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4장. 북한남독(北寒南毒). -02 >
여인이 당당하게 말했다.
가진 바 능력을 굳이 축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그녀가 본 벽우진은 거짓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수많은 군상을 보아온 그녀였기에 보는 순간 알았던 것이다.
절대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청민 진인보다 사형이라고 했으니.’
하오문의 청해성 분타주 양선은 최대한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며 벽우진을 마주했다.
자신 있게 말한 만큼 그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벽우진이 자신의 말을 믿을 테니까.
‘그나저나 믿기지가 않네. 겉보기에는 진짜 약관 남짓으로 보이니.’
양선이 새삼 벽우진의 외견에 놀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했다면 벽우진을 절대 일흔다섯 살로 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빛은 또 달랐다.
애송이가 가질 수 없는 눈빛을 벽우진은 가지고 있었다.
“당가가 할 수 없는 일이라.”
“물론 원하지 않으신다면 이대로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 불편하시다면 제가 떠나는 게 맞으니까요.”
“뭔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인데. 건방지게 말이지.”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거친 벽우진의 말에 양선이 곧바로 사과했다.
누가 뭐래도 이곳은 곤륜파였고, 갑은 벽우진이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천검문주와 천류검대를 증발시킨 사람이 눈앞에 있는 벽우진일 것이기에 양선은 납작 엎드렸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수행원들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짐작은 맞다고 말해두지. 난 하오문이라고 해서 딱히 악감정이나 편견은 없어.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 무인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선인만 있는 것도 아니니.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해두는 건 난 악인은 좌시하지 않아. 각자의 삶은 존중하지만, 악행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양선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의 말에서 그녀는 벽우진이 생각하고 있는 경계선을 알 수 있어서였다.
더불어 예상보다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선입견이 없다고 해서 섣불리 믿을 수도 없는 법이지.”
“맞습니다.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필요하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말은 참 잘해. 역시 연륜은 무시할 게 안 된다니까.”
“감사합니다.”
단숨에 자신의 주안술(朱顔術)을 꿰뚫어 봤지만 양선은 놀라지 않았다.
벽우진의 무경을 생각하면 절대 이상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 사실에 실망했을 터였다.
“어쨌든 오늘의 자리는 이쯤하자고. 서로의 생각은 잘 알았으니까.”
“약소하지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거절하지 마시고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연스러운 축객령에 양선이 손을 뒤로 내밀었다.
그러자 수행원 중 한 명이 길쭉한 목궤를 그녀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선물?”
“예. 갑자기 찾아온 것도 그렇고, 이렇게 자리를 내주신 것도 감사해서요.”
“난 탈이 날 것 같은 뇌물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약소한 선물입니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쿠웅.
제법 묵직한 소리와 함께 탁자 위에 놓인 목궤를 벽우진이 묘한 눈길로 쳐다봤다.
직사각형의 길쭉한 모양인데 높이가 제법 있자 무슨 물건인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뭐야?”
“열어보시죠.”
“암기나 화탄 같은 건 아니겠지?”
“설마요.”
양선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 위험한 물건은 그녀도 사절이었다.
가늘고 길게 사는 게 목표인 그녀에게 암기와 화탄은 가급적 멀리 해야 하는 물건들이었다.
“흠.”
목궤와 양선을 번갈아 바라보던 벽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닫혀 있는 목궤를 열었다.
“마음에 드실 거라 생각합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선물인데.”
“입문용이라고 하더라도 이왕이면 좋은 물건을 사용하는 게 좋으니까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과거 곤륜파에서 수련용으로 사용하던 검입니다. 운 좋게도 곤륜파에 납품하던 대장장이를 찾았거든요.”
스르릉.
벽우진이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목궤 안에 담겨 있던 청강검 한 자루를 꺼냈다.
과거 그의 사부로부터 처음 받았던 입문용 검과 똑같은 모양과 무게였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잊혀지지 않는 그때의 기억과 감동이 다시금 생생하게 떠오르는 느낌에 벽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 검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마음에 들어 하시니 저도 기쁩니다.”
“선물, 감사히 받으마.”
“저도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
진심으로 좋아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양선이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할 거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몰라서였다.
게다가 첫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었기에 양선은 내심 긴장했었는데 다행히 잘못 끼웠던 첫 단추를 다시 잘 끼워 맞춘 것 같아 그녀는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 빚, 나중에 꼭 갚겠다.”
“아닙니다. 선물이니 그냥 받으시면 됩니다. 다만, 한 가지 욕심이 있다면 저희를 좋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좀 더 두고 보고. 아직은 확실하게 알지 못하니까.”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점수를 많이 딴 지금이야말로 일어나기에 딱 좋은 순간이었기에 양선은 머뭇거리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처음과 같이 공손하게 포권을 하며 인사했다.
“다음에 올 거면 미리 연락하고 오도록. 괜히 기다리지 말고.”
“그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를 찾으실 일이 있으시면 마을의 홍학루에 제 이름을 말씀하시면 됩니다.”
“이름을 모르는데.”
“양선이라 하옵니다.”
“내 이름은 말하지 않아도 알지?”
벽우진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양선이 당연하다는 듯이 웃었다.
“알고 있습니다.”
“조심히 내려가라고.”
“예. 다음에 뵙겠습니다, 장문인.”
한결 경계심이 누그러진 듯한 벽우진의 모습에 양선은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렸다.
이윽고 그녀는 두 명의 수행원과 함께 접객당을 나갔다.
“하오문이라. 이거 일이 재미나게 흘러가는데.”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양선을 떠올리며 벽우진이 중얼거렸다.
사천당가도 그렇고 하오문도 그렇고 생각지도 못한 곳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게 결코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으면 좋았지.
“이렇게 되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라지겠는데. 좋아, 좋아.”
벽우진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양선이 주고 간 선물을 냉큼 집어 들고는 접객당을 나섰다.
한편 곤륜산을 내려오던 양선 역시 벽우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말로 들었던 것보다 더한 인물임을 이번의 만남으로 느낄 수 있어서였다.
그리고 수하들에게 들은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벼움 속에 태산이 있는 느낌이랄까.’
양선은 벽우진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약관 남짓으로 보이는 외견은 누가 봐도 늙은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젊은 외모 안에는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것도 만만치 않게 영악한 구렁이가 말이다.
“일영.”
“예, 주군.”
“직접 보니까 어때?”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심복이자 수신호위인 일영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양선이 그렇게 강하다고, 대단한 인물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솔직히 믿지 않았다.
곤륜파는 더 이상 예전의 곤륜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물론 천검문이 몰락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하나 일영은 무공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이용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굳이 무공이 아니더라도 무인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많았으니까.
사실 혼자서 천검문주와 장로들, 그리고 천류검대를 쓰러뜨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구파일방의 장문인이나 장로들이 아닌 한은 말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벽우진을 본 순간 산산이 박살났다.
‘몸이 떨렸지.’
마치 맹수 앞에 놓인 초식동물처럼, 혹은 뱀 앞의 개구리처럼 벽우진과 눈이 마주친 순간 일영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단순히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벽우진은 별다른 기도를 흘리지도 않았다.
꿀꺽!
그때의 광경을 떠올리자 일영은 다시 몸이 떨려왔다.
한데 그건 옆에 있던 이영도 마찬가지인 듯 움찔거렸다.
“세상에는 믿기 힘든 일이 의외로 많이 벌어져. 또한 사람은 자기가 본 것만 믿는 경향이 있지. 바로 거기서 실수가 나오는 거고.”
“···맞습니다.”
“벽 장문인은 신비한 사람이야. 모든 게 신비롭지. 그리고 그 말은 대부분이 감춰져 있다는 뜻이고.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어?”
“잘 모르겠습니다.”
“변수를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야. 잘 생각해 봐. 장문인이 나타나고서 곤륜파에, 청해성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일영의 동공이 서서히 확대되었다.
단지 한 명이 나타난 것뿐인데 청해성에는 정말 큰 변화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같이 굵직굵직한 것들이 말이다.
“그래서 내가 직접 찾아간 거야. 보통의 인물이었다면 대호방이나 백운산장처럼 청하상단을 찾아갔겠지. 거기서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테니까. 하지만 난 그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여기까지 온 거야. 덕분에 많은 것을 얻었고.”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미안할 건 없고. 아직 젊어서 그런 거니까. 그보다 서둘러야겠어. 문주님께 서신을 보내야 해.”
“알겠습니다.”
세 사람의 발걸음이 빨라지더니 이내 점이 되어 사라졌다.
휘이이잉.
감숙성 평량현(平凉縣)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동산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어둠이 짙게 내린 야밤에, 심지어 짙게 깔린 구름으로 인해 초승달마저 보이지 않을 때 이백여 명의 인원이 공동파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늘어지게 쳐 자고 있네. 보초도 없이.”
“평화에 찌들어 있는 거지. 정마대전이 끝난 지 삼십 년이 훌쩍 지났으니까.”
“근데 왜 우리 둘씩이나 보낸 건지. 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하건만.”
“중원 구파일방 중 한 곳이잖아. 그만한 대우는 해줘야지. 중원무림을 떠받치는 열 개의 기둥 중 한 곳인데.”
싸늘한 바람과 함께 서서히 밀려나는 구름 사이로 초승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무리의 선두에 서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나같이 새하얀 은발을 지니고 있는 두 중년인의 모습이 말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머리카락의 색깔은 똑같았지만 눈동자는 달랐다.
“기둥은 무슨. 그저 옛 명성에 취해 있는 승냥이들일 뿐이지.”
“그건 붙어 봐야지. 삼제오왕칠성(三帝五王七星)에 속해 있는 무인이 없다고 하나, 그래도 구대문파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게 공동파야. 만만하게 봐서는 안 돼.”
“그러면서 긴장은 왜 안 하는데?”
“조심은 하겠지만 지지는 않을 거라 확신하니까?”
벽안을 가진 중년인이 히죽 웃었다.
아무리 구파일방의 위상이 대단하다고 하나 그래봤자 중원에서나 그런 것이었다.
북해에서는 공동파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동파 따위에 질 거였으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았어야지.”
“맞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대할 만한 무인이 있으면 좋겠군. 너무 시시하면 여기까지 온 발걸음이 아까우니까.”
“그럼 내가 양보하는 걸로. 난 굳이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같은 십존(十尊)에 속해 있는 백수장존(白手掌尊)의 말에 천라혈존(天羅血尊)이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결벽증 환자 아니랄까봐 벌써부터 손을 안 쓸 생각부터 하고 있어서였다.
“궁주님의 명을 잊은 건 아니겠지?”
“물론. 근데 네가 나서면 내가 나설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도 네 말마따나 구파일방 중 한 곳이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은거고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그때 나서는 걸로. 됐지?”
백수장존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손을 들었다.
쿵쿵쿵쿵쿵!
< 제 14장. 북한남독(北寒南毒).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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