져 갔고, 충만했던 공력 역시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었다.

“켁!”

거기다 장로들은 열댓 명인 것에 비해 강시들은 백 명이나 되었다.

몇 구가 목이 잘려 전투불능이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숫자는 많았고, 그 결과 전세는 다시 강시들 쪽으로 기울어갔다.

푹! 푹! 푹!

시간이 지날수록 밀리는 장로들의 모습에 뒤로 물러났던 제자들이 다시 참전했다.

하지만 그들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표정한 강시들의 살수에 공동파의 제자들이 목과 팔다리가 뜯긴 채로 죽어 나갔다.

“이···! 이···!”

“크아아압!”

때론 자식 같고, 때론 손자 같았던 제자들이 처참하게 죽어 나가는 광경에 장로들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강시는 여전히 강력했고 살아있는 그들은 빠르게 지치고 힘이 빠졌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한편 갑작스러운 야습에 의복도 제대로 차려입지 못한 채 검 하나만 달랑 들고 밖으로 나온 공동파의 장문인이 온몸을 파르르 떨며 포효했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으로 여러 개의 문파들이 떠올랐다.

공동파가 명문대파이기는 하지만 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같은 구대문파이지만 서로 경쟁하는 사이이기도 했고.

‘혹시 마교? 하지만 마교는 강시를 사용한 적이 없는데···.’

장문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지난번 정마대전 당시에도 천년마교는 힘 대 힘의 대결을 펼쳤었지 강시를 사용하지는 않았었다.

게다가 의복이며 외모며 천년마교의 마인들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흘러나오는 한기가 특징이기는 한데 원래 강시는 음한 곳에서 제조된다고 하니.’

장문인이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강시들과 기습한 적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서 빨리 한 명이라도 제자들을 구해야만 했다.

‘빈객들이 도와준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

장문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구대문파의 한 곳으로 꼽히는 공동파였다.

그런 만큼 평상시에 손님으로 머물고 있는 빈객들의 숫자도 제법 많았다.

때문에 그들이 합세해준다면, 힘을 빌려준다면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반전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제야 기어 나왔군.”

“···누구냐?”

“딱 보면 모르나? 나라면 보는 순간 알 거 같은데.”

“어디서 왔느냐?”

“아무리 비슷한 연배라지만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도사 맞나?”

천라혈존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반문에 반문으로 응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장문인은 말 대신 손으로 대답했다.

형형한 안광을 뿌리며 일검을 내질렀던 것이다.

쌔애액!

기습과도 같은 일검이 벼락처럼 뿜어져 나오며 천라혈존의 목을 노렸다.

오로지 죽이겠다는 일념만이 담긴 살초였다.

터어엉!

그러나 기습 같은 장문인의 일검은 천라혈존의 손짓 한 번에 허무하게 튕겨졌다.

가벼운 손짓 한 번에 허무하리만치 쉽게 허공으로 솟구쳤던 것이다.

그 모습에 장문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기습이기도 했지만 기도가 심상치 않기에 이왕이면 쉽게 끝내고자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는데 그걸 어렵지 않게 막아냈기 때문이다.

“누구냐? 어디서 왔지?”

“다짜고짜 살검을 뿌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묻는 게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지 않나? 아니면 물어보면 내가 당연히 대답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웅웅웅!

천라혈존의 손에서 새하얀 강기가 솟구치며 불꽃처럼 일렁였다.

동시에 강시들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끔찍한 냉기가 한순간에 사방을 집어삼켰다.

“설마 북해빙궁···!”

“너무 늦게 알았어. 그리고 알아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고.”

천라혈존의 손이 가볍게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장문인은 그 공격을 절대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손에서부터 솟구친 수강(手罡)이 채찍처럼 휘어지면서 그의 목을 노렸기 때문이다.

쩌어어엉!

“크흑!”

다급히 검을 들어 검신으로 천라혈존의 공격을 막았지만 충격은 고스란히 그의 내부를 뒤흔들었다.

외상은 없었지만 내상이 상당했던 것이다.

그 결과 장문인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공동제일인의 무위가 이게 다라면, 실망인데.”

“이 노옴!”

생각지도 못한 강격에 장문인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동시에 그가 천뢰복마신공(天雷伏魔神功)의 진기를 모조리 끌어 올리며 천라혈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살벌한 기세와 달리 무릎을 꿇은 건 놀랍게도 장문인이었다.

십 합을 채 넘기기도 전에 양팔이 뜯겨지며 주저앉았던 것이다.

“쿨럭!”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수장이니 저승에서도 앞장서야 하지 않겠어?”

푸욱!

새하얀 수강이 장문인의 심장을 관통했다.

그런데 그가 죽자 마치 짠 것처럼 다른 곳도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친 장로들을 시작으로 일대제자, 이대제자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던 것이다.

잠시 후 공동산에 화마(火魔)가 솟구쳐 올랐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난 심대현은 조용히 숙소에서 나왔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에게는 결코 이르지 않았다.

객잔에서 일할 때는 지금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시작해볼까.”

눈을 비벼서 남아 있던 눈곱을 뗀 심대현이 환하게 웃으며 빗자루를 들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아침청소이기에 그가 나서서 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자신과 형제들을 거두어준 벽우진에게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고자 심대현은 매일 아침 청소를 했다.

그나마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청소였기 때문이다.

“형.”

“더 자지 왜 나왔어?”

< 제 14장. 북한남독(北寒南毒).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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