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42화 (42/325)

< 제 14장. 북한남독(北寒南毒). -01 >

연무장 멀찍이서 대련을 지켜보던 청민이 조금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당분간 무공사범을 맡은 진구는 정말 봐주는 게 없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벽우진은 도리어 그 모습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너무 과격한 거 같습니다.”

“진구 호법 실력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때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분이시다. 그리고 좀 과격해 보일 뿐이지 실질적인 상처는 심해야 피멍 정도일 거다.”

“···피멍도 아이들에게는 심각한 상처인데요?”

“내상을 입는 것도 아니고 관절이 꺾인 것도 아니고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벽우진이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청민이 살짝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 나이는 생각하지도 않고 말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아직 어린 아이들입니다.”

“저 정도면 다 컸어. 자기 진로 생각할 나이이기도 하고. 그리고 소천이나 소혜는 진 호법도 알아서 신경 쓸 거야. 두 아이야말로 진짜 어린애들이니까.”

“으음!”

“그리고 잘 봐. 아이들의 눈빛을. 저게 억지로 대련하는 것으로 보여?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더 달려드는 것처럼 보이는데.”

청민이 두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진구가 후려 패는 모습이라기보다는 아이들이 달려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진구는 오히려 피하기만 할뿐 딱히 반격은 하지 않았다.

대신 입은 쉴 새 없이 놀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우리는 도사이지만 무인이기도 하고 전사이기도 해. 게다가 정마대전은 아직 끝난 게 아니고.”

“···그렇죠.”

정마대전을 꺼내자 자연스럽게 천년마교가 떠올랐다.

동시에 청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에게 있어 천년마교는 불구대천의 원수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사부와 사백, 사조는 물론이고 수많은 사형제들이 마인들 손에 죽어갔기에 청민은 결코 천년마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저렇게 하는 게 맞아.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니까.”

“제가 더욱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잘해주고 있어. 네가 노력하는 건 내가 가장 잘 아니까.”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가끔은 쉬었다가 가는 게 필요해. 너무 당기기만 하면 결국 줄은 끊어지기 마련이니까.”

벽우진이 청민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 연무장 한쪽에서 진구와 제자들을 힐끔거리는 당가의 아이들을 주시했다.

“많이 부러운 모양입니다.”

“다정하지는 않지만 실력은 확실히 뛰어난 무공사범이 진 호법이니까.”

“대호방의 부방주를 두드려 패고 태산권이라는 별호로 불린다고 합니다.”

“진 호법의 별호 치고는 너무 무난한데? 성격적 특징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잖아. 다시 만들라고 해.”

벽우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과 어조가 너무나 진지했다.

“별호는 세인들이 만들어주는 건데요.”

“마음에 들지 않아.”

“허허허.”

진심이 담겨 있는 벽우진의 목소리에 청민은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동의는 하지만 그렇다고 별호를 바꾸는 건 그가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충 웃음으로 때운 청민이 고개를 돌려 당가의 아이들을 쳐다봤다.

여전히 부러운 눈으로 제자들을 바라보는 당가 사람들을 말이다.

“그나저나 공사가 끝날 때까지 머물 생각인가?”

“아무래도 어느 정도 진척이 되어야 가지 않겠습니까? 영단도 아직 제조가 다 끝나지 않은 상태고요.”

“이제는 그만 사천성으로 돌아갔으면 하는데 말이지.”

“그보다 사형. 검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청민의 시선이 벽우진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주먹도 잘 쓰고 박투에도 일가견이 있지만 그가 기억하는 벽우진의 진신절기는 검공이었다.

사형제들 중에서도 검공 하나만 따지면 장문제자 못지않던 실력자가 벽우진이었기에 청민은 서둘러 저 빈 허리춤에 검을 채워주고 싶었다.

“글쎄다. 나는 이제 딱히 검이 필요한 경지는 아니라서. 있으면 편하기야 하지만 그렇다고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 게다가 아무 검이나 찰 수도 없고. 태청검이랑 소청검은 부서졌다며?”

“예. 검마(劍魔)와 소마(小魔)의 손에 부러졌습니다.”

청민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곤륜파의 신물이자 장문령부라고 할 수 있는 태청검이 검마의 검에 의해 동강나는 게 아직도 그의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문제자에게 하사되는 소청검의 경우 부러지는 걸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반 토막 난 조각을 확인했었다.

“그 복수는 언젠가 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너무 괴로워하지 마라. 두 검 다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곤륜파의 전부인 것은 아니니까.”

“청범이랑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직접 제작하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태청검이나 소청검만 한 검을 만들 실력자가 있을까 모르겠구나.”

벽우진이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어투로 말했다.

웬만큼 뛰어난 대장장이가 아니라면 태청검 수준의 보검을 만드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실력이 뛰어나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실패하는 게 보검, 명검이기도 했고.

“그래도 알아봐야지요. 언제까지나 장문령부가 없을 수는 없으니까요.”

“일단 네 수련에 집중해. 알지? 내가 없으면 곤륜파를 지켜야 하는 게 너다.”

“그건 늘 명심하고 있습니다.”

“저기, 장문인···.”

벽우진이 청민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이번에 사천당가에서 온 기술자이자 인부인 중년인이었는데 그는 등에 짐을 한 가득 짊어진 채로 벽우진을 향해 쭈뼛거리며 걸어왔던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산문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이요?”

“예. 장문인를 꼭 뵙고 싶다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신분이 범상치는 않아 보였습니다.”

중년인이 자신이 본 바를 상세하게 말했다.

그러나 쓸모 있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보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별 거 아닌 일인데요.”

할 말을 마친 중년인이 다시 공사장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벽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돌렸다.

“어디서 온 손님일까요? 딱히 올 곳이 없는데.”

“만나보면 알겠지. 넌 하던 일 해.”

“혼자 만나보시게요?”

“응. 그게 편하니까.”

“알겠습니다.”

환골을 이루고 임독양맥을 타통한 청민은 더 이상 보잘 것 없는 하류무사가 아니었다.

내공만 따지면 절정을 넘어 최절정에 도달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 제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에 경지를 숨기거나 감추는 게 아직은 부족했다.

그것을 청민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애들 챙기고 있어.”

“예.”

벽우진이 산길을 휘적휘적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청민 역시 이내 아이들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또르륵.

무거운 침묵 속에서 차가 찻잔에 차가 따라졌다.

접객당에 네 사람이 앉아 있었음에도 오직 차가 찻잔을 채우는 소리만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대화를 하지 않았을 뿐 손님으로 온 세 명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나를 찾아오셨다고.”

“예, 장문인.”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는 초면인 것 같은데.”

“저 역시 장문인을 처음 뵙습니다. 하지만 들은 얘기는 많지요.”

“들은 얘기가 많다.”

의미심장한 여인의 말에 벽우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짧은 한 마디였지만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서였다.

그래서 벽우진은 심유한 눈으로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지그시 주시했다.

“아무래도 제가 앉아있는 자리가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는 자리라서요. 그리고 저희 쪽에서 실수한 것도 있고 해서 사과도 할 겸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만날 수 있을 거라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요.”

“곤륜파의 문턱은 그리 높지 않은데.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근데 실수라고 하면 혹시?”

“맞습니다. 예전에 장문인께서 제 부하에게 경고를 한 번 하셨습니다.”

“호오.”

벽우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번의 대답으로 여인의 소속이 어디인지, 어떤 곳에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있어서였다.

“그때는 정말 죄송했었습니다. 허락도 받지 않고 무례하게 찾아왔으니까요.”

“이 시점에서의 사과라.”

벽우진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주 오래 전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제법 시간이 지난 일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굳이 사과할 필요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을 찾아왔다는 건 따로 목적이 있어서인 게 분명했다.

“핑계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지만 제가 생각하는 진실한 사과는 서신이나 대리인을 통해서 하는 게 아니라 직접 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맞는 말이기는 하지. 그런데 나에 대해 꽤 많이 조사한 모양이야.”

벽우진이 편하게 말했다.

태도를 보아하니 자신에 대해서 제법 상세히 조사한 것 같아서였다.

“아무래도 제가 속해 있는 곳이 정보를 다루는 곳이다 보니 우연찮게 알게 되었습니다.”

“뭐, 굳이 비밀로 할 생각은 없으니까. 언젠가는 알려질 사실이었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아직 저희는 장문인의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누설한 적은 없습니다. 판매한 적도 없고요.”

“고마워해야 하나?”

“아닙니다. 따로 바라는 게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니까요.”

왠지 모르게 퇴폐적으로 느껴지는 외모를 가진 여인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까칠한 벽우진의 태도에도 딱히 어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할 말을 다 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벽우진이 속으로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신변잡기는 이쯤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지. 설마 사과만 하러 왔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겸사겸사 인사도 드릴 겸 해서 찾아뵌 것입니다. 제가 담당하는 곳이 청해성이니 만큼 앞으로 자주 뵙게 될 것 같아서요. 더불어 가능하다면 장문인과 교분도 나누고 싶고요.”

교분이라는 말에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말이 좋아 교분이지 자신과 곤륜파에 잘 보이고 싶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본파보다는 대호방이나 백운산장을 찾아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오는 길에 봐서 알겠지만 우리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상태라서 말이지.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명성도 없지.”

“하지만 청해성을 주름 잡을 수 있는 고수와 당가라는 인맥을 가지고 계시지 않나요.”

“역시 하오문이라고 해야 하나?”

“저희뿐만 아니라 제갈세가와 개방도 알고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곤륜파가 다시 재건 중이라는 사실 정도는요.”

“그렇겠지.”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개방이라면 충분히 관심을 가질 만 했기 때문이다.

명문정파의 눈과 귀를 대신하는 곳이 개방이었으니까.

제갈세가 역시 다른 문파나 방파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

“다른 부분은 모르지만 적어도 정보에 관해서는 저희가 장문인께 제법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이해가 안 가. 보아하니 분타주쯤 되는 거 같은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이러는 게 말이지.”

“장문인께서 지금 짐작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곤륜파는 머지않은 때에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좋은 인연으로 남고자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미리 끈을 만들어 두겠다?”

“예. 물론 흑도에 가까운 저희를 꺼림칙하게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쓸모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천당가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저희는 할 수 있으니까요.”

여인이 새빨간 입술을 오물거리며 벽우진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시종일관 굽히듯이 말하는 것과 달리 당당한 그녀의 시선에 벽우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만만한데?”

“허세가 아니라 실제로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 제 14장. 북한남독(北寒南毒).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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