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41화 (41/325)

< 제 13장. 예견된 손님. -04 >

“그런 뜻이 아니라, 내 말은···.”

“아니긴. 그럼 뭐야? 사천당가와 비교하면 쫄딱 망한 상태니 납작 엎드려라 이건가?”

“왜 또 이야기가 그리로 가?!”

당황한 당민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건 화가 나서가 아니라 당혹스러워서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얌전히 앉아 있던 당필교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당민호가 저렇게 쩔쩔 매는 모습을 그는 본 적이 없어서였다.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못한다. 내 이름을 걸고서도 못하지만 사문의 명예 때문에서라도 난 받아들일 수 없다.”

“아직 내 얘기 안 끝났어. 일단 듣고 나서 결정해. 네가 자주 하는 말처럼 강요하는 게 아니라니까?”

“더 들을 게 있어?”

벽우진이 정색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어서였다.

동시에 당민호에게 실망했다.

자신은 나름 편의를 봐주었는데 정작 벗이라고 할 수 있는 당민호는 그를 호구로 보는 것 같아서였다.

“있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지만 난 널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마치 내가 널 호구로 본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절대 아니다. 나 그런 놈 아니야. 이 나이 먹고 그렇게 약 팔지 않는다.”

“······.”

당민호가 구구절절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벽우진의 시선은 여전히 삐딱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지그시 당민호만 바라봤던 것이다.

그런데 단순한 그 시선에 당민호는 물론이고 당필교도 이상하게 압도되었다.

“얘기만이라도 들어줘.”

“해 봐.”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동맹이다. 단순히 거래를 주고받는 것을 넘어 곤륜파와 당가가 동맹을 맺는 거다. 즉 서로 협력관계가 되자는 거지. 힘들 때 도와주면서 상부상조하는. 물론 동등한 위치에서.”

“호오.”

“곤륜파에 부족한 것을 본가는 채워줄 수 있다. 금전적이든, 정보력이든.”

이어지는 당민호의 부연설명에 벽우진이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금전적인 것은 아직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정보력은 달랐기 때문이다.

당장 청해성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만 하더라도 청하상단을 통해서 들을 수밖에 없는 게 현 곤륜파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천당가에서 정보력을 빌려준다면, 적어도 원하는 정보를 알아봐 준다면 벽우진으로서도 나쁘지 않았다.

“준비를 많이 했는데?”

“난 사천당가의 태상가주지만 동시에 네 친구이자 벗이다. 당연히 널 벗겨먹을 생각이 없어. 그 정도로 못나지도, 능력이 없지도 않고.”

“갑자기 네가 멋져 보이는데.”

“나쁘지 않은 조건이지?”

벽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곤륜파에게 딱 필요한 부분을 긁어주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조율할 부분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원하는 개수는?”

“비천단 세 개와 새로운 영단 세 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 너도 알고 있지?”

“흠흠! 우리도 기술 유출을 각오하고 필교를 데려 왔고, 또 정보력도 빌려주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당민호가 슬쩍 벽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 역시 공급자였지만 가치는 아무래도 영단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벽우진의 입장에서는 대안이 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급자가 공급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로서는 저자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좋아졌던 기분이 다시 하락하고 있어.”

“두 개. 우리도 최소한 이 정도는 받아야지. 곤륜산까지 와서 일일이 다 만들어주는데.”

“근데 이 인원으로 가능해?”

“확정되면 인원은 더 올 거야. 여기서 구할 수 있는 자재도 있지만 본가에서만 구할 수 있는 필수재료도 있으니까 그것도 가지고 올 겸.”

“좋아.”

벽우진이 흡족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크게 이득을 본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큰 손해를 본 것도 아니어서였다.

어떻게 보면 적당히 손해를 보고 적당히 이득을 봤다고나 할까.

물론 그건 연기일 뿐이었다.

‘단가로 계산하면 얼마야? 엄청 남네. 인건비를 뺀 단가이기는 하지만 뭐, 인건비야 크게 들어가지 않으니까.’

다른 이들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가치가 있는 영단들이겠지만 벽우진에게는 아니었다.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면 여유롭게 만들어 낼 수 있었기에 벽우진은 속으로 웃으며 당민호와 손을 맞잡았다.

“그럼 이렇게 결정하는 걸로?”

“응. 근데 굳이 공식적으로 동맹까지 맺을 필요가 있나? 이미 이 정도면 협력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준비는 원래 평화로울 때 해야 하는 거다. 너 우리 가문 철칙 아직 기억하고 있지?”

“물론. 은혜도 잊지 않지만 원한은 더더욱 잊지 않는다잖아. 아니, 은혜는 열 배, 원한은 백 배이던가?”

벽우진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사천당가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서였다.

“얼마 전에 제갈세가에서 서신이 왔었다. 본가가 봉문을 푼 것을 알고는 한 번 만나자는 것이었지.”

“아직 오대세가이니까. 게다가 인연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날을 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보면 그게 맞지.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리고 가주는 정마대전을 절대 잊지 못한다. 아니. 잊지 않는다.”

당민호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분명 오대세가라는 같은 울타리 안에 있었음에도, 더 넓게는 다 같은 명문정파임에도 그들은 사천당가가 마교의 전위부대와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오히려 그걸 이용했다.

사천당가를 지원하기는커녕 마교의 전위부대를 막아주는 사이 중원 전역의 힘을 끌어 모았던 것이다.

물론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게 맞는 선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천당가를 버리는 패로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적어도 적은 병력이라도 사천당가에 힘을 보태주는 게 맞았으나 중원무림은 그러지 않았다.

“본파와 같은 입장이기는 했지.”

“그래서 우린 오대세가도, 구파일방도 믿지 않는다. 한 번 그랬던 놈들이 두 번 그러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리고 정마대전은 끝났지만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었지. 우리가 힘을 회복하고 중원무림이 전력을 복구한 만큼 천년마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제일 뒤쳐졌지.”

벽우진이 마치 딴 집 상황을 얘기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건 결코 포기하거나 체념해서가 아니었다.

곤륜파는 무너졌으나 그렇다고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있고 청민이 있었으며 청하상단과 새로운 제자들이 있었다.

“때문에 곤륜파 입장에서도 동맹을 맺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하면. 더욱이 이번으로 끝낼 게 아니니까.”

“욕심이 아주 뚝뚝 떨어지네.”

“소윤이를 봤는데 욕심이 안 생기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괜히 보여줬어. 좀 더 늦게 비술을 했어야 했는데. 내가 마음이 급해서.”

벽우진이 혀를 차며 자책했다.

하지만 그 모습에 당민호는 넘어가지 않았다.

영악한 벽우진이 일부러 허술한 척을 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어서였다.

“나야 좋았지. 그리고 네가 생환해서 더욱 기뻤고.”

“닭살 돋는 얘기는 그만하고. 일단 계약서부터 써야겠지? 혹시 모르니까.”

“확실한 게 좋지. 우리도.”

“근데 공사는 언제부터 시작할 거야? 장소는 내가 봐둔 곳이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바로 보고 싶습니다. 일단 설계도도 그려 놓아야 하니까요.”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기만 하던 당필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관진식이라는 게 장소와 재료만 있다고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주 좋은 자세야. 마음에 들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서두른다고 대충, 건성건성 만들면 안 돼. 빠르지만 확실하게. 이 두 개가 안 되면 차라리 느리더라고 확실하게 만들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당필교가 믿음직스럽게 대답하자 벽우진이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가슴이 든든해지는 느낌이었다.

“근데 너희 개파식은 안 해?”

“할 필요가 없지. 곤륜파는 늘 제 자리에 있었는데. 다만 사람들이 잊었을 뿐이지.”

“으음.”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게다가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데 굳이 번거롭게 왜 해?”

“그래도 공표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찾아오는 손님들도 분명히 있을 테고.”

당민호가 넌지시 운을 띄웠다.

공식적으로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파식을 축하한다며 찾아올 곳들이 제법 될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이미 청해성 대부분의 문파들이 귀추를 주목하고 있으니까.

“그럼 뭐해. 정작 힘들 땐 도와주는 곳 하나 없었는데.”

“뭐, 그렇긴 하지.”

퉁명스러운 벽우진의 대답에 당민호가 피식 웃었다.

표독스러운 당가 사람 못지않게 뒤끝이 긴 사람이 바로 벽우진이었기 때문이다.

“자, 수결해.”

대화하는 사이 계약서를 직접 다 작성한 당민호가 자신의 수결을 써놓고는 벽우진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벽우진은 곧바로 수결을 쓰지 않았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꼼꼼히 계약서를 읽었다.

곤륜파의 장문인인 만큼 계약서에 수결을 함부로 쓰지 않았던 것이다.

“잘 썼네.”

“많이 컸어.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모양이야.”

“흥.”

확인을 끝낸 벽우진이 유려하게 수결을 써넣었다.

그리고는 두 장 중 한 장을 당민호에게 밀었다.

“하아압! 합!”

힘찬 기합성과 함께 양일우가 쉴 새 없이 목검을 휘둘렀다.

원래부터 타고난 체격이 있는데다가 곤륜파의 본산제자가 된 후 먹는 걸 잘 먹어서 그런지 양일우는 처음 봤을 때보다 한 뼘은 더 자란 상태였다.

웬만한 장정 못지않은 키에 익힌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공심법을 익혀서 그런지 파공성이 제법 날카로웠다.

스윽. 슥.

다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호법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인 진구가 바로 양일우의 대련 상대였기 때문이다.

“느려. 호흡도 불규칙. 보법도 엉성하고. 그나마 봐줄만 한 건 투지 정도?”

“헉헉!”

반 각이 채 흐르기도 전에 지쳐버린 양일우를 보며 진구가 팔짱을 낀 상태로 품평을 했다.

하지만 개차반인 그의 성격을 보면 상당히 부드러운 충고였다.

원래 그의 성격대로라면 일단 정권부터 한방 꽂아 넣고 말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피하기만 했다.

“그래도 뭐, 짧은 시간에 이 정도면 최악은 아냐.”

“아직, 아직 안 끝났습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

이미 얼굴과 전신은 땀으로 흥건했다.

그뿐만 아니라 두 팔과 두 다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지만 양일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멈추면 편히 쉴 수 있지만 그럼 그의 성장은 여기까지였다.

때문에 양일우는 포기할 수 없었다.

“대단하다···.”

“역시 우리 형!”

무인이 되기로 한 이상 양일우는 천하에 자기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정점에 서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었는데 그게 다른 제자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근성 넘치는 모습에 다른 이들 역시 투지가 치솟았던 것이다.

“으아아압!”

“훗.”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균형과 검로였지만 진구는 양일우를 조금도 무시하지 않았다.

나이가 어리고 수준이 낮다고 하나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그 이상을 뽑아내고 있는 충분히 존중 받을 가치가 있었다.

때문에 진구는 뒷짐을 풀고서 진지하게 양일우에게 일격을 날렸다.

“커헉!”

복부로 파고드는 묵직한 일격에 양일우의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부릅떠졌다.

하지만 그 모습은 잠시뿐이었고 양일우는 이내 기절해서 쓰러졌다.

“다음.”

“이번에는 제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좋아.”

친동생인 양이추가 양일우를 챙겨서 연무장 가장자리로 끌고 가자 심대현이 앞으로 나서며 포권했다.

그러자 진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먼저 공격하라는 듯이 손짓했다.

“진짜 실전처럼 하네요.”

“그래야 실력이 늘지. 대충하면 실력도 어중간해지는 법이야.”

< 제 13장. 예견된 손님. -04 > 끝

ⓒ 윤신현

=======================================


0